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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진건 교수의 [제주유배지 재발견(1)]...추사 김정희, 최익현이 거쳐간 화북포구

을미년 새해 새 연재를 시작합니다. 유배의 땅! 제주의 곳곳을 다시 살피는 작업입니다. 유배의 땅이었지만 실상은 미래를 향한 도전과 진취, 그리고 배양(培養)이 자리했던 제주의 역사를 더듬습니다. 유배문화의 정수를 살펴왔던 양진건 교수가 집필자로 나섭니다. <제이누리> 독자 여러분의 애독을 바랍니다. / 편집자 주

□ 화북 포구

 

겨울의 화북 포구는 바람이 드세었다. 드센 바람 소리 때문인지 마치 바다가 우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소리의 근원은 알 수 없었다. “바다가 우는데 우리는 바다의 목구멍을 볼 수가 없구나”하던 시인 이성복의 시에 꼭 맞는 날이었다.

 

조선시대 조천 포구와 함께 제주도의 관문이었던 화북 포구.

 

1840년(헌종 6) 유배형을 받고 이곳으로 들어 와 10여년 가까이 대정에서 살던 추사 김정희(金正喜)가  “남극성만 은혜처럼 잔잔한 바다 위에 빛나는 곳"이라던 화북 포구.

 

 

아마도 그가 도착했던 9월의 화북 밤바다는 무척 고요했던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유배형을 받아 한양을 떠나 이진에서 제주도로 출발했을 때가 해 뜰 무렵이었고, 화북 포구에 도착했을 때가 석양이 질 무렵으로 단 하루 만이었기 때문이다.

 

필자도 '한 여름 밤의 영화제'가 열린 화북 포구에서 그런 고요한 바다를 본 적이 있었다. 포구에서 영화를 본다는 것은 분명 이색적인 경험이었다. 그런 여름날도 있었다. 그러나 오늘 찾은 겨울의 화북 포구에는 제주도 특유의 매운바람만 가득했다.

 

화북은 추사 외에도 최익현(崔益鉉) 등 여러 유배인이 들어오고, 나갔던 곳이다. 화북포구에 도착한 그들은 당연히 화북진과 가장 먼저 마주쳤을 것이다.

 

원래 화북은 제주의 대표적 해군기지로 수전소(水戰所)가 있었다. 이것이 명종때 왜구에 의해 격파되자 1678년(숙종 4) 진성을 쌓았던 것이다. 화북 포구는 내륙의 출입구였기 때문에 왕명을 받든 사신을 접대할 시설이 필요하여 환풍정(喚風亭)을 건립하고 망양정(望洋亭)을 두었다.

 

포구가 얕고 비좁아 배 출입이 불편했기 때문에 1734년(영조 11)에는 김정 목사는 직접 부역을 독려해 축조 공사를 하기도 했었다.

 

화북포구에 내린 유배인은 화북 사람들의 큰 구경거리였다.

 

김정희가 도착하자 늦은 저녁인데도 동네 아이들이 모여들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하늘에는 별들이 가득 떠 있었다. 그가 제주도에서 처음으로 쓴 시에는 이런 화북 포구의 늦은 저녁 풍경이 생생하다.

 

이렇게 경황없이 들어와 추사는 대정현에서 9년을, 최익현은 제주목에서 3년을 유배생활하게 된다.

 

유배는 일정한 기간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1년이든 10년이든 그 기다림의 고통은 마찬가지였으리라. 그래서 해배되기만을 노심초사할 수 밖엔 없었다. 그러다 사약이라도 내려와 죽게 된다한들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던 중 다행히 유배가 풀리자 김정희는 9년 만에 다시 화북 포구를 찾게 된다. 겨울이었다.

 

그날도 필자가 찾은 날처럼 바람은 거셌고 좀처럼 갈 길을 비켜주지 않을 기미였던 것 같다. 그래서 김정희는 화북진의 사신 접대시설인 환풍정에서 바람이 잦아들기를 기다리며 “술잔에 해와 달이 들고 날”만큼 술에 취한다.

 

해배가 되었으니 마음은 가벼웠지만 제주바다라는 것이 “삶과 죽음의 갈림길”이었기에 거친 겨울바다 날씨에 신경 쓰이지 않을 리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술맛이 어디 제대로 날 수 있었을까?

 

술에 취하고 깨어나 봐도 1월의 화북 바다는 여전히 거칠었다. 쉽게 잦아들지 않았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탈 없이 돌아갈 수 있기를 추사는 엎드려 이곳 해신사에 간곡히 빈다. 배의 순항을 비는 제문을 지어 해신사에도 올렸던 것이다.

 

 

바람이 거칠지 않았더라도 제주바다를 탈 없이 건너가기란 그리 쉽지 않다는 걸 알고 있는 김정희로서 신의 힘을 외면할리 만무했다.

 

해신사는 해상 왕래의 안전을 기원하기 위하여 지은 것으로 1820년경부터 '해신지위(海神之位)'를 모셔놓고 해상의 안전과 수복안녕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던 사당이다. 현재 제주도 지방기념물 제22호로 지정되어 화북 포구 한 쪽을 지키고 있다.

 

얼마나 초조했을까. 다행히 남해신의 감명 덕인지 마침내 바람이 잦아들었다. "이 때다" 싶어 김정희는 화북 포구를 뒤로하고 수평선을 넘어 서러운 땅, 제주도를 떠난다.

 

양진건은?

 

= 1957년 제주생으로 한양대에서 교육학을 전공, 박사학위를 받았다. 제주대 교육학과에서 교육사를 가르치면서 제주유배인들의 교육활동을 연구해왔다. 최근에는 제주대 스토리텔링학과에서 역사스토리텔링을 가르치면서 제주유배문화 스토리텔링 콘텐츠 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이에 대한 노력으로 대통령상, 국무총리상, 탐라문화상을 수상했다. 제주대 학생처장을 역임했고 현재는 제주대 스토리텔링연구개발센터장과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재위원, 한국디지털스토리텔링학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제주유배길에서 추사를 만나다』(푸른역사, 2011) 등의 저서와 함께 『귀한 매혹』(문학과지성사, 2008) 등의 시집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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