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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3읍 유생을 뽑아 훈장으로 삼으니...제주목사 이괴...귤림서원의 시초인 장수당 세워
제주사 인물이야기  |  jnuri@jnuri.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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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01.21  11:3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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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 이괴(李襘 : 1607~1666)

1954년 담수계(淡水契)에서 발간된 『증보탐라지』에는 이괴에 대해, ‘1658년(효종 9) 4월에 도임하고 그 후 2년이 지나서 경자년(현종 1년;1660) 5월에 교체되자 떠났다. 산마감목관(山馬監牧官)을 계설(啓設)하였다. 남성(南城) 안에 장수당(藏修堂)을 건립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산마감목관 계설

헌마공신(獻馬功臣)으로 유명한 김만일의 3남인 김대길(金大吉:1608~1668)은 아버지에 이어 1658년 말 208두를 헌납하여 산장(山場)에 방목하게 된다. 이는 목사 이괴가 조정에 계청(啓請)하여 산마감목관제도를 설치하게 한 데서 기인한다. 김대길에게는 이러한 공로로 이괴의 장계에 의해 감목관 벼슬이 내려지고 특명으로 감목관직을 대대로 그 자손에게 세습하게 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김석익은 『탐라기년』에서 ‘효종 9년(1658)에 김만일의 아들 김대길과 큰 손자 김려가 또 산장(山場:현재의 녹산장)에서 방목하던 2백여 마리를 바쳤다. 이때에 조정에서 김대길을 산마감목관으로 삼고 6품의 관등을 내리고, 특별히 명령하여 그 자손으로 그 직분을 세습하게 하니 이로부터 음사(蔭仕)가 끊이지 않았다. 김대명은 벼슬이 보성군수에 이르니 김대길의 형이다. 김려는 벼슬이 흥덕현감에 이르니 김대길의 아들이다. 김려의 아들 김우천은 숙종 39년(1713)에 본도의 감진(監賑)을 맡아 비축했던 곡식 1백 40석을 진휼하는데 도와, 이에 부호군(副護軍)에 가자(加資) 되었고, 우천의 아들 김남헌은 벽사찰방에 가자되었다.’

여하튼 이괴에 의한 감목관 개설은 1894년 갑오경장 때 그 제도가 없어질 때까지 2세기를 넘게 경주김씨가 제주 최고의 세력가로 존재하게 한 단초를 제공하였다고 하겠다.

   
▲ 이괴의 자취가 남은 제주시 용연의 마애석각(磨崖石刻)
장수당 건립

2년간의 제주목사 생활을 마무리하고 떠나가게 되자 명도암(明道庵) 선생으로 유명한 제주선비 김진용(金晋鎔)이 이괴를 찾아왔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청을 올리게 된다.

“사또께서는 부임한 이래로 여러 유생들을 불러 모아 학문에 힘쓰도록 과제 부과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모든 유생들이 또한 쫓아 교화되고 힘써 배워서 문학이 크게 변했으니, 덕을 입음이 큽니다. 그러나 만일 이와 같이 해놓고 버리고 간다면, 여러 유생들은 다시 의지할 곳이 없어 모두가 배움을 포기하고 돌아가 농사를 짓게 될 것이니, 어찌 매우 애석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괴가 “어찌하면 좋겠느냐?”고 하자, 김진용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제주성 남쪽에 폐허가 된 집터가 하나 있는데, 예전의 한성판윤 고득종(高得宗)이 살던 옛 터입니다. 고 판윤은 두 아들이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조정에서 현달하니, 평소 명당으로 일컬어졌습니다. 만약 이곳에 두어 칸 집을 지어 공부하는 곳으로 삼고 얼마간의 책과 양식을 마련해 주면, 영원토록 잊혀지지 않을 훌륭한 일이 될 것입니다”

이에 앞서 이괴는, 제주목사에 부임하자마자 제주 3읍의 유생 중 20명을 뽑아 관에서 책과 양식을 지급하고 초가 6칸을 향교 옆에 지어 이들을 머물러 살게 하였다. 그리고 경서를 읽은 자를 차출하여 훈장으로 삼아 이들을 가르치게 하였다. 또한 본인 스스로도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몸소 더불어 강론하면서 제주도에 흥학(興學)의 초석을 다져놓은 상황이었다.

결국 이괴는 김진용과 함께 고득종의 옛 터로 알려진 지금의 오현단 일대를 둘러보고는 그곳에 학사(學舍) 12칸을 짓고, 당호를 예기(禮記)의 ‘항상 학문에 뜻을 품고서[藏] 중지하지 않고 닦아 익힌다[修]’는 구절에서 따서 장수당(藏修堂)이라 지어 현액하였다.

그리고 진사(進士) 김진용을 교수로 삼고 앞서의 20명에 어린 아이[童蒙] 15인을 더 뽑아 학사를 운영할 재정을 지원할 수 있는 조치를 마련하고 떠났다.

이후 1667년(현종 8) 가락천 동쪽에 있던 충암묘를 장수당 남쪽인 지금의 오현단으로 옮겨 지음에 따라 사당과 학사가 갖추어진 제주 유일무이의 서원인 귤림서원이 세워지게 되었다. 고종 때 귤림서원이 훼철된 이후에도 그 이름이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으니, 김진용의 예언은 적중했다고 하겠다.

영혜사에 배향

이후 이괴는 귤림서원 곁에 이약동 목사와 함께 1669년(현종 10)에 목사 이인이 창건한 영혜사(永惠祠)에 배향되었다.

이후 영혜사에는 1819년(순조 19)에 목사 조의진이 유림의 장계에 의하여 이형상ㆍ김정(金)을 뒤이어 배향하고, 1831년(순조 31)에 목사 이예연이 유림의 장계에 의하여 김진용(金晋鎔)을 추가 배향하였다.

한편 영혜사는 처음에는 편액이 없다가 1841년(헌종 7)에 목사 이원조가 상현(象賢)이라 이름을 붙였고, 1848년(헌종 14)에 목사 장인식이 영혜(永惠)라 이름을 고쳐지었다고 전한다. 또한 영혜의 편액은 추사 김정희가 제액하였다고 전한다. 후에 이예연 임형수를 추가 배향하였다가 1871년(고종 8)에 철폐되었다.

이외에도 이괴의 자취는 용연 마애석각(磨崖石刻)에서도 찾을 수 있다. 용연 서쪽 암벽에 선유담(仙遊潭)이란 대자(大字) 제액(題額)과 함께 그 아래로 판관 김우 이하 교수, 군관들과 1658년 가을 이곳에 나들이 갔던 사실을 새겨놓았다.

글.사진=백종진/ 제주문화원 문화기획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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