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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롤드 대주교가 본 맥그린치 신부(4)[연속 특별기획] 격동의 현장-남기고 싶은 이야기(제2화)
양영철 교수가 전하는 '제주근대화의 선구자' 맥그린치 신부 (19)
양영철  |  yongchul@jeju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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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7.16  13:3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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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시돌 목장에 방목주인 소떼
맥그린치 신부는 제주의 들녘에 있는 검은 돌담을 보면서 농부들이 얼마나 어럽게 일을 하고 있는지를 느꼈다. 그는 농부들이 조랑말로 경작하는 것을 보면서 우습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슬프기도 하였다. 씨가 뿌려지는 동안 아내와 아이들은 노래를 부르며 땅이 굳어질 때까지 조랑말 주위를 졸졸 따라 다녔다. 그 장면을 보면서 든 생각이었다.

맥그린치는 “황소가 끄는 쟁기로 흙을 파는 것을 본다면 아마도 당신은 웃음을 참지 못할 것이다”고 말했다. 마지못해 느릿느릿 움직이는 소 뒤에서 힘겹게 쟁기를 미는 농부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는 걸 보며, 말 그대로 가족부양을 위해 애쓰는 걸 보다보면 그저 동정보다 “생활이 왜 이리 고단해야 할까” 화가 치밀지도 모른다. 맥그린치는 “고생덩이 농사가 아닌 좀 더 쉬운 농법은 없을까”를 고민했다.

그 방법을 제시한 기관이 세계적인 해외 원조기관인 옥스팜(Oxfarm)이었다. 그들은 맥그린치에게 트랙터와 쟁기원판 등을 살 자금을 지원해 주었다. 하지만 첫 번째 원조로 받은 트랙터가 도착하자마자 조작에 서툰 운전사 탓으로 한 소년이 다쳤다. 한 걸음에 병원으로 달려갔지만 시설과 환경은 형편이 없었다. 보다 못한 맥그린치는 이제 한림에 병원을 세우리라 마음 먹었다.

   
▲ 이시돌 목장으로 옮겨지던 트랙터
   
▲ 이시돌 목장 내 주차장에 비치된 트랙터 행렬
이제 이시돌 목장은 24개의 트랙터를 보유하게 되었고 첫 병원도 세웠다. 3개 진료과를 갖춘 한림이시돌 의원이 문을 열었고 운영은 골롬반 수녀회가 맡았다. 두며으이 의사와 두명의 간호사 등 직원 19명의 개원초기 인력이었다. 환자는 매달 1천명이나 됐다.

맥그린치는 그 특유의 드라마틱한 방법으로 소를 들여왔다. 450마리 소가 필요했는데, 구입자금을 독일 가톨릭 주교회의 산하에 있는 해외 원조단체인 미제레오르(Misereor)에 요청했다. 이 기관은 필요한 돈의 75%를 약속했다. 하지만 호주에서 한국까지 5천마일이나 떨어진 곳으로 수송해야 하는데 수송선사는 한 척당 적어도 1000마리는 돼야 수지가 맞는다고 답했다. 나머지 550마리를 어떻게 채울 것인가가 최대 고민이었다. 다행히 대한항공이 제동목장에 300마리를 구입하겠다고 하였지만 여전히 250마리가 부족했다.

그는 호주로 날아갔다. 통 사정을 해봤지만 허사였다. 결국 신용장(외상)으로 250마리를 더 사기로 했다. 헨리 대주교는 호주에 있는 골롬반 신부들에게 그 외상값을 보증해주도록 부탁했고, 결국 일은 풀렸다.

이번에는 어떻게 섬 안으로 그 많은 소를 들여오느냐가 문제였다. 화물선이 워낙 커 얕은 수심의 해변까지 배를 대기엔 무리였다. 처음 계획은 여름에 도착하여 소들이 배에서 해안가로 수영해 올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협상이 시간을 끌다보니 소들이 수영하기에 위험한 12월에 도착한 것이었다. 맥그린치는 미군의 도움으로 바지선과 예인선을 도움 받았다. 바지선과 예인선의 도움으로 호주의 순종을 실은 큰 화물선은 수평선에 그림자가 지듯 함대행렬로 한림 앞 바다에 나타났다. 이 광경은 제주도민들에게 큰 화젯거리였다. “소가 온다”는 주민들의 소리가 언덕을 가로 질러 메아리쳤다.

