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노컴스티프’는 원작 소설 작가이자 이 영화의 ‘내레이터’로 참여한 도널드 레이 폴록(Donal Ray Pollock)의 고향이기도 한 실재하는 지명이다. 반면, 콜 크릭은 고유명사라기보다는 미국에 무수히 산재하는 탄광촌의 보통명사에 가깝다. 쉽게 말하면 이름 없는 탄광촌이다.
영화가 분위기나 느낌이 크게 구분되지 않은 이 쇠락한 촌락들을 오가며 전개되다보니 가끔은 혼란스럽기도 하다. 그럼에도 작가가 굳이 이 2개의 촌락을 하나의 ‘프레임’에 담으려 한 이유가 궁금해진다.
오하이오주의 노컴스티프와 웨스트버지니아의 콜 크릭은 그 사이에 오하이오강(Ohio River)을 사이에 두고 200여㎞ 떨어져 데칼코마니처럼 마주 보고 있는 촌락들이다. 영화의 주인공 윌러드(빌 스카스가드 분)와 아빈(톰 홀랜더 분)은 그 오하이오강을 건너오고, 또 건너가서 똑같은 악마들을 만나고 자신들도 악마가 돼간다.
웨스트버지니아 콜 크릭 출신인 윌러드는 2차 세계대전 태평양 전쟁에 투입돼 악마가 된 인간들의 생생한 모습을 목격한다. 그러나 그곳에 신은 없었다. ‘기도는 반드시 응답받는다’는 복음주의 신앙인 ‘남부침례교’ 모태신앙이었던 윌러드는 악마들이 날뛰는 그 참혹한 전쟁터에서 믿음을 잃고 귀향한다.
고향에 돌아와보니 윌러드의 어머니는 여전히 주님을 믿고 주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고 있다. 믿음을 잃은 윌러드는 그 모든 것을 견딜 수 없다. 결국 고향을 등지고, 귀향길에 오하이오주 허름한 식당에서 첫눈에 반한 ‘샬럿’을 찾아 ‘오하이오강’을 건너 낯선 땅 노컴스티프에 정착한다. 그렇게 강을 건너 과거를 완전히 ‘망각’하고 새로운 삶을 얻고자 한다.
그러나 샬럿은 아빈을 낳고 얼마 안 돼 치명적인 암에 걸린다. 절망에 빠지고 무기력한 윌러드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기도는 반드시 응답받는다’는 복음주의로 귀환하지만 이번에는 광기 어린 기도가 돼버린다. 어린 아들 아빈을 꿇어앉히고 ‘더 큰소리로, 더 간절하게’ 기도하라고 어린 아들의 머리통을 사정없이 갈겨댄다.
절망 속에서 잡은 지푸라기는 광적인 기도였다. 그리고는 마침내 솔로몬 군도에서 일본군이 미군 병사를 산 채로 가죽을 벗겨 십자가에 못 박아 걸어놓은 것처럼, 외로운 아빈의 유일한 ‘베프’인 강아지를 산 채로 가죽을 벗겨 십자가에 매달아놓고 아내를 살려달라고 ‘피의 기도’에 매달린다.
당연히 하나님의 응답은 없고, 아내는 죽고, 윌러드도 자살한다. 이번에는 졸지에 고아가 되고 감당하기 힘든 마음의 상처를 입은 어린 아빈이 오하이오강을 건너 조부모가 살고 있는 웨스트버지니아 콜 크릭으로 간다.
거의 모든 신화에서 강은 이승과 저승의 경계로 상징된다. 유대인들의 요단강이나 우리나라의 ‘황천黃泉’이나 모두 강을 건너야 비로소 ‘저승’으로 들어가 영원한 안식을 얻는다. 강이 상징하는 의미는 이승의 모든 기억(좋든 나쁘든)들을 씻어 강물에 띄워 보내는 것이다.
