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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스피스 병동 살리는 게 저를 기념하시는 일"양영철 교수가 전하는 '제주근대화의 선구자' 맥그린치 신부 (21)
기념사업회와 함께 한 맥그린치 신부 회고경진대회 이야기(2)
양영철  |  yongchul@jeju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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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9.18  17: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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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림수직, 명성을 얻다

이봉선 할머니 이야기다

이봉선(79) 할머니는 한림읍 한수리에서 태어났다. 나면서부터 장애가 약간 있었다. 그렇지만 큰 불편이 없었다. 할머니는 25세에 이시돌과 첫 인연을 맺었다. 한림수직을 시작할 때 창립멤버 5인 중 한사람이다. 할머니는 한림수직을 처음 열 때 기본을 가르치기 위하여 오신 아일랜드수녀회 로사리 수녀와 35년간 한림수직에 근무하였다. 그리고 정년인 60세까지 일했다.

그래선지 기억은 생생했다. 맥그린치 신부 고향에서 들여온 수직기구·기계에 대한 기억도 생생했다. 처음에는 한림에서 키운 양에서 털을 뽑아내 실을 만들고 이를 물감을 입혔다. 그런데 물감을 입히는 일이 그렇게 쉽게 되지 않았다. 이 기술을 당시 맥그린치 신부와 성당 일에 열성이던 임춘호씨가 뭍에 가서 배워왔다. 기술전수를 위해 제주에 온 아일랜드 수녀들도 취미로 수를 놓았을 뿐이지 전문가 수준은 아니었다. 염색기술까진 없었던 것이다.

   
▲ 1960년대 한림수직 여성들이 직물수직 작업을 하는 장면이다.
시로 맥그린치와 수녀들은 서울 등지 전문학원을 찾아가 기술을 익혔다. 처음엔 서툰 솜씨탓에 엉성했지만 갈수록 제 품질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느덧 한림수직 직물이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밤을 새우며 노력한 결과였다. 그러다보니 이젠 양털 물량이 달렸다. 밀려드는 수요를 맞추고자 부산 대일섬유와 계약, 털실을 공급받았다. 점점 생산물량을 늘었다. 3년이 안 돼 직원이 80명을까지 불었지만 주문량을 못 맞출 정도로 즐거운 비명이 지속됐다.

맥그린치는 제주에 일자리가 너무 없다는 것을 늘 안타까워하였다. 사실 한림수직도 한림마을 한 여자 아이가 일자리를 찾아 부산에 갔다가 사고사로 숨져 시신으로 귀향한 걸 보고 시작한 일이다. 일손이 달리자 맥그린치와 수녀들은 한림수직 안이 아니라 밖에서 일손을 찾았다. 성당 곳곳을 다니며 로사리 수녀가 신자들을 설득했다. 털실과 디자인을 줄 터이니 해보라고 하자 처음에는 호기심 반에서 시작하던 신자들이 결국엔 폭증했다. 1300명에 이를 정도였다.

한림수직 직원들은 옷을 짜기 보다는 이들을 교육시키고 만든 옷의 품질검사 후 가져오기 바빴다. 매달 5일, 15일, 25일 3차례 성당으로 완성된 옷을 가져 오면, 불량품은 다시 만들게 하고, 기술이 부족한 부분은 다시 가르쳐 주고 하였다. 옷을 짜는 인원이 많으니 제품은 차고 넘쳤다. 성당마다 한림수직 직원용 방을 둘 정도였다. 처음에는 한림주변에서 하다가 제주시를 거쳐서 남제주군, 서귀포까지 제주전역 여성들이 한림수직의 임시직 직원이 된 것이다. 전업하는 사람에서부터 낮에는 밭이나 해녀 일을 하고 밤에 수를 놓는 사람들까지 다양했다.