이시돌 협회에 근무하고 있는 켈리(jeremiah Kelly) 신부는 이 광경을 목격한 후 “맥그린치는 군중 가운데서 가장 조용히 있었다. 그는 뭔가를 잃어버린 듯이 두리번 거렸다. 1000 마리의 소떼가 해안에 도착했는데 다시 이 소들을 언덕 넘어 12마일(약 20㎞) 떨어진 이시돌 목장으로 몰고 가야하는 어려운 일이 또 남아 있었다. 이를 위하여 우선은 부두에 임시 가축수용장을 만들어야 했다. 가축 우리가 지어져야 했고, 건초와 곡식을 주어야 했고, 임시 발전소가 가동되어야 했다”고 술회했다.

맥그린치는 발버둥치는 소를 수송선에서 바지선에 싣는 것을 보면서 “신은 우리를 축복해 주셨다. 저 물결 없이 잔잔한 바다를 보라. 겨울엔 좀 처럼 볼 수 없는 바다다”라고 했다. 맥그린치 신부와 헨리 대주교는 끝없는 에너지, 신출귀몰한 아이디어와 일이 천천히 이루어져도 기다리는 참을성을 가지고 있었다. 헨리 대주교는 이렇게 말했다. “맥그린치 신부는 하루에 22가지를 생각해 내는 아이디어 맨이다. 나는 한달에 두 번 그와 이시돌농촌개발협회의 일을 처리한다. 그에게 만일 다음 달에 소를 사기로 약속한 1만 달러가 있는데, 그가 이것을 이달에 다 쓰려고 할 때 나는 그것을 간섭 없이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한다. 그는 그것을 좋아한다. 나는 군대에서 누구에게 임무를 부여하면 그것을 어떻게 수행하느냐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말라고 배웠다.”

   
▲ 이시돌 목장 개간에 나섰던 당시 4H 클럽 청소년들이다.
헨리 대주교는 경제뿐만 아니라 사회적 환경도 개선하여야 제주도가 균형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기도와 노동을 통해 하나님과의 일치를 추구하는 수녀회인 관상수녀원을 이시돌 목장에 설립하였다. 1974년 2월 8일 헨리 대주교는 허허 벌판에 홀로 서 있는 수도원의 돌담길을 걸어갔다. 그는 수도원 완성에 찬사를 보내며, 수녀들이 활동적인 신부들과 대치되지 않도록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나는 글라라회 수녀님들이 한국에 전교를 목적으로 오길 바라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매일 희생과 기도를 아끼지 않아야 된다는 것이 전교보다 더 중요하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신을 이야기해야 한다. 진실이 사회에서 실천되어야 하고, 이로 인하여 사회가 변화되며, 신이 원하는 길로 가야한다.”

그 수녀들은 영혼과 신체를 함께 성화시키기 위해 조그만 농장을 경영했고, < 수녀들을 일하게 하라>는 글라라 수녀회의 규칙을 지켰다. 사람이 게으르면 영혼의 적이 살아나서 거룩한 기도도 못하게 된다. 현실 생활도 열심이지만, 그들은 기도와 희생, 명상도 했다. 매 순간의 기도는 이제 열매를 맺고 있다. 이시돌 협회의 켈리 신부는 “대주교의 지혜는 명백히 드러났다. 미사의 참석률이 증가하고, 수녀들에 의해 직접 교육을 받지 않더라도 교리 시간을 좋아함으로써 효과가 일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의 서남단 제주도에서 모든 사람들이 일에 매진하고 있다. 헨리 대주교가 한국을 <자립 가톨릭 국가>라고 말한 이유다. <번역=양영철/ 20편으로 이어집니다>

