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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개발에 자발적 협동의 불씨를 지피다[창간 2주년 특별기획] 격동의 현장-남기고 싶은 이야기(제2화)
양영철 교수가 전하는 '제주근대화의 선구자' 맥그린치 신부 (5)
양영철  |  yongchul@jeju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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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12.09  10:4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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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그린치 신부가 제주에 당도할 무렵인 1954년 제주도는 처참했다. 가관이었다. 그 때의 모습은 지금 아프리카 국가 중 가장 후진국 수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구 28만 명에 지역총생산량은 고작 23억. 1인당 소득은 미화 50달러다. 식량부족으로 매년 배곯이를 하는 인구가 3만~4만명에 이르렀고, 대책은 없었다. 게다가 일제 강점기를 거쳐 4·3사건의 비극이 채 가시기도 전에 다시 6·25 전쟁으로 약 15만 명의 피난민이 제주로 밀려와 있었다.

그런 역사 탓에 제주도민들은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말에 매몰돼 있었다. 소극적이었고 주춤거렸다. 맥그린치 신부가 그 시절 제주도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안됩니다. 신부님은 여기 사정을 너무 몰람수다(모릅니다)"였다. 토종돼지 대신에 개량종 돼지를 키워 소득이 2~3배 높게 나오는 일을 겪으면서도 그것만은 막무가내였다. 도무지 변화가 없었다. 모두가 "진짜 안 될 것이다"고 장담하는 분위기에서 성공시킨 면양사업을 보면서도 그랬다.

   
▲ 1960년대 이시돌 목장 평원에서 면양을 방목하던 장면이다. [이시돌협회 제공]
면양을 키워서 한림수직을 세우고 거기에서 나온 스웨터와 담요가 명동에서 일류 혼사품으로, 선물용으로 팔렸지만 “안된다”는 마음은 마이동풍이었다. 중학생까지 포함해 고작 25명으로 4H클럽을 만들어 이들을 훌륭한 농ㆍ축산 기술자로 만들어 선진기술을 선뵈었지만 그래도 마찬가지였다. 부모들은 오히려 이들이 키우는 돼지를 학교 간 사이에 팔아치워 자식들의 희망을 꺾기 일쑤였다.

하지만 맥그린치 신부는 제주도민들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는 그 시절 제주민들의 부지런한 성실성과 자립의 의지를 주목하고 있었다. 한림성당을 신축할 때 그 많은 목재를 좌초된 미국선박으로부터 옮겨 오면서도 목재 하나 잃어버린 적이 없었다. 일당을 준 적이 없는데도 마을 일이라고 하면 발 벗고 흔쾌히 나서는 주민들이었다.

초창기 이시돌 목장을 개발할 때 4H클럽 회원들은 일제가 버리고 간 어스름한 일본군 막사에서 야영하면서 힘든 노동을 하며 목장을 개간하고 돼지를 키웠다. 하지지만 돈 없는 신부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그저 어디선가 쌀을 구해다 준 게 다였다. 그랬는데도 한 사람도 이탈자가 없었다. “너무도 순박했다. 그리고 그들은 너무도 부지런했다.” 훗날 맥그린치 신부의 회고다. 제주도민들의 순박한 성실성은 어느 나라, 어느 지역과도 달랐고, 그로선 “사람들이 이런데 못할 게 무언가”란 도전욕을 불러 일으켰다. 그로선 이보다 나은 지역개발의 자원이 없었던 것이다. 맥그린치 신부 역시 찢어지게 가난한 제주를 바라보며 “신앙도 절대적 가난을 벗어난 후에나 가능하다”는 깨우침을 얻기 시작한다.

   
▲ 60년대 이시돌 목장 개간을 위해 도입한 트랙터가 줄지어 선 모습이다. [이시돌협회 제공]
사실 맥그린치 신부 역시 특별한 기술이 있는 건 아니었다. 농ㆍ축산 분야를 그저 귀동냥 삼아, 어깨 너머로 살펴본 게 고작인 그의 경험이 있을 뿐이었다. 초등학교 코흘리개 시절 수의사였던 아버지가 하는 것을 어깨 너머로 구경한 정도가 전부였다. 그래서 맥그린치 신부 역시 배움의 길에 든 건 여느 4H클럽 회원들과 마찬가지였다. 돼지와 닭 키우는 법을 경기도 등 다른 지역의 4H클럽이나 축산기술원을 찾아가 배우고 이런 저런 책을 뒤져가며 익혀 나갔다. 초보가 초보를 가르치는 일이 그 시절 이시돌 목장의 탄생과정이다.

그런데 초보들끼리 배운 실력이 결국 한국의 축산업을 선도할 정도로 성공한 것이다. 그 비결에 대해 묻자 맥그린치 신부는 단호히 말했다. “그건 제주도민들의 협동심과 성실성이 뛰어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가 늘상 하는 이야기다. 초창기 생사고락을 같이 한 4H 회원들 중 품값이 많은 사람은 없었다. 그저 쥐꼬리 같은 봉급을 받고 일했는데 그들은 희망에 차 있었다. 한마디로 어디서 저런 에너지가 나오는지 아침부터 밤늦도록 일하면서도 불평 한마디 없었다. 더불어 그들은 서로를 다독였다. 함께 일하며 함께 살았다. 마치 협동을 즐기는 듯 했다. 그들 대부분이 이시돌에 인생을 내던졌다. 맥그린치 신부는 “솔직히 그들의 정열을 이해하기 어려웠고 너무도 고마웠을 뿐”이라고 지금도 되뇌인다.