그러나 저승(하데스)으로 가는 5개의 강을 그리스인들처럼 정교하게 배치한 신화는 찾기 어렵다. 5개의 강이 저승(하데스)을 감싸고 흐르고 있다. 아케론(Archeron)이라는 ‘비탄의 강’이 있고, 다음에 코키투스(Cocytus)라는 ‘통곡의 강’이 있고, 그다음에 플레게톤(Phlegethon)이라는 ‘불타는 강’이 있고, 그다음에 스틱스(Styx)라는 ‘증오의 강’을 건너서야 마지막 레테(Lethe)의 강인 망각의 강에 이르러 영원한 안식에 든다.
그리스 신화는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간다. 레테(망각)의 강 옆에는 작은 샘물이 있는데, 그 샘물이 ‘므네시모네(Mnesymone)의 샘’이다. 보통사람들은 레테의 강물을 마시고 모든 기억을 지우고 ‘리부팅(re-booting)’되지만 천재적인 예술가와 지혜를 간직한 자들은 이 특별한 샘물을 마시고 그 기억들을 간직한 채 새로 태어나게 한다는 기획이다.
아버지 윌러드나 그의 아들 아빈은 오하이오강을 건넜으면서도 그들이 건넌 강은 ‘레테(망각)’의 강이 아닌 ‘스틱스(절망)의 강’이었던 셈이다. 윌러드는 전쟁의 참상을 레테하지 못했고, 그의 아들 아빈은 아버지 윌러드의 광기를 강물에 씻어버리지 못했다.
이 영화는 레테(망각)해야 할 저주와 폭력은 심장에 므네모시네(박제)해 두고, 므네모시네(기억)해야 할 인간성과 구원의 가능성은 레테(망각)의 강에 던져버린 영혼들의 비극적 앙상블이다.
아빈은 전쟁의 트라우마에 시달리던 아버지가 그 숲속의 기도터에서 보여줬던 폭력과 자살이라는 또 다른 트라우마를 레테(망각)하지 못하고 고스란히 므네모시네(기억)한다. 아버지 윌러드와 마찬가지로 세상은 악으로 가득 차 있고, 폭력만이 자신과 가족을 지킬 수 있다는 강박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어쩌면 우리를 윌러드나 아빈처럼 ‘레테’와 ‘므네모시네’ 사이에서 방황하게 하고, 혹은 기억해야 할 것은 망각하고, 망각해야 할 것은 기억하게 하는 것은 푸코(Michel Foucault·1926~1984년)의 탁월한 분석처럼 권력자들이 우리의 기억까지 장악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권력은 대개 증오를 먹고 자란다. 많은 사람들이 과거의 원한을 레테의 강에서 씻고 물에 띄워 보내지 않고, 스틱스강에 머물러 증오심에 몸을 떨어야 그것이 자신의 권력기반이 된다. 그 증오의 대상은 ‘일본’이 되기도 하고 ‘빨갱이’가 되기도 하고 ‘미국’이 되기도 한다. 더 가까이는 ‘계엄·내란의 기억’이 되기도 하고 ‘전과 4범의 기억’이 되기도 한다.
프랑스 역사학자 피에르 노라(Pierre Nora·1931~2025년)는 그의 거대한 역작 「기억의 장소(Les Lieux de Memoire)」에서 국가(혹은 권력자)가 무엇인가를 맹렬하게 기억하라고 요구할 때, 그 이면에서는 ‘악마의 편집’을 통해 반드시 다른 기억들을 지워버리라고 요구하는 망각의 폭력이 일어난다는 불편한 진실을 폭로한다.
우리가 간직하고 있는 기억들은 ‘기억해야만 할 것을 기억하는’ 므네모시네의 기억일까, 아니면 스틱스강(증오)의 기억일까. 우리가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하는 것들이 혹시 누군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편집한 것들을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영화 제목처럼 사라지지 않는 악마들이 있다면 우리 기억을 폭력적으로 편집하는 그 악마들일지도 모르겠다. [본사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