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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2주년 특별기획] 격동의 현장-남기고 싶은 이야기(제2화)
양영철 교수가 전하는 '제주근대화의 선구자' 맥그린치 신부 (1)

[격동의 현장-남기고 싶은 이야기]가 <제이누리> 창간 2주년을 맞아 제1화-신구범 전 제주도지사에 이어 제2화를 선보입니다. 제2화의 주인공은 '파란 눈의 개척자', '제주근대화의 선구자'로 불리는 성이시돌 목장의 P. J. 맥그린치 신부입니다. 제주축산을 넘어 한국축산, 근대화의 시초 역을 다진 80중반 노구의 서양 신부가 60년 동안 제주에서 일군 꿈을 양영철 제주대 교수의 집필로 매주 월요일 풀어냅니다. 제1화-신구범 전 제주지사에 이은 여러분의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 편집자 주
 

보물섬인 줄 알았다. 보잘 것 없는 목선 같은 배를 타고 부산을 떠난 지 몇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고단하고 지칠대로 지쳤다. 배멀미가 이리 심한 줄 몰랐다. 그러나 기나긴 시간을 보내고 갑판에서 바라다 본 섬의 풍광은 장관 그 자체였다. 한 가운데 우뚝 선 거대한 산을 기둥 삼아 마치 파노라마 처럼 온갖 산들이 펼쳐져 뿜어내는 장관은 그동안 그가 만나본 자연이 아니었다. 그도 모르게 입에선 “원더풀!”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러고보니 한국 땅을 밟은 것도 어언 1년이 다 됐다. 전쟁의 참화로 망가질 대로 망가진 나라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먼 발치로 보이는 그 섬은 진정 여느 한반도 땅과 달랐다. “나의 하나님! 저에게 이런 낙원 같은 땅에서 소임을 다하라시니 몸둘 곳이 진정 어딘지 모르겠나이다.”

 

처음엔 복 받은 땅, 파라다이스 같은 섬 처럼 보였다. 아직 차가운 4월의 순풍을 안고 배는 그렇게 미끄러지듯 제주섬에 닿았다. 고국인 아일랜드를 떠난 9,000km의 여정은 그의 육신을 이제 그 섬에 박아둘 터였다. 이역만리 한반도에 몸을 붙인지 1년여만에 만난 그의 종착역이었다. “혼란의 시기마다 뭍 사람들이 쫓겨간 적막한 유배지”란 말은 익히 들었지만 망망대해 배 위에서 바라본 그 섬의 풍경은 그게 아니었다.

 

그러나 사실이었다. 배가 ‘덜컹’ 소리를 내며 뱃 머리를 제주 본섬에 대자마자 펼쳐진 풍경은 가관이었다. 남루한 옷차림의 아낙네와 사내들이 즐비했다. 질퍽거리는 저 길을 따라 도대체 어느 길을 어떻게 헤쳐가야 할 지도 막막했다. 그저 옷가지 몇 개 챙긴 가방을 든 사제복 차림의 그는 포구에 배가 닿자마자 ‘구경거리’였다. 수군대는 제주사람들의 목소리는 그들의 곁을 지나칠 때마다 귓전을 맴돌았다.

 

그의 나이 고작 만 26세. 그 때만해도 그는 몰랐다. 그 인연이 반세기를 넘어 무려 60년 성상을 이어갈 지는 꿈에도 몰랐다.

 

맥그린치 신부는 1928년 아일랜드 도네골군의 레터켄에서 9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그는 신앙심이 깊었던 부모님의 영향을 받아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며 자랐다. 어린 시절 그의 꿈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수의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던 그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성장기를 보내던 성(聖)유난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장래를 놓고 고민에 빠졌다.

 

그러다 그의 가슴을 괘종시계처럼 두드린 게 한 신부의 강연이었다. 우연히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번 요한 신부의 강연을 듣게 된 맥그린치 신부는 “하느님의 말씀을 세상 끝까지 전하라”는 요한 신부의 말에 가슴 속 울림을 느꼈다. “내가 이렇게 나마 살고, 내 가족들이 이렇게 행복하도록 만든 하나님의 은총을 저버릴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사제의 길을 걷기로 마음 먹었다. 그게 하나님의 은총에 보답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그 시절 부모에게 쓴 편지에 그는 이렇게 적었다.

 

“하느님께서 많은 일꾼이 필요하시어 저를 부르고 계심을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제자들에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저도 예수님의 말씀처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려고 합니다.”