부지런한 사람은 월 80만원까지 수입을 올렸다. 그 시절 80만원은 지금 1000만원을 웃돈다. 일이 인기가 있자 일감을 더 달라고 하는 여성에서부터 일을 시작하게 해달라고 간청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젊은 사람에게는 어려운 제품, 예를 들면 스웨터나 잠바 등 곡선이 많이 들어가는 수를 놓도록 하였고, 나이 드신 여성들에게는 목도리 등 직선으로 가는 쉬운 일을 맡겼다. 물론 서울 유명호텔에서 이 제품이 달개 돋친 듯 팔렸다. 많은 제주여성들이 한림수직을 통해 아이를 학교로 보내고, 시집·장가를 보냈다.

이봉선 여사는 말미에 “맥그린치 신부가 우릴 살렸다”며 신부의 손을 꼭 잡았다.

4H 클럽, 제주 새마을운동의 씨앗을 뿌리다.

남상민씨의 회고담이다.

남상민씨는 제주도 고위 공무원을 지낸 인사다. 그는 스스로 “그나마 공무원이 된 건 순전히 맥그린치 신부 덕”이라고 말했다. 맥그린치 신부는 그가 아주 어릴 때 한림성당에 부임했다. 남씨는 13세이던 1958년부터 성당에 다녔다. 성당에 다닌 이유는 단지 하나. 그 시절 맥그린치가 타고 다니던 아일랜드제 차 밀리스라는 트럭을 타고 싶어서다. 신부는 4H 대원들을 그 차에 태우고 다녔다. 남씨는 맥그린치가 공소 출장 때 그 차를 타고 가서 심부름을 하였다. 학교 다닌 시간을 빼고는 성당에서 살았다고 할 정도였다. 그러니 자연히 4H 클럽에 가입하게 됐다.

   
▲ 4H클럽 회원들이 트럭을 타고 이동하던 장면이다.
한림 4H클럽은 1957년에 만들어졌다. 농사짓는 방법을 옛 성당 터에서 가르쳤다. 강원도에 가서 감자 씨가 오기도 했다. 어느 날 요크셔 돼지가 들어오고 클럽 회원들이 키웠다. “그 요크셔가 민들레 홀씨 처럼 한림에 흩뿌려졌고, 제주의 양돈산업이 일어선 계기였다”며 남씨는 벅찬 마음을 전했다.

한림 4H는 공부도 많이 시켰다. 하지만 맥그린치는 ‘오락부장’이기도 했다. 어느 날은 맥그린치가 아일랜드에 다녀 오더니 배드민턴을 가져 와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 듣도 보도 못한 게임이었다. 우리는 배드민턴을 ‘닭털 놀이’라고 불렀다. 맥그린치는 심지어 우리에게 카드도 가르쳐 주었다. 카드가 무엇인지 몰랐던 시절에 머리 좋게 한다고 하니까 열심히 배웠던 기억도 난다. 우리 4H는 전도뿐만 아니라 전국에서도 매우 우수한 단체로 소문이 나 있었다. 1958년에 제4차 4H경진대회가 한림중학교에서 열렸다.

우리 4H 회원인 진영만 회원이 최고 지도자 상을 받았다. 그 당시에 우리나라 4H 운동 확산에 공이 큰 앤더슨 예비역 대령이 경진대회에 참석한 기억이 난다. 1959년에 개최된 제5회 경진대회는 맥그린치 신부가 지도자 상을 수상했다. 우리 4H는 이후에 계속 우수 단체가 되어서 1960년에는 5명이 우수회원으로 뽑혀 전국 경진대회에도 참석하였다. 나는 웅변을 잘해서 그 부문을 참석했던 기억이 난다. 그 대회는 윤보선 대통령도 참석할 정도로 국가 중요 행사 중 하나였다. 1961년에는 장면 총리가 제주도에 초도순시 왔다가 다른 곳도 아닌 한림성당을 들렀다. 한림 4H 활동에 보인 관심이었다. 새마을 운동의 아이디어는 4H 운동에서 나왔고, 사실 금악개척단도 4H 운동에서 영향을 받은 사업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덴마크 농촌을 부흥시킨 댈러스와 같은 이가 맥그린치 신부다. 농촌을 어떻게 하면 잘 살게 할 수 있을까에 전념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공시켰다. 맥그린치는 한림에 미국 원조에 의해서 건설된 옥수수 사료공장 옆에 큰 솥 단지를 걸어 놓고 언제나 죽을 쓰게 하였다. 혹시 배고픈 사람들이 있을까 걱정하였기 때문이다. 그 죽은 많은 이들의 허기를 채워줬다.

