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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을 한양으로 압송한 제주목사, 그는?목사 이원진···제주기록 '탐라지' 기술에 대정향교 터 잡아
제주사 인물이야기  |  jnuri@jnuri.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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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02.09  13:2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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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5년(세종 17) 목사 최해산 때에 제주목관아의 소실은 조선건국 이래 제주에 관한 공문서뿐만 아니라 관아에 보관하고 있었을 고려시대 탐라 관련 기록을 모두 소진하고 말았다. 이전의 기록이 모두 화마에 잿더미로 변해버렸으니 천년 왕국 탐라의 실체는 유명무실한 것이 되어버렸다.

이에 이원진은 제주를 떠나던 해에 『동국여지승람』과 충암 김정의 「제주풍토록」을 전거로 삼아 제주의 연혁뿐만 아니라 풍속과 산물(産物) 등을 총망라한 『탐라지』를 찬술하게 된다. 이와 관련하여 이원진의 『탐라지』 제주목, 건치연혁조의 다음 기사에서 그의 탐라지 편찬 동기를 살필 수 있다.

     ‘…위 아래 천여 년 사이에 반드시 주승(州乘)이 있어서 당시의 일을 기록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1435년(세종 17) 안무사 최해산 때에 관부(官府)의 실화(失火)로 문적(文籍)이 모두 불타버렸으니, 애석한 일이다.’

 한편, 이원진은 직접 찬술한 『탐라지』를 제주유생 고홍진(高弘進;1602~1682)에게 교정하여 간행하도록 하였다. 고홍진은 현 제주시 이호동 출신으로 훗날 명도암 선생으로 유명한 김진용 등과 함께 1618년 제주에 유배를 온 간옹 이익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웠으며, 동료들에게는 신망이 두터운 유생이었다. 1664년 65세의 나이에 문과에 응시, 급제하였다. 풍수지리에 밝아 의술의 진국태, 점술의 문영후, 무술의 양유성과 더불어 탐라사절(耽羅四絶)로 일컬어진다.

 고홍진에 대해 심재 김석익은 「탐라인물고」에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고홍진은 제주사람이다. 선조 35년(1602)에 태어났다. 김진용과 함께 간옹 이익에게 배웠는데 동료들에게서 높이 받들어졌다. 널리 배우고 옛것을 익혔으며 겸하여 풍수에 통달했다. 목사 이원진이 일찍이 본도의 옛 사적을 궁구하여 읍지(탐라지)를 편찬할 때 감수와 교정을 맡겼고, 사실이 간략하고 상세한 것과 지리가 명확한 것은 실로 고홍진이 헤아려 기린 것이었다. …’

 이원진이 찬술한 『탐라지』를 감수하여 완성을 보게 한 이가 고홍진이라는 얘기다.

 여하튼 세종 때 관아의 화재로 인해 200여년 간 제주에 이렇다 할 역사적 전거가 없던 상황에서 이원진은 제주 최고(最高)의 읍지(邑誌)를 편찬하여 제주 역사의 뿌리를 찾아주었다 하겠다.

이후 이원진의 탐라지는 18세기에 이형상, 19세기에 이원조․장인식의 『탐라지』등이 편찬되고, 20세기에 들어서는 김석익의 『탐라기년』과 같은 명저가 나오게 된 근간이 되었다.

 대정향교 터 占地

 조선왕조 500년, 나라의 지도이념으로 성리학을 보급하기 위해 전국의 모든 군현에 향교가 설립되어졌고, 제주의 대정현에도 세종 2년(1420) 대정현성 안에 향교가 처음으로 설치되었다. 이후 여러 번 자리를 옮기다 현재의 위치로 옮겨진 것은 효종 4년(1653)이었다. 이후 1835년(헌종 1)에 목사 박장복이 중수하는 등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이원진이 풍수로 점지한 대정향교
이원진이 지금의 자리로 대정향교를 이설했다는 내용을 박장복의 기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성묘(聖廟)가 옛날에는 대정현성 안에 있어서 땅이 낮고 좁았습니다. 세 번을 지난(180년 전) 1653년(효종 4)에 이경억 어사가 옮겨 세울 것을 임금에게 아뢴 즉, 이원진 목사가 대정현성의 남쪽 단산(簞山) 밑으로 위치를 바꿔서 정하였습니다. 시내가 맑고 봉우리는 빼어나며 양기를 마주하고 음기를 등져서 드디어 영원히 성인의 위패를 봉안하는 곳으로 삼게 되었으니, 오늘날 이곳이 그 땅입니다.…’

 ‘땅이 비좁고, 지형이 조잡하여 인걸이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어사 이경억이 조정에 건의하고, 이에 당시 제주목사였던 이원진이 터를 봐서 지금의 단산 밑으로 대정향교가 옮겨오게 된 것이다.

이원진이 점지한 대정향교의 터를 풍수가들은 옥녀가 가야금을 타는 형국이라 하여 옥녀탄금형(玉女彈琴形)이라 일컫는다. 어떤 이들은 봉황이 둥지로 돌아와 보금자리를 틀고 있는 형국이라 하여 비봉귀소형(飛鳳歸巢形)이라고도 부른다.

그런데 풍수학상 옥녀탄금형은 재운(財運)을 가져오고, 비봉귀소형은 귀인이나 학자를 배출하는 명당이라고 한다. 이곳의 과거급제자수가 제주의 다른 두 향교에 비해 많지 않은 반면, 근래 경내에 새 건물이 지어지고 희사자를 기리는 공덕비가 뒤뜰에 즐비한 것을 보면 옥녀탄금형이라 해야 할까?

옥녀가 거문고를 탄다 해도, 봉황이 둥지로 날아드는 형국이라 해도 향교는 언제나 그 중심에 있고, 이원진은 대정향교의 터를 직접 고를 만큼 풍수에도 일가견이 있었던 듯하다. 

글.사진=백종진/ 제주문화원 문화기획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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