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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에서 찾아온 아일랜드의 꿈”[창간 2주년 특별기획] 격동의 현장-남기고 싶은 이야기(제2화)
양영철 교수가 전하는 '제주근대화의 선구자' 맥그린치 신부(프롤로그)
양영철  |  yongchul@jeju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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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10.28  08:5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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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현장-남기고 싶은 이야기]가 <제이누리> 창간 2주년을 맞아 제1화-신구범 전 제주도지사에 이어 제2화를 선보입니다. 제2화의 주인공은 '파란 눈의 개척자', '제주근대화의 선구자'로 불리는 성이시돌 목장의 P. J. 맥그린치 신부입니다. 제주축산을 넘어 한국축산, 근대화의 시초 역을 다진 80중반 노구의 서양 신부가 60년 동안 제주에서 일군 꿈을 양영철 제주대 교수의 집필로 매주 월요일 풀어냅니다. 제1화-신구범 전 제주지사에 이은 여러분의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 편집자 주
 

그의 고국은 아일랜드(ireland)다. 그의 나이는 이미 팔순을 넘겨 여든 다섯. 스물 다섯의 나이에 고국을 떠나 그가 60년간 살아온 땅 역시 ‘아일랜드’(island)다.

한반도 남녘 섬 제주도-. 그곳은 그가 아일랜드를 떠나 꿈을 키워온 아일랜드다.

그의 한국이름은 임피제. 본명은 패트릭 제임스 맥그린치(Patrick James McGlinchey).

지난 24일 오후 제주시 한림읍 이시돌 목장으로 그를 만나러 갔다. 널따란 이시돌 목장처럼 큰 풍채도 그렇지만, 이제는 기력이 다한 듯 숨이 가뿐 그이지만, 비록 지팡이에 의지하던 그이지만 그를 보면 ‘큰 바위 얼굴’을 연상한다. 그를 알면 그가 바로 우리 제주의 ‘큰 바위’라고 한다한 들 과장이 아니다.

 

   
 

1989년이었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때다. 위풍당당한 건 물론 기운 깨나 쓰는 건장한 청년과 다름 없이 그는 의욕이 넘쳤다. 언제나 할 일이 많은 청년 그 자체였다. 80 중반의 노구지만 그는 지금도 언제나 처럼 지나치게 개발 위주로 치닫는 제주를 걱정하고, 그의 꿈이 오롯이 녹아 들어간 제주땅을 여전히 사랑한다.

맥그린치 신부는 1954년 4월, 6·25 동란의 말미에 제주 땅을 밟았다. 이역 만리 고국을 떠나 제주섬에 홀연히 찾아온 25세의 신부에게 비친 제주의 모습은 처참했다. 4·3사건의 피비린내 나는 참상이 채 가시지 않았고, 전쟁으로 피폐해질 대로 피폐한 아시아 최빈국, 그 중에서도 더 가난한 제주도, 그 것도 모자라 더 힘겨운 오지 한림이란 마을로 그는 자리를 잡았다.

그가 만난 한림땅은 그가 성경책만을 손에 쥐고 있도록 가만 두지 않았다. 한 끼 끼니를 때우는 건 고사하고 부모를 잃고, 전쟁에서 팔·다리를 잃고, 난민들로 가득찬 그 처참한 장면을 그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아픔이었고 그 조차도 눈물을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그는 그 시절 사제의 옷을 걸친 채로 삽을 들었다.

물어물어 경기도의 계엄사령부 역할을 하는 미군부대를 찾아가 앤더슨 대령을 만났다. 그리고 매달렸다. 그에게서 얻은 게 돼지 2마리다. 이른바 ‘서양돼지’다. 제주에서 흔하게 보이던 검은털의 ‘토종 흑돼지’론 축산업을 일으킬 수 없다고 봤다. 덩치가 크고 비육이 잘 되는 요크셔라는 하얀 빛깔의 돼지로 미래에 대한 운명을 걸어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시커먼 색’ 돼지에 익숙했던 제주도민들은 하얀 돼지를 보자 마뜩치 않은 얼굴이었다. 아니 경원시했다. 그들은 햐얀 돼지를 부정 탄 동물이라고 생각했다. 자칫 하얀색 돼지를 잡아 경조사에 고기로 내다 팔라치면 욕지거리를 해대기 일쑤였다.

