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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롤드 대주교가 본 맥그린치 신부(3)[연속 특별기획] 격동의 현장-남기고 싶은 이야기(제2화)
양영철 교수가 전하는 '제주근대화의 선구자' 맥그린치 신부 (18)
양영철  |  yongchul@jeju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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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7.06  16:4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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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민들에게 돼지 사육법을 가르쳐 준 맥그린치는 이제 닭 사육법을 알려줘야 했다. 병에 걸린 닭을 격리하지 않아 손실을 보던 주민들이었다. 맥그린치는 그 방법을 몸소 보여주고자 했다.

“우리는 12피트 넓이와 42피이트 길이로 돌로 집을 만들어서 이를 세 부분으로 나눈다. 방향은 하루 종일 햇볕이 들게 하기 위해 남향으로 했고 앞에는 큰 유리창을 달았다. 우리는 암탉 20마리와 나무로 된 부화기를 가지고 시작했다. 첫해에는 그렇게 썩 잘되지 않았다. 뉴케슬(Newcastle)병이 돌아 우리는 200마리의 병아리를 잃었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 해에 800마리의 병아리를 생산할 수 있었다. 그 다음 해에는 2,000마리를 생산해 내었다. 우리는 더 많은 부하기를 설치하여 더 많은 병아리들을 계속 생산해 나갔다. 그리고 품종의 좋은 병아리를 얻기 위하여 순종 뉴햄프셔와 순종 레그혼 200마리를 길렀다. 여기에서도 돼지 분양과 마찬가지로 병아리 하나를 무상분양받은 회원들은 그 병아리가 커서 달걀을 낳으면 각 병아리당 2개를 가져오도록 하였고, 이것으로 역시 더 많은 병아리를 생산하고, 다시 분양을 거듭했다.”

   
▲ 한림으로 면양을 들여오던 장면이다
닭을 사육하면서 주민들의 의구심은 왜 땅에 석회를 뿌려야 하는 것이었다. 맥그린치가 거듭 방법을 일러줘도 “석회도 없거니와 왜 그래야 하느냐”는 것이다.

“나는 해안에 조개가 가득 차 있고, 그 조개를 가루로 부수면 석회가 된다고 말해주었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믿을 수 없다고 하면서 나를 비웃었다. 그러자 나는 4-H 클럽의 청소년들에게 해안에서 조개를 주어 가루로 만들어서 뿌리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석회를 뿌린 땅에서 가장 많은 수확을 얻는 회원들에게 순종 돼지 한 마리를 상품으로 주고, 그 다음으로 많은 수확을 한 사람에게는 잡종돼지 한 마리를 시상했다. 1등상을 탄 사람은 석회를 뿌리지 않은 땅보다 두 배의 수확을 얻었다.”

1960년 당시 맥그린치는 미국과 아일랜드에서 그를 재정적으로 도와주고 있는 친구들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보낸다.

“4-H 클럽 회원들에게 나누어주기 위해 1만 그루의 감자나 캐비지 같은 모종을 생산해 낼 온상을 설치했다. 여기서도 우리는 그냥 무상으로 주는 식의 방법을 피했다. 이 모종들을 얻고자 하는 젊은이들은 씨앗과 모종을 돌보는 의무를 주었다. 그리고 수확물이 나왔을 때는 다른 회원들에게 재분양하기 위해 돼지와 닭에서 처럼 그들이 처음 받아갔던 양의 2배를 내도록 하였다. 우린 그걸 팔 때 더 나은 값을 받을 수 있도록 개인이 아닌 단체가 팔도록 도왔다.”

   
▲ 1960년대 베틀을 이용해 모직물을 만드는 장면
아일랜드 도네갈 주 출신의 맥그린치가 주민 자립방안을 고심하다 ‘모직’을 떠올린 건 어쩌면 당연했다. 처음 주민들은 일본산 양을 기르는데 거듭 실패하고, 장래성이 없는 목초를 들여와서 재배했기에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밀고 나갔다. 그는 1968년 일본에서 약간의 양을 들여와 손수 먹여 키우려는 농부들에게 분양하였다. 아가다란 세례명의 젊은 여신도를 그 무렵 제주시에 있는 방직공장에 보냈다. 기술습득을 위해서였다.

되돌아온 아가다는 다시 15명의 아주머니와 처녀들에게 기술을 가르쳤다. 그들은 자전거 바퀴로 만든 방직기계와 수직세트를 갖고 일을 시작했다. 모직은 처음에 다른 곳에서 재료를 가져왔고, 짠 털실은 아일랜드 서부 해안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는 아란(Aran) 섬에서 만든 스웨터처럼 옷을 만들었다. 맥그린치가 주민들의 확실한 소득증대책으로 찾은 품목이다.

