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7.11 (토)

  • 구름많음동두천 31.8℃
  • 구름많음강릉 34.7℃
  • 구름많음서울 32.0℃
  • 구름많음대전 34.2℃
  • 맑음대구 36.1℃
  • 맑음울산 29.6℃
  • 맑음광주 33.8℃
  • 맑음부산 31.5℃
  • 맑음고창 33.5℃
  • 맑음제주 32.3℃
  • 구름많음강화 29.9℃
  • 구름많음보은 31.6℃
  • 구름많음금산 33.7℃
  • 맑음강진군 32.2℃
  • 맑음경주시 35.5℃
  • 맑음거제 32.6℃
기상청 제공
검색창 열기

[취재수첩] '순이삼촌'에서 '지슬', '한란', '내 이름은'까지 ... 침묵의 역사에서 공감의 역사로

 

제주4·3을 이야기하는 방식이 달라지고 있다.

 

오랫동안 제주4·3은 쉽게 말할 수 없는 역사였다. 생존자들은 침묵해야 했고, 유족들은 자신의 가족사를 드러내기 어려웠다. 영화계 역시 마찬가지였다. 국가폭력과 민간인 집단 희생이라는 무거운 주제는 투자와 흥행의 벽을 넘기 어려웠고, 제주4·3은 오랫동안 스크린 밖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이제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다.

 

지난 4일 넷플릭스 '오늘 대한민국 TOP10 영화'에서 제주4·3을 소재로 한 영화 '한란'이 1위에 올랐다. 지난해 극장 개봉 이후 국내외 영화제를 거쳐 글로벌 OTT 플랫폼에서도 대중의 선택을 받은 것이다.

 

단순한 흥행 성적을 넘어 제주4·3을 다룬 영화가 제주를 넘어 전국과 세계의 시청자들에게 다가가는 시대가 열렸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제주4·3을 영상으로 처음 본격적으로 알린 작품은 1989년 KBS TV문학관 '순이삼촌'이다. 현기영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국가폭력으로 삶이 무너진 제주 사람들의 이야기를 처음 영상으로 옮겼다. 당시만 해도 제주4·3은 공개적으로 이야기하기 어려운 시대였지만, '순이삼촌'은 제주 사회가 품고 있던 상처를 전국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1997년에는 조성봉 감독의 다큐멘터리 '레드 헌트'가 제작됐다. 제주4·3의 진실을 정면으로 다룬 장편 다큐멘터리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았지만, 당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상영과 배급 과정에서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었다.

 

제주4·3 영화의 전환점은 2013년이었다.

 

 

제주 출신 오멸 감독의 '지슬-끝나지 않은 세월2'는 토벌대를 피해 동굴로 숨어든 평범한 주민들의 삶을 흑백 화면에 담아냈다. 영웅도 거대한 이념도 아닌, 살아남기 위해 하루하루를 버텨야 했던 제주 사람들의 삶을 그려 깊은 울림을 남겼다.

 

'지슬'은 제29회 선댄스영화제 월드 시네마 극영화 부문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하며 한국 장편영화 최초의 기록을 세웠다. 제주에서 제작된 독립영화가 세계 영화계의 주목을 받으며 제주4·3을 국제사회에 알린 역사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같은 해 임흥순 감독의 다큐멘터리 '비념'은 제주4·3과 강정 해군기지 문제를 함께 조명하며 과거 국가폭력이 현재의 사회적 갈등과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보여줬다.

 

그러나 '지슬' 이후 제주4·3을 정면으로 다룬 장편 극영화는 한동안 나오지 못했다. 제주4·3은 한국 현대사의 대표적인 비극이지만 상업영화로 제작하기에는 투자 부담이 컸고, 흥행을 장담하기 어려운 소재라는 인식이 강했다.

 

그 공백을 메운 작품이 하명미 감독의 '한란'이다.

 

배우 김향기가 해녀이자 어머니인 '아진'을 연기하며 제주4·3 당시 토벌대를 피해 한라산으로 몸을 숨긴 뒤 어린 딸을 찾아 나서는 여정을 그렸다. 정치적 구호보다 가족을 지키려는 인간의 본능과 모성애를 중심에 둔 이 작품은 제주4·3을 보다 폭넓은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로 풀어냈다.

 

'한란'은 2025 아이치국제여성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됐고, 제14회 헬싱키 시네아시아영화제에도 초청됐다. 이어 지난 4일 넷플릭스 국내 영화 1위에 오르며 다시 한번 주목받고 있다.