초지개간과 밭농사에 쓰고자 트랙터도 들여왔다. 한국에서 만들어낼 수 없는 기계이기에 외국에서 겨우 들여왔다. 필요한 돈은 고국의 이웃·친구·단체에 손을 벌렸다. 가난한 섬을 일으켜 세우려면 그들에게 그저 옷이나 음식, 물자나 쥐어주고선 해결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들의 손에 장비를 쥐어줘야, 그들에게 기술을 가르쳐야, 그들의 땀으로 얻어내도록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트랙터 굉음에 놀란 주민들의 신고로 행정관청에 불려 다니며 치도곤을 겪었다.

 

   
▲ 1970년대 이시돌 목장의 양 방목 풍경. [성이시돌 제공]

일감이 없어서 뭍 지방을 헤매는 제주의 딸들을 가만 두고 볼 수 없었다. 신발공장의 여공으로 부산 등지에서 노예처럼 일을 하는 제주의 젊은 여성들을 제주로 다시 불러 모을 궁리를 하다 무릎을 쳤다. 고향의 양모산업이었다. 또 고국의 친구·친척들에게 간곡한 호소의 편지를 보냈고, 이제 양떼들이 제주섬으로 들어왔다. 양모를 생산하여 옷을 짜게 하면 굳이 고향을 떠나서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으로 양 3천마리를 외국에서 수입했다.

양모로 짠 양말을 들고 서울의 중심지 명동거리에 내다 팔았다. 고객들의 동향을 살폈고, 기술이 모자라다고 판단한 그는 이듬해엔 고향의 수녀들을 초청해 이 기술을 한림 여성에게 가르치도록 했다. 결국 우리 나라 최고의 호텔인 명동에 있는 조선호텔과 제주시 칼 호텔에 매장을 둘 정도가 됐다. 그 양모 제품은 그 당시 최고의 혼숫감, 소위 ‘명품’이 되어 부잣집 마나님, 제일교포 등에게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그 전 과정이 우여곡절이었다. 그러나 그는 청년들에게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교육시키고, 기술을 가르치면서 그들이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돼지를 분양해 주고, 소를 분양해 주고, 나중에는 3만평이라는 큰 땅을 분양해 주면서 자립의 길을 터 줬다. 함께 생산하고 공동판매를 하고, 그리고 신진기술을 서로 배워가면서 사업을 이끌어 나갔다. 급기야 금융에도 손을 댔다. 자금융통을 해야 했지만 은행 문턱은 높았다. 일을 해야 하는데 돈이 모자라니 자구책이 필요했다. 한림 신협을 창설, 이젠 제주도내 전역에 26개의 신협이 탄생하는 계기를 만든 것도 맥그린치 신부의 역할이었다.

1960년대 근대화 운동이 한창일 무렵 온 행정력을 총동원해서라도 초지개간과 목초 개발에 나서라는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목초개발에 실패했다. 그러나 맥그린치 신부는 뉴질랜드에서 목초 최고의 전문가를 초빙, 아예 그를 3개월 간 사제관에 눌러 살도록 했다. 그리고 그와 연구를 거듭하곤 국내 처음으로 겨울에도 파릇파릇한 목초가 널린 이시돌 목장의 장관을 일궈냈다. 오죽하면 박 전 대통령이 재임 중 변변한 도로도 없는 길을 따라 장마로 질척거리던 때인데도 아랑곳없이 그를 찾아 목초지 생산의 비결을 경청하고 갔겠는가? 대통령은 그에 대한 보답으로 이시돌 목장과 세상을 연결하는 도로·전기·전화를 죄다 뚫어줬다. 나라가 하지 못한 일을 벽안의 젊은 신부가 해결해 내는 모습을 지켜본 국가최고 책임자의 감동의 결과다.