   
▲ 맥그린치 신부가 청년시절 4H클럽 청년들과 한ㅁ께 했다.
4H클럽 활동 덕에 농업기술사 자격으로 농업진흥원에서 공무원을 시작하였다. 그러다 도청에서 외국어 특채 요원으로 합격, 정식 공무원이 됐다. 맥그린치 신부 밑에서 배운 영어 덕분이다. 신부의 고국이 너무도 궁금해 벼르고 벼르다가 1985년 아일랜드 땅을 처음 밟았다. 신부의 생가도 그대로 있었다. 맥그린치는 사람을 키웠다. 고기를 주는 것이 아니라 고기 낚는 법을 가르쳐줬다.

맥그린치, "여러분을 잊을 수 없다. 남은 소원은 호스피스 병동"

맥그린치 신부의 회고다

회고의 장이 마련된 날 불편한 몸이지만 맥그린치 신부도 자리했다.

그의 회고다.

1953년 한국에 와서 1954년 제주도 한림에 부임하였다. 그 당시 제주도는 4.3사건에다가 6.25를 겪은 직후라서 정말 가난했다.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가난했다. 굶주리는 사람들이 숱하게 많았다. 그렇다고 월급 70달러 밖에 받지 못하는 내가 도와 줄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가난안 이들이 나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었다. 달걀을 가져오고, 고구마, 채소, 심지어 닭을 가져 오시는 분도 있었다. 신자가 아닌 일반 주민들도 마찬가지였다. 나에게는 큰 쇼크였다. 부자인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푸는 문화에서 살다가 온 나로서는 그렇게 가난한데도 이웃과 나누어 먹는 주민들을 보면서 참 많이 느끼고 배웠다.

또 하나의 충격이 있다. 부모들이 자식을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희생을 한다는 것이다. 특히 어머니들이 그랬다. 자식을 위해서 겨울 바다에 물질을 하는 것에서부터 일거리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하였다. 자식의 교육을 위해서는 하나 밖에 남지 않는 밭도 파는 희생정신을 제주도 이외에서는 본적이 없다. 특히 다른 나라에서는 더욱 그렇다.

   
▲ 한림성당 신축 초기 장면
한림교회를 신축할 때도 동네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봉사를 해 주었다. 신자, 비신자 가릴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이 나와서 협재와 곽지에 가서 모래와 자갈을 가져오고, 옹포에서 돌을 실어 왔다. 주민들이 그러니 모슬포 미 공군 부대에서도 트럭 2대를 지원해 주었다. 처음에는 지원해 주지 못하겠다던 휘발유까지도 지원해 주었다.

한림신협을 만들 때도 김정민 여사가 정말 수고하였다. 김정민 여사는 신협교육을 여러 곳에서 받으면서 전국에서 최고로 가는 한림신협을 키웠다. 당시에도 한림읍민들의 도움이 매우 컸다. 40년동안 운영했던 한림수직도 로사리 수녀님을 비롯한 한림 주민과 제주도민의 도움으로 많은 일자리를 만들 수 있었고, 최고의 제품을 만들 수 있었다. 한림 이시돌 병원도 마찬가지다. 그 당시에 제주도에는 제주시에 병원이 딱 하나 밖에 없었다. 아파도 멀고, 그리고 돈이 없어서 병원에 갈 수가 없었다. 한림은 농촌이기에 주민들이 병원에 접근하기가 더욱 어려웠다. 많은 분들이 협조해 주어서 한림 이시돌 병원이 건립되었다.