 

맥그린치 신부는 고교를 졸업한 후 1945년 9월 1일 성 골롬반 신학대학 신학과에 입학했다. 사제가 되기 위한 것이었다. 그로부터 7년. 인고의 시간을 감내해낸 맥그린치 신부는 1951년 12월 21일 성 골롬반 신학교 성당에서 케니 주교의 집전으로 사제서품을 받았다. 이제 가톨릭 신부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하지만 사제서품을 받은 그에게 내려진 명령은 솔직히 ‘황당’(?)했다. 듣도 보도 못한 ‘한국’으로의 부임지 발령. 부임지 명을 받고서야 이리저리 책자를 뒤적여 알아냈다. 6·25전쟁이 한창인 땅-. 황폐할 대로 황폐해진 한국이었다. 하지만 그는 절망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한국 사람들에게 영혼의 안식을 주라는 교회의 준엄한 명령이기에 거역할 수 없었다. 대서양과 태평양을 건너는 9,000km의 대장정을 거쳐 1953년 4월 11일 부산에 도착했다. 그게 낯선 땅 한국에서 사제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된 첫 날이다.

 

하지만 그저 평범했다. 부산으로 들어온 그는 목포의 교구청에서 7개월을 머문 후 전라도 순천성당의 보좌신부를 맡아 소록도, 보성, 벌교 등의 지역을 두루 다니며 미사를 집전했다. 전쟁에 지쳐있는 사람들에게 신앙의 힘으로 기운을 북돋아 주는 게 그의 임무였고, 그것으로 그는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했다. 만족했다.

 

그런데 한국에 온지 1년 만인 1954년 4월. 그의 새로운 부임지가 다시 정해졌다. 그가 ‘하나님의 사랑’을 새로이 전할 곳은 바로 한국 땅 제주, 그곳에서도 오지인 한림. 그가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할 임지는 한림성당. 그가 맡은 역은 초대 주임신부였다.

 

배가 제주섬에 닿자마자 뒤를 볼 것도 없이 그는 한림으로 내달렸다. 걷고 또 걷고, 지나치는 마차꾼에게 손·발짓을 뒤섞어 그저 “한림, 한림”만 소리지르다 어렵사리 얻어 타기도 했다. 신자란 이가 마중을 나오긴 했지만 솔직히 지금도 그는 그 길을 어떻게 하며 한림까지 다다랐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리고 한림에 당도했다. 성당? 그런 건 애시당초 존재하지 않았다. 가톨릭 신자란 이들은 마땅한 건물이 없어 신자들의 집을 빌려 겨우 예배를 보는 형편이었다.

 

“그 당시 제주도에는 본당이 2개 밖에 없었는데 저에게 서쪽에 본당을 만들라는 지시가 내려졌죠. 성당도 없고, 사제관도 없고, 돈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어요. 신자라고는 젖먹이까지 모두 25명이 전부였어요. 어디서, 무엇부터 해야 할지 참 막막했어요.”

 

제주땅에 발을 들여 놓은 그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우선 성당을 짓는 것이었다. 신자들이 그래도 마음 편하게 미사를 볼 수 있는 그런 공간을 마련하는게 급선무였다. 이제 그가 걸친 사제의 옷은 더 이상 그를 알릴 기품이 아니었다. 어찌 보면 거추장스럽기까지 했다. 그는 팔을 걷어 부쳤다. <글=양영철/ 2편으로 이어집니다>

 

   
▲ 맥그린치 신부가 제주에 당도할 무렵 한림항 포구 모습이다.

 

 

 

   
 

맥그린치 신부는?

 

= 1928년 남아일랜드의 레터켄에서 태어났다.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사제로 1954년 제주로 부임한 후 지금까지 60년간 제주근대화·경제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성당을 세운 뒤 수직물회사를 만들고, 4H클럽을 만들어 청년들을 교육했다. 신용협동조합을 창립, 경제적 자립의 토대를 만들었고, 양과 돼지 사육으로 시작된 성이시돌 목장은 제주축산업의 기초가 됐다. 농업기술연수원을 설립하고 우유·치즈·배합사료공장을 처음 제주에 만든 것도 그다. 그는 그 수익금으로 양로원·요양원·병원·호스피스복지원과 어린이집·유치원을 세워 가난한 이들을 도왔다. 그 공로로 5·16민족상, 막사이사이상, 대한민국 석탑산업 훈장 등을 받았고 1973년 명예 제주도민이 돼 ‘임피제’라는 한국명을 쓰기 시작했다.

 

 

 

 

 

양영철 교수는?

 

=제주대 행정학과를 나와 서울대와 건국대에서 행정학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위 논문은 “내생적 지역개발에 관한 연구 .” 맥그린치 신부의 제주근대화 모델을 이론적으로 살핀 저술이다. 현재 한국지방자치학회 회장, 대통령 소속 지방자치발전위원회 위원 및 제2소위 위원장을 맡고 있다. 조선말 ‘의녀’로 불리는 김만덕 기념사업회 기획총괄위원장이면서 ‘나비박사’로 알려진 석주명 기념사업회 공동대표이기도 하다. 제주특별자치도 출범, 자치경찰 탄생의 이론적 산파 역을 한 게 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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