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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위된 광해군과 제주목사 이시방, 그들이 만나다광해군과 제주목사 이시방···광해의 마지막을 지킨 목사의 운명
제주사 인물이야기  |  jnuri@jnuri.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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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03.10  15:0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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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光海君, 1575~1641)

 조선왕조 500여년 간 제주에 유배된 이들은 2백여 명에 이른다. “조선조 제15대 군주”, “제주에 유배된 임금”. 이중 광해군은 지존의 왕좌에 있던 인물로, 유배인 명단에서 단연 처음으로 꼽힌다.

 광해군은 인조반정에 의해 “혼란무도(昏亂無道)” “실정백출(失政百出)”이란 죄목으로 인목대비의 명령에 따라 폐위되었다. 처음에는 강화도의 교동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제주로 이배되었다.

 
   
▲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송릉리에 있는 광해군 묘역
1637년(인조 15) 6월 16일 폐주(廢主)를 제주에 안치하기 위하여 호송 경호 책임 별장 이원로(李元老)등이 광해를 압송하여 어등포(지금의 구좌읍 행원리 포구)에서 1박, 다음날 제주성 안으로 들어와 망경루 서쪽에 안치소를 마련하였다. 이때 이원로가 이곳이 제주라고 알리자, “어째서 이곳에……!”라 하며 매우 놀랐다고 전한다.

또한, 마중 나온 목사가 “임금이 덕을 닦지 않으면 주중적국(舟中敵國:한 배 안에 적의 편이 있다는 뜻으로, 군주가 덕을 닦지 않으면 자기편일지라도 모두 곧 적이 될 수 있음을 이르는 말)이란 사기(史記)의 글을 알고 계시지요?”하니 눈물을 비 오듯 흘렸다 한다.

광해의 적소는 현 중앙로 외환은행 서쪽에 위치하며, 2001년 고 홍순만 제주문화원장의 고증으로 표석이 세워져 있다.

   
▲ 제주시 중앙로 외환은행 부근 자리에 세워진 광해군의 적거지 표석
이곳에서 광해는 심부름 하는 하인들로부터 “할아범”이라는 멸시와 홀대를 받으며 만 4년여를 살다 파란만장했던 삶을 마감하게 된다.

 연산과 함께 조선조 2대 폭군으로 일컬어지지만 그에 대한 학자들의 의견은 분분하다.

 세자로 있을 무렵부터 폐위될 때까지 성실하고 과단성 있게 정사를 처리했지만, 그의 주위를 에워싸고 있던 대북파의 장막에 의하여 판단이 흐려졌고, 인재를 기용함에 있어 파당성이 두드러져 반대파의 질시와 보복심을 자극하게 되었다는 게 학자들의 중론이다.

따라서 뒷날 인조반정을 정당화하기 위한 책략과 명분에 의하여 패륜적인 혼군(昏君)으로 규정되었지만, 실은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희생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목사 이시방(李時昉:1594~1660)

 광해가 유배지인 제주에서 숨을 거두자, 당시 제주의 행정과 군정의 책임자였던 목사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죄인의 몸으로 유배된 ‘귀양달이’라 하지만 한때 옥좌의 주인이 아니었던가?

목사 이시방(李時昉:1594~1660)은 제주목사 심연의 후임으로 1640년(인조 18) 9월 제주에 도임하고 1642년 8월에 떠났다.

   
▲ 영화 <광해>의 한 장면
실록에는 그가 재임 중인 1641년 7월, 본도에 유폐된 광해군이 사망하자 모든 관리들을 거느리고 소복(素服)으로 친히 염습, 사변에 잘 처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그가 저술한 서봉일기(西峰日記)에는 다음과 같이 광해군 사후 처리과정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이때 광해군이 섬 안에 있었다. 신사(인조 19:1641) 7월 초1일, (광해군의) 상이 났는데 마침 가장 무더울 때를 당하여 시체가 점점 변해갔다. 공은 감옥 문을 열고 들어가 보려고 하니, 감옥 울타리의 내관(內官) 이하가 막아서며 모두 말하기를, “왕부(王府)에서 봉쇄하고 있는 곳이므로 마음대로 스스로 열고 닫을 수 없습니다.”고 하였다. 공은 이것은 큰일이라고 여겼다. 염습할 때에 나인[內人]들이 하는 대로 전부 맡길 수도 없었다. 꼭 조정의 처분을 기다리자면, 천 리를 왕복하는 사이에 이미 시일이 경과하여, 그 모습이 이미 변한 후가 되므로 다만 증거를 취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죽음을 존숭하는 예의에 근거될 수도 없었다. 결점이 없을 수는 없는 대로 고정된 쇠못을 뽑아내고 옥문을 열었다. 이어서 후에 조사받을 것을 위해 봉했던 사슬을 남겨두었다. 이어 삼읍 수령을 데리고 소복(素服)으로 들어가 조문을 하고 스스로 욕습(浴襲)을 하고 염(斂)과 관(棺)에 이르기까지 모두 친히 스스로 보고 검시를 마쳤다. 염을 한 후 다시 옥문을 닫았다. 그 모습을 갖추어 치계(馳啓)를 하고 대죄(待罪)하였다. 처음에 상감께서 해외에서 상이 나서 시체를 염할 때, 혹시 부족한 점이 있을까 하여 예관(禮官)에게 즉시 명하여 가서 호상하려 했는데, 공의 장계(狀啓)를 보고서는 크게 감탄하고 칭찬을 하였으며 조정 역시 모두 공이 사변에 잘 처리했다고 함이 대다수였다.”

이시방은 1623년 인조반정 때 유생으로 아버지와 함께 가담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으로 연성군(延城君)에 봉해졌던 인물이다. 그런 그가 광해의 마지막을 손수 염하여 보냈던 것이다. 

글=백종진/ 제주문화원 문화기획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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