돌이켜 보면, 지금까지 이루어진 모든 일들은 지역주민, 공무원, 군인, 골롬반 수녀 등 너무나 많은 여러 분들이 협력하여 이루어 낸 것이다. 지금은 제가 나이가 들어 여러분에게 걸림돌이 되어 있을 뿐이다. 여러분을 정말 잊지 않겠다. 잊을 수도 없다. 감사하다.

그의 나지막한 인사에 청중들은 숙연했다.

그를 모신 회고경진대회의 마무리에 이를 무렵 사회자가 한림성당 옛 종탑을 어떻게 만들었냐고 물었다. 사회자인 양기훈씨는 공공미술가로서 도내에 다리, 동상 등 많은 작품을 만들어 보았기 때문에 종탑의 난이도를 잘 알고 있었다. 당시에 기둥 없이 돌로 저렇게 높은 종탑을 만들 수 있는 기술자는 흔치 않았다는 것이다.

맥그린치의 대답이다. 내가 조그마한 종이에 연필로 대강 설계를 하고, 목수 등과 셋이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봉사 덕이라는 것이다.

   
▲ 지난달 9일 열린 맥그린치 신부 회고방담 자리에 자리한 맥그린치
곁들여 한림성당 신축자금을 만든 과정이다. 맥그린치는 가장 싫어하는 일 중에 하나가 서울 가는 것이었다고 했다. 당시 서울을 가려면, 제주시로 가서 10시간 동안 목선을 타고 목포 가서 내리고, 그리고 기다리다가 다시 열차를 10시간 이상 타야 서울에 도착하였다. 무려 24시간 이상 배와 기차를 타고 가야하니 너무나 싫었다. 그러나 하는 수 없이 가야하는 일이 있다. 1년에 한번 전국의 신부들이 모여서 일주일 동안 기도하는 피정 때는 꼭 가야만 한다. 어떻게 할까 망설이다가 무작정 모슬포 미 공군 비행장에 갔다.

미 공군 부대는 미사를 하러 자주 가기 때문에 친분이 있었다. 그래서 혹시 서울 가는 비행기가 있으면 얻어 타려는 마음에서 갔다. 가서 보니 비행기 하나가 움직이고 있었다. 당시 맥그린치는 고물 지프차를 몰고 다녔다. 얼른 비행기 옆으로 갔다. 조종사가 내려 보더니 왜 왔냐고 물어 보았다. 혹시 서울 가는 거라면 태워달라고 부탁했다. 한자리 있으니 타라고 했다. 지프차를 비행장에 무조건 정차해 놓고 올라탔다. 타서 보니 그 비행기는 사람을 수송하는 비행기가 아니라 전투에 폭탄을 떨어뜨리는 폭격기였다. 맥그린치가 앉은 자리가 부조종사 의자인 것이다. 얼떨떨했다. 당시에 모슬포 비행장은 아스팔트가 아닌 잔디로 된 비행장이었다. 그래서 이룩하는데 터덜터덜했다.

이륙 뒤 한 시간쯤 가니 착륙했다. 당연히 서울인 줄 알았다. 그런데 조종사가 군산 미군비행장이라고 했다. 난감했다. 다시 어떻게 서울로 가야하는지 걱정을 하고 있는데 그 조종사(소령)가 걱정 말고 여기에 내려서 있으면 자기가 일을 본 2시간 후에 서울로 태워주겠다고 했다. 대합실에서 기다리다가 여기에도 군종신부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 분을 찾았다. 다행히 군종 신부인 미 공군 소령이 있었다. 인사를 했다.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니 제주도에서 왔다고 했다. 제주도가 어디냐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을 했다. 제주도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제주도 위치에 대해 설명하였다. 그 군종 소령은 자신이 한국에 부임한지 4일밖에 되지 않아서 제주도를 몰랐다고 했다. 제주에서 무얼 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놀고 있다고 했다. 성당도 없고, 신자도 25명밖에 없으니 놀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런데 이 군종신부가 가만히 듣고 있더니 내가 성당을 신축하는데 도와주겠다고 했다. 깜짝 놀랐다. 자기가 오자 마자 군 부대 성당에서 지원해 주는 군산 시내 고아원 13곳을 방문하였는데 이 중에 10곳은 가짜였다고 한다. 그저 원생을 가짜로 해 놓고 지원금만 받아 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10곳을 취소하고 이를 다른 곳에 지원해 줄 방안을 찾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정말 하느님이 보내 주신 기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는 매주 200달러에서 300달러의 지원을 받았다. 그 군종신부는 꼬박 꼬박 지원금을 한림 우체국으로 보내 주었다. 그 돈으로 한림 성당이 건립된 것이다.