 

올해는 또 하나의 의미 있는 작품도 관객들과 만났다.

 

정지영 감독의 '내 이름은'이다.

 

이 작품은 2020년 제주4·3평화재단과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JDC)가 공동으로 진행한 시나리오 공모 대상작에서 출발했다. 이후 투자난과 한국 영화산업 침체 속에서도 시민들의 후원과 영화진흥위원회의 제작 지원을 받아 완성됐다.

 

배우 염혜란, 신우빈, 박지빈 등이 출연한 '내 이름은'은 자신의 이름을 지우고 싶어 하는 18세 소년 영옥과 기억을 잃은 어머니 정순이 잊혀진 제주4·3의 진실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담았다. 영화 속 '이름 찾기'는 제주4·3의 올바른 이름을 되찾는 '정명(正名)'의 의미와도 맞닿아 있다.

 

개봉에 앞서 베를린국제영화제 포럼 부문에 공식 초청됐고, 우디네 극동영화제에서는 관객상을 수상했다. 국내에서도 누적 관객 21만 명을 돌파하며 작품성과 대중성을 함께 인정받고 있다.

 

영화는 사회적 관심도 이끌어냈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4월 15일 서울 용산 CGV에서 김혜경 여사와 함께 시민 165명과 영화 '내 이름은'을 관람했다. 대통령이 제주4·3을 소재로 한 영화를 일반 시민들과 함께 관람한 것은 제주4·3을 대한민국 모두가 함께 기억해야 할 역사로 바라보는 사회적 인식 변화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으로 평가됐다.

 

이 대통령은 관람 후 "제주4·3은 정말 잔혹한 사건이었다"며 "인간이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는가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고 말했다.

 

제주에서도 영화를 통해 제주4·3을 기억하려는 노력은 이어지고 있다.

 

제주4·3평화재단은 지난달 24일 제주돌문화공원 오백장군갤러리 공연장에서 제21회 제주포럼 부대행사로 '내 이름은' 특별상영회와 정지영 감독이 참여하는 감독과의 대화(GV)를 열었다.

 

해외 참가자와 국내 관람객, 도민, 관광객들이 함께 영화를 보며 제주4·3이 담고 있는 평화와 인권의 가치를 공유했고, 영어 자막도 제공돼 해외 참가자들의 이해를 도왔다.

 

임문철 제주4·3평화재단 이사장은 "영화 '내 이름은'은 이름 없이 사라져 간 사람들의 삶과 기억을 다시 불러내는 작품"이라며 "평화와 인권의 보편적 가치를 함께 생각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최근 제주4·3에 대한 사회적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2024년 말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제주4·3을 다룬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가 다시 주목받으면서 제주4·3의 역사와 기억에 대한 관심도 함께 커졌다.

 

현기영 작가는 생전 "3만 명의 희생자는 3만 개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말했다.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이어진 제주4·3으로 당시 제주 인구 약 30만 명 가운데 3만 명 안팎이 희생됐다. 그는 이 숫자를 단순한 통계가 아니라 이름과 얼굴, 가족과 삶을 가진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로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더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통해 제주4·3을 만나야 한다고 말했다.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화려한 휴가'와 '택시운전사'처럼 제주4·3 역시 다양한 영화로 기억이 이어져야 한다는 바람이었다.

 

'쉰들러 리스트'가 홀로코스트를, '호텔 르완다'가 르완다 집단학살을, '택시운전사'와 '화려한 휴가'가 5·18 민주화운동을 세계와 다음 세대에 알렸듯 제주4·3 역시 다양한 장르와 시선의 영화가 계속 만들어져야 한다.

 

영화는 역사를 가장 오래 기억하게 만드는 예술이다. 교과서보다 오래 남고, 숫자보다 깊게 다가가며, 기록보다 강한 공감을 만든다.

 

현기영 작가가 말했던 것처럼 아직도 스크린에 오르지 못한 수많은 삶이 남아 있다.

 

이제 제주4·3은 침묵의 역사가 아니라 영화를 통해 세계와 다음 세대에게 이어지는 기억의 역사로 나아가고 있다. [제이누리=이기택 기자]


추천 반대
추천
1명
100%
반대
0명
0%

총 1명 참여


배너
배너
프로필 사진

배너
배너

제이누리 데스크칼럼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실시간 댓글


제이누리 칼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