그런 맥그린치를 살피던 헨리 대주교는 도울 방법을 찾다 독일주교회에 원조를 요청했다. 원조 요청을 받은 독일주교회 해외원조단체의 자금 책임자는 현지조사를 위해 홍콩 출신의 독일인 사제를 보냈다. 그가 한림에서 보고 들은 뒤 보낸 보고서는 훌륭했다. 맥그린치와 주민들의 노력을 높게 평가한 것이다. 주교회의는 곧바로 지원을 결정하고 자금을 보내 수직사업 성공의 자양분을 제공했다. 맥그린치는 다시 두 명의 여성신도를 서울의 방직학교로 보냈다. 두 처녀가 서울에서 기술을 배울 수 있도록 하는 일은 서울에 있는 세계선교후원회 안나(Anne Dauidsou)의 도움이 컸다. 안토니 포드(Anthony Ford)는 첫 방직베틀을 만드는데 공이 컸다. 포드는 직접 제주에 와서 베틀을 만들었고, 그가 설계한 모델을 토대로 목수들이 다시 3~4개를 만들도록 했다.

   
▲ 1960년대 베틀을 이용해 모직물을 만드는 장면
서울로 기술습득을 위해 떠났던 두 신도가 돌아왔다. 그들은 다시 강양(골롬바)와 김양(필로메나)를 가르쳤다. 그 네 명의 처녀들은 트위드(tweed, 순모로 만든 스코틀랜드의 모직물 일종)를 짰다. 처음 네 개의 베틀은 그 지역의 목수에 의해 15개의 대형 베틀로 교체되었다. 큰 베틀과 장비들을 보관하고 운영하기 위해 5개의 새로운 조립식 집과 물·전기가 필요했다. 우물이 생기고, 물탑이 세워지고, 보일러가 설치되었다. 임피제 신부의 제안으로 전기는 풍차(Graim Mill)를 돌려 발전, 얻었다.

게다가 방직사업은 아일랜드에서 지원차 온 골롬반 수여들에 의해 탄력을 붙였다. 한림수직이 하는 모직사업이 발달한 가장 중요한 계기다. 1962년 아일랜드로부터 골롬반 수녀들이 제주로 왔다. 그들은 한림수직 공장을 운영하면서 그곳에서 일하는 많은 여성들에게 기술을 가르치고 돌봤다. 처음에 온 세명의 수녀들은 메리 에디나 켄리(Mary Ethna Kenry)와 메리 리콜리 타프(Mary Ligouri Taffe), 그리고 로사리아(Rosarii Mctigue)였다. 그 다음에 데크리안과 이멜다가 왔다. 수녀들은 아일랜드에 있는 방직공장과 수예학교에서 아일랜드 트위드에서 볼 수 있는 밝은 색의 배합과 섬세한 패턴들을 짜는 방법을 배우고 왔다.

여기에 남성신도 사무엘이 화가로서 수녀들의 예술비법을 배우기 시작했고, 전교사였던 임양도 디자이너로 고용되었다. 직물공장의 성공과 확장은 제주도에서 양을 기르는데 큰 힘이 되어 주었다.

1966년 뉴질랜드의 해외원조 단체인 코르소로부터 받은 400마리의 암양과 14마리 숫양 덕분에 1975년 무렵에 양이 1300마리나 됐다. 1년 후에 코르소는 목초를 개발하고 영국적인 방목을 할 수 있도록 자문을 하고자 양 사육 전문가인 제프(Geoff)를 보냈다.

제프는 제주에 맞는 시스템을 설치했다. 농부들은 양털을 깎는 방법을 몰라 헤매고 있었다. 맥그린치는 일본에서 손으로 깎는 기계를 12세트 들여왔다. 이번엔 농장에서 일해 본 경험이 있어서 양털 깎는데 능숙한 피터 티어니(Peter Tierney) 신부를 뭍에서 모셔왔다. 그는 농부들에게 양털 깎는 방법을 가르쳤다.

   
▲ 한림수직을 돕기 위해 아일랜드 골롬반 수녀회 소속 수녀들이 한림을 찾아왔다.
제품이 세상에 나오고 서서히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주한 미대사관 브라운씨 부부가 그들의 미국 친구들에게 주기 위해 한림의 트위드를 사고 갔고, 미스 코리아도 미의 사절단으로 미국에 가면서 트위드를 그녀의 의상으로 준비함으로서 한림의 트위드를 유행시켰다.

물건 팔리는 속도가 붙자 80명의 처녀들이 담요, 술이 달린 양탄자, 격자무늬의 치마를 만들기 위해 공장에 고용됐다. 300명의 부녀자와 처녀들은 스웨터, 조끼, 코트, 드레스, 스카프, 모자, 벙어리 장갑, 모포 등을 집에서 짰다. 여성들은 필요하면 공장에 채용되었다. 대부분 가난한 가족을 부양하며 농장일, 씨뿌리기, 조개잡이 이외에는 다른 일이 없었던 사람들이었다.

1963년에 이르러 수직사업이 번창일로를 걷자 ‘이시돌 농촌개발협회’의 운영 총책임자인 맥그린치에게 여러 제안이 들어왔다. 이시돌 협회는 농부들의 후원자인 스페인의 이시돌 성인을 따서 붙인 것이다. 헨리 대주교는 이시돌농촌개발협회 이사장이었고, 맥그린치는 전무였다. 그리고 세 명의 한국인이 이사로 구성되었다.