그는 마지막 부탁의 말을 잊지 않았다. 한림에 와서 꼭 필요한 것 한 10개 정도를 정하여 꼭 성공하겠다고 계획을 세웠다. 실제로 그 계획은 거의 성공한 것 같다. 그러나 마지막 남은 것이 있다. 호스피스 운영이다. 한림 이시돌 의원에는 요양원과 호스피스 병동이 있다. 요양원은 이제 의료보험에서 지원이 되어서 걱정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그러나 호스피스 병동 운영이 문제다. 호스피스 병동은 아직은 한국정부가 이해가 부족하여 지원을 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

나의 마지막 작품이다. 호스피스는 병원치료를 포기하고 집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고통 없이 정말 편안하게 돌아가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만든 병동이다. 특히 환자를 집에 두면 일도 나가지 못하는 가난한 가정을 위해서, 그리고 병원이 없는 농촌 지역을 위해서 정말 필요한 병동이다. 우리나라의 큰 병원은 치료를 목적으로 운영되지 이렇게 환자중심으로 운영되지 않는다. 우리 호스피스에 찾아 와서 4년 이상 살고 있는 분도 있다. 모두가 좋아 한다.

그런데 환자에게 무료이기 때문에 항상 적자다. 현재 홍보가 잘 되어 있지 않아서 후원자가 적다. 특히 환자 대부분이 도민들인데 후원자들은 도내 보다 도외가 훨씬 많다. 나를 위한 기념 사업회는 결코 나를 위해서 돈을 쓰지 말라. 대신에 호스피스병동을 위해서 후원자를 많이 만들어 달라. 이것이 곧 나를 위한 기념사업이다. 현재 2,800명의 후원자가 있는데 기념 사업회에서 5,000명으로 늘려 주기를 간곡하게 부탁한다.

장내에 “예,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란 합창이 울려퍼졌다. <22편으로 이어집니다>
 

   
 

맥그린치 신부는? = 1928년 남아일랜드의 레터켄에서 태어났다.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사제로 1954년 제주로 부임한 후 지금까지 60년간 제주근대화·경제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성당을 세운 뒤 수직물회사를 만들고, 4H클럽을 만들어 청년들을 교육했다. 신용협동조합을 창립, 경제적 자립의 토대를 만들었고, 양과 돼지 사육으로 시작된 성이시돌 목장은 제주축산업의 기초가 됐다. 농업기술연수원을 설립하고 우유·치즈·배합사료공장을 처음 제주에 만든 것도 그다. 그는 그 수익금으로 양로원·요양원·병원·호스피스복지원과 어린이집·유치원을 세워 가난한 이들을 도왔다. 그 공로로 5·16민족상, 막사이사이상, 대한민국 석탑산업 훈장 등을 받았고 1973년 명예 제주도민이 돼 ‘임피제’라는 한국명을 쓰기 시작했다.

 

   
 
양영철 교수는?

=제주대 행정학과를 나와 서울대와 건국대에서 행정학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위 논문은 “내생적 지역개발에 관한 연구 .” 맥그린치 신부의 제주근대화 모델을 이론적으로 살핀 저술이다. 현재 한국지방자치학회 회장, 대통령 소속 지방자치발전위원회 위원 및 제2소위 위원장을 맡고 있다. 조선말 ‘의녀’로 불리는 김만덕 기념사업회 기획총괄위원장이면서 ‘나비박사’로 알려진 석주명 기념사업회 공동대표이기도 하다. 제주특별자치도 출범, 자치경찰 탄생의 이론적 산파 역을 한 게 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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