 

   
▲ 맥그린치 신부가 제주에 당도한 무렵인 1950년대 제주 한림읍 올레길 풍경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의 농촌개발은 이후 복지문제로 시선이 옮겨진다. 제주에 처음 양로원을 만든 것도 그다. 호스피스병원도 역시 제주에서는 최초다. 이어 유치원을 건립하는 등 그의 제주 근대화는 기초다짐 → 본격적인 개발 → 개발이익의 확산 → 지역 복지 강화라는 정석적인 로드맵으로 진행됐다.

그의 일대기를 이제 풀어간다. 그의 인생사를 써내려가지만 그의 단순한 연대기를 풀어가기 위함이 아니다. 그가 제주에 남긴 60년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과 의미가 얼마나 중요하며, 그리고 광범위하게 활용할 수 있을 것인가에 주목할 뿐이다. 그가 일구어 놓은 과정과 방법이 가난으로 신음하는 후진지역·국가에 적용되기를기대하는 것이다.

솔선수범으로 주민의 마음을 움직이고, 신자에 관계없이 주민친화적 사업을 우선하며, 개발의 이익은 오롯이 마을과 직원에게 되돌리는 그의 개발은 분명 오늘날 교훈이다. 항상 혁신하며 앞서가는 사업을 선택하는 안목은 오늘날 우리 젊은 세대는 물론 지역개발을 주도하는 공직자·정치가들이 꼭 되새겨 봐야 할 혜안이다.

맥그린치 신부와 개인적으로 친분을 다지며 얻은 기록과 채록, 그리고 1989년 박사학위 논문을 쓰면서 면담했던 주민들과의 대화기록, 그리고 곧 발간하는 『맥그린치 신부의 제주사랑과 결실』 (맥그린치신부 기념사업 추진위원회)이 연재의 주요 토대가 될 것임을 미리 밝힌다. <1편으로 이어집니다>

 

   
▲ 금악오름에서 바라본 이시돌 목장 전경

 

   
▲ 맥그린치 신부와 양영철 교수가 제주 이시돌 목장 사제관 앞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맥그린치 신부는?

= 1928년 남아일랜드의 레터켄에서 태어났다.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사제로 1954년 제주로 부임한 후 지금까지 60년간 제주근대화·경제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성당을 세운 뒤 수직물회사를 만들고, 4H클럽을 만들어 청년들을 교육했다. 신용협동조합을 창립, 경제적 자립의 토대를 만들었고, 양과 돼지 사육으로 시작된 성이시돌 목장은 제주축산업의 기초가 됐다. 농업기술연수원을 설립하고 우유·치즈·배합사료공장을 처음 제주에 만든 것도 그다. 그는 그 수익금으로 양로원·요양원·병원·호스피스복지원과 어린이집·유치원을 세워 가난한 이들을 도왔다. 그 공로로 5·16민족상, 막사이사이상, 대한민국 석탑산업 훈장 등을 받았고 1973년 명예 제주도민이 돼 ‘임피제’라는 한국명을 쓰기 시작했다.

 

 

   
 

양영철 교수는?

=제주대 행정학과를 나와 서울대와 건국대에서 행정학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위 논문은 “내생적 지역개발에 관한 연구 .” 맥그린치 신부의 제주근대화 모델을 이론적으로 살핀 저술이다. 현재 한국지방자치학회 회장, 대통령 소속 지방자치발전위원회 위원 및 제2소위 위원장을 맡고 있다. 조선말 ‘의녀’로 불리는 김만덕 기념사업회 기획총괄위원장이면서 ‘나비박사’로 알려진 석주명 기념사업회 공동대표이기도 하다. 제주특별자치도 출범, 자치경찰 탄생의 이론적 산파 역을 한 게 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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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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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또 다른 한라산 2013-10-29 15:45:47

    제주에 살아있는 또 하나의 한라산같은 분이군요.
    그가 제주에서 살아 온 60년을 글로나마 접할 수 있게되어 반갑습니다.
    그 분의 삶이 제주도민에게 감동으로 전해오길 기대합니다.신고 |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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