   
▲ 하롤드 헨리 대주교
☞하롤드 헨리(Henry, W. Harold; 1909∼1976) 대주교

= 성 골룸바노 외방전교회 선교사, 대주교. 제5대 광주(光州) 대교구장, 초대 제주(濟州)교구장. 한국명은 현해(玄海). 미국 미네소타주 노드필드(North Field)에서 출생. 미국에서 골룸바노 신학교와 밀턴대학을 졸업한 뒤 1932년 사제서품을 받고 중국의 선교사로 임명되어 중국으로 가던 도중 포교지가 한국으로 바뀌어 1933년 10월 한국에 입국하였다. 입국 후 6개월 동안 한국어와 한국풍속을 익히고 1934년 전남 노안본당 보좌신부, 1935년 전남 나주본당 주임신부를 역임했고,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일제(日帝)당국에 체포되어 8개월간 옥고를 치르고 강제 추방된 뒤 1943년 미(美) 육군에 입대, 유럽에서 군종신부로 사목하였다. 1945년 군에서 제대하고 1947년 한국에 재입국, 광주교구 경리부장을 거쳐 1950년 6.25동란으로 광주교구장 브레난(Brennan) 몬시뇰이 북한공산군에게 납치되자 광주교구장서리 겸 성 골룸바노 외방전교회 광주지부장으로 임명되었고 이어 1954년 교구장에 임명되었으며 1957년 5월 11일 주교로 성성(成聖)되었다. 그 뒤 1962년 3월 한국 교회의 교계제도가 확립되어 서울 · 광주 · 대구 등 3교구가 대교구로 승격됨과 동시에 대주교로 승품되었고 1971년 제주교구의 창설과 함께 초대 제주 교구장으로 전임되어 사망할 때까지 제주교구의 교세 신장에 힘쓰는 한편 광주교구장 시절부터 힘써 온 교육 · 의료 · 사회개발 분야에 걸친 사회사업운동을 전개하였다. 1976년 3월 1일 심장마비로 사망, 유해는 제주도의 첫 순교자들이 묻힌 황사평(黃沙坪)에 안장되었다.
 

   
 

맥그린치 신부는? = 1928년 남아일랜드의 레터켄에서 태어났다.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사제로 1954년 제주로 부임한 후 지금까지 60년간 제주근대화·경제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성당을 세운 뒤 수직물회사를 만들고, 4H클럽을 만들어 청년들을 교육했다. 신용협동조합을 창립, 경제적 자립의 토대를 만들었고, 양과 돼지 사육으로 시작된 성이시돌 목장은 제주축산업의 기초가 됐다. 농업기술연수원을 설립하고 우유·치즈·배합사료공장을 처음 제주에 만든 것도 그다. 그는 그 수익금으로 양로원·요양원·병원·호스피스복지원과 어린이집·유치원을 세워 가난한 이들을 도왔다. 그 공로로 5·16민족상, 막사이사이상, 대한민국 석탑산업 훈장 등을 받았고 1973년 명예 제주도민이 돼 ‘임피제’라는 한국명을 쓰기 시작했다.

 

   
 
양영철 교수는?

=제주대 행정학과를 나와 서울대와 건국대에서 행정학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위 논문은 “내생적 지역개발에 관한 연구 .” 맥그린치 신부의 제주근대화 모델을 이론적으로 살핀 저술이다. 현재 한국지방자치학회 회장, 대통령 소속 지방자치발전위원회 위원 및 제2소위 위원장을 맡고 있다. 조선말 ‘의녀’로 불리는 김만덕 기념사업회 기획총괄위원장이면서 ‘나비박사’로 알려진 석주명 기념사업회 공동대표이기도 하다. 제주특별자치도 출범, 자치경찰 탄생의 이론적 산파 역을 한 게 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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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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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이누리짱 2014-07-17 17:46:12

    전세계에서 하나뿐인 제이누리가 엄청난 연재물을 기획하여 파워풀하게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레 감명받아 연구눌들도 나오고 있습니다. 모든게 양사주님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양사주님 짱 짱 짱신고 |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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