‘이시돌 농촌개발협회’는 428명의 농부가 참여하는 4500 에이커의 땅(550만8917평)과 2천 에이커의 매립지(244만8407평)가 있는 목장으로 급성장하였다. 농민과 주민들이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신용조합이 설치되어 연평균 농장 수입이 300불에서 2천불로 급성장했다. 4-H클럽 대신 농업연수원을 만들어서 137명의 학생들이 해마다 최신 농사기술을 배운다. 그들을 가르치고, 이시돌 전체 프로그램에 전문성을 자져오기 위해 전문가인 자원봉사자가 봉사를 위해 2년 동안 이시돌에 거주하였다. 그들은 수의사, 간호사, 농기계공, 농군, 돼지·양 사육전문가 등이다. 그런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으로 제주도는 농사와 가축 사육법 면에서 지난 1천년보다 1960년대 10년간 비약적 진보를 이뤘다. 이제 맥그린치의 눈은 다른 목축사업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번역·정리=양영철/ 19편으로 이어집니다>

   
 
☞하롤드 헨리(Henry, W. Harold; 1909∼1976) 대주교

= 성 골룸바노 외방전교회 선교사, 대주교. 제5대 광주(光州) 대교구장, 초대 제주(濟州)교구장. 한국명은 현해(玄海). 미국 미네소타주 노드필드(North Field)에서 출생. 미국에서 골룸바노 신학교와 밀턴대학을 졸업한 뒤 1932년 사제서품을 받고 중국의 선교사로 임명되어 중국으로 가던 도중 포교지가 한국으로 바뀌어 1933년 10월 한국에 입국하였다. 입국 후 6개월 동안 한국어와 한국풍속을 익히고 1934년 전남 노안본당 보좌신부, 1935년 전남 나주본당 주임신부를 역임했고,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일제(日帝)당국에 체포되어 8개월간 옥고를 치르고 강제 추방된 뒤 1943년 미(美) 육군에 입대, 유럽에서 군종신부로 사목하였다. 1945년 군에서 제대하고 1947년 한국에 재입국, 광주교구 경리부장을 거쳐 1950년 6.25동란으로 광주교구장 브레난(Brennan) 몬시뇰이 북한공산군에게 납치되자 광주교구장서리 겸 성 골룸바노 외방전교회 광주지부장으로 임명되었고 이어 1954년 교구장에 임명되었으며 1957년 5월 11일 주교로 성성(成聖)되었다. 그 뒤 1962년 3월 한국 교회의 교계제도가 확립되어 서울 · 광주 · 대구 등 3교구가 대교구로 승격됨과 동시에 대주교로 승품되었고 1971년 제주교구의 창설과 함께 초대 제주 교구장으로 전임되어 사망할 때까지 제주교구의 교세 신장에 힘쓰는 한편 광주교구장 시절부터 힘써 온 교육 · 의료 · 사회개발 분야에 걸친 사회사업운동을 전개하였다. 1976년 3월 1일 심장마비로 사망, 유해는 제주도의 첫 순교자들이 묻힌 황사평(黃沙坪)에 안장되었다.

   
 

맥그린치 신부는? = 1928년 남아일랜드의 레터켄에서 태어났다.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사제로 1954년 제주로 부임한 후 지금까지 60년간 제주근대화·경제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성당을 세운 뒤 수직물회사를 만들고, 4H클럽을 만들어 청년들을 교육했다. 신용협동조합을 창립, 경제적 자립의 토대를 만들었고, 양과 돼지 사육으로 시작된 성이시돌 목장은 제주축산업의 기초가 됐다. 농업기술연수원을 설립하고 우유·치즈·배합사료공장을 처음 제주에 만든 것도 그다. 그는 그 수익금으로 양로원·요양원·병원·호스피스복지원과 어린이집·유치원을 세워 가난한 이들을 도왔다. 그 공로로 5·16민족상, 막사이사이상, 대한민국 석탑산업 훈장 등을 받았고 1973년 명예 제주도민이 돼 ‘임피제’라는 한국명을 쓰기 시작했다.

 

   
 
양영철 교수는?

=제주대 행정학과를 나와 서울대와 건국대에서 행정학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위 논문은 “내생적 지역개발에 관한 연구 .” 맥그린치 신부의 제주근대화 모델을 이론적으로 살핀 저술이다. 현재 한국지방자치학회 회장, 대통령 소속 지방자치발전위원회 위원 및 제2소위 위원장을 맡고 있다. 조선말 ‘의녀’로 불리는 김만덕 기념사업회 기획총괄위원장이면서 ‘나비박사’로 알려진 석주명 기념사업회 공동대표이기도 하다. 제주특별자치도 출범, 자치경찰 탄생의 이론적 산파 역을 한 게 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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