학술적 용어로 ‘내생적 지역개발’이란 용어가 있다. 쉽게 말하면 스스로, 자발적으로 자신들의 터전을 꿈의 고장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저 만드는 게 아니라 그 곳에서 삶의 수단과 이익을 찾아내고 서로 나누며 미래를 향해 또 내달리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지금은 그런 기회가 너무나 많다. 돈이 없어서 내생적 개발을 하지 못한다는 말은 할 수 없을 정도로 정부에서, 지방자치단체에서 마을특화사업, 마을가꾸기 사업 등 수 많은 명목으로 지원금이 수억, 수십억, 심지어 수백억에 이른다. 그러나 이에도 불구하고 성공한 예를 찾아보기란 그리 쉽지 않다. 오히려 마을에 돈이 많이 들어오면서 갈등이 생겨나고 책임자가 돈을 빼돌리거나 가로채 수갑을 차는 불행한 사건이 비일비재하다.

   
▲ 맥그린치 신부(차에 탄 이)가 이시돌 목장 개간에 나서던 무렵 마을 유지 등과 촬영했다. [이시돌협회 제공]
2013년 올해 우리나라가 해외의 후진 국가에 원조해준 돈은 무려 2조3000만원에 이른다. 대한민국 정부가 직접 지원도 하고, 한국국제교류협력단(KOICA)와 같은 준 정부 단체나 민간기구를 통해 후진국을 도와주는 각종 사업과 의료지원 등을 아우른 것이다. 그러나 그 나라에 실제로 가보면 우리보다 좋은 최신 기계나 설비가 먼지만 풀풀 날리며 덩그러니 놀고 있는 경우가 대다수다. 아예 고물취급을 당하며 수북이 먼지덩이 창고에 방치돼 있는 경우가 흔하다. ‘줄 사람’은 준비가 돼 있는데 정작 ‘받을 사람’은 준비가 안 돼 있는 전형적인 사례다.

맥그린치 신부는 이 점에서 우리에게 교훈을 던져준다. 이시돌 목장을 일군 성공사례가 그걸 뒷받침한다. 지금도 우리에게 유효하고, 후진국을 지원하는 각국의 정부와 단체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건 ‘받을 사람의 제 1의 준비’는 협동과 성실이라는 점이다. 돈과 기술이 능사가 아니다. 다시 일어서야 할 그들이 협동과 성실의 덕목을 갖춘다면 들어갈 돈과 기술은 그 절반 이하가 될 지도 모른다. 세계의 후진국, 후진지역에 우리가 먼저 전파해야 할 일은 이시돌 목장에서 얻어낸 자발적 협동과 성실이다. 그게 전제다.

그 후 어떻게 성공의 에너지로 뒤바뀔 수 있는 지는 맥그린치 신부와 이시돌 목장이 이미 반 세기 전 정답을 가르쳐줬다. 정답을 찾아가는 해법은 무얼까? 이제 그 얘기가 다음을 기다린다. <글=양영철/ 6편으로 이어집니다>
 

   
 

맥그린치 신부는? = 1928년 남아일랜드의 레터켄에서 태어났다.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사제로 1954년 제주로 부임한 후 지금까지 60년간 제주근대화·경제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성당을 세운 뒤 수직물회사를 만들고, 4H클럽을 만들어 청년들을 교육했다. 신용협동조합을 창립, 경제적 자립의 토대를 만들었고, 양과 돼지 사육으로 시작된 성이시돌 목장은 제주축산업의 기초가 됐다. 농업기술연수원을 설립하고 우유·치즈·배합사료공장을 처음 제주에 만든 것도 그다. 그는 그 수익금으로 양로원·요양원·병원·호스피스복지원과 어린이집·유치원을 세워 가난한 이들을 도왔다. 그 공로로 5·16민족상, 막사이사이상, 대한민국 석탑산업 훈장 등을 받았고 1973년 명예 제주도민이 돼 ‘임피제’라는 한국명을 쓰기 시작했다.

 

   
 
양영철 교수는?

=제주대 행정학과를 나와 서울대와 건국대에서 행정학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위 논문은 “내생적 지역개발에 관한 연구 .” 맥그린치 신부의 제주근대화 모델을 이론적으로 살핀 저술이다. 현재 한국지방자치학회 회장, 대통령 소속 지방자치발전위원회 위원 및 제2소위 위원장을 맡고 있다. 조선말 ‘의녀’로 불리는 김만덕 기념사업회 기획총괄위원장이면서 ‘나비박사’로 알려진 석주명 기념사업회 공동대표이기도 하다. 제주특별자치도 출범, 자치경찰 탄생의 이론적 산파 역을 한 게 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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