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례도 있다. 중국 북방의 어떤 지역의 주민들은 ‘기근으로 살 던 곳을 떠나 구걸한다’는 말을 대단히 금기시한다. 심지어 어떤 때에는 말만 듣고도 얼굴빛이 달라지기도 한다. 그런데 다른 지역에서 구걸하러 온 사람에게는 성심성의껏 접대한다. 마치 제집에 돌아온 것 같이 마음 편하게 대접한다. 그곳에 거주하는 모든 세대의 사람들은 모두 기근을 피하여 구걸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지에게 성대하게 대접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에 속했다.
현지사람처럼 똑 같이 대하기도 한다. 살아갈 만 하다는 듯이 차려입은 중년 남자가 문을 두드리지도 않고 자기 집처럼 농가 안으로 들어선다. 아무 것도 개의치 않는 듯이 큰 쌀 포대를 들고 주인에게 “돈 좀 버셨나요?”, “수확은 좋아요?”와 같은 길한 말을 건넨다. 인사를 나누는 셈이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땅에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말아 피우면서 주인의 ‘도움’을 기다린다.
주인은 웃으며 맞이하면서 불을 피우고 밥을 한다. 밥이 다 되면 한 가족을 돌보듯이 그릇과 접시를 나무 쟁반에 올려놓고 부엌 가운데에 차려서는 편안하게 밥을 먹을 수 있도록 해준다. 식사가 끝나면 진한 전차 한 사발을 마시게 하고 잎담배를 피운 후 다시 큰 사발로 쌀이나 밀가루를 담아서 건넨다.
어떤 때에는 일상적인 이야기를 늘어놓기도 하고 즐거웠던 이야기나 정겨웠던 시절의 이야기를 건네기도 한다. 한 고향 사람인 양 그렇게 편하게 얘기 나눈다. 판을 두드리며 노래하지도 않고 아이들이 떠들어대면서 뒤따르지도 않는다. 애걸하지도 않고 고맙다고도 하지 않는다. 강요하지도 않고 인색하지도 않는다.
그렇게 구걸하러 다니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서너너덧이 한패를 이루어 다닌다. 낮에는 흩어지고 밤에는 만나 농가의 곁채나 텃마당 판잣집에서 잠잔다. 그들은 현지 증명서를 가지고 다닌다. 위에 쓰여 있다 : 이 사람은 본 마을의 빈농 ×××로 그곳으로 구걸하러 가니 도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들은 도둑질도 하지 않고 강탈도 하지 않는다. 젊거나 힘이 있는 사람들은 현지 농가에서 수확이나 집고치는 것을 도와줄 수도 있다. 그들은 하루 이틀 구걸하면 마대 하나를 다 채운다. 그러면 부근 시장에 나아가 팔아서는 돈이나 식량 배급표로 바꾼 후 집으로 붙인다.
가끔은 ‘성대모사’하면서 시골로 내려가 구걸하기도 한다. 목표는 현금과 식량 배급표이다. 그들은 주로 이웃 성, 비교적 빈한한 섬서(陝西) 북쪽 신목(神木)이나 부곡(府谷), 감숙성 민근(民勤)현에서 온 사람들이다. 그 시골 지방은 구걸이 이미 풍속이 되었다. 그들이 구걸하는 지역의 주민들은 고향 사람인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광서(光緖) 초년에 상해의 광동성이나 광서성 출신 거지들이 전문적으로 현지에 살고 있는 동향인을 찾아가 구걸하는 일을 떠올리게 된다.
“이 사람들은 구걸하는데 대체로 공공 조계지의 북쪽 사천로, 천동로 일대에서 한다. 그 지역의 교민은 광동 출신이 많다. ……광동 거지들은 살피며 길을 따라 걸으며 용모를 보면서 광동인인지 살
피고, 말을 듣고서 광동인인지 살피며, 옷과 신발을 보면서 광동인인지 살핀 후 광동어를 하면 가서 구걸한다. 잠시 말을 건넨다. ‘나는 공과 같은 고향사람입니다. 직장을 잃어 여기에 왔습니다.
곤궁하게 되어 의지할 데가 없습니다. 도와주실 수 있으십니까? 구조 바랍니다.’ 수십 원을 주지 않으면 쫓아다니며 놓아주지 않는다.” 같은 처지, 동향의 정은 구걸하는 자본이 되고 보시하는 이유가 되었다. 이처럼 거지 근성은 얼마나 많은 구걸하는 잔재주로 변화했는지 알 수 있다.
다른 한 사례도 있다. 청나라 말기의 일이다.
“강소성의 회안, 서주, 회해 등 지역에 해마다 기근을 피하여 업으로 삼는 자 수백 명이 무리를 이루어 각 주현에서 구걸하였다. 인근 여러 성에서 구걸하는 사람 수는 광서 초년에 가장 많았다. ……관인이 있는 증명서를 들고 이르는 곳에서 반드시 관례에 따라 구제를 구했다. 한 마을에 이를 때마다 관리가 위에 관인을 찍고 다음 고장에서 구제하는 곳으로 삼았다. 그 사람들은 가을과 겨울에 구걸하고 봄이 되면 귀농하였다. 그 지방 사람들은 무뢰한 생원과 감생의 감언에 속아 자신들의 행동에 따라 지원하였다. 구제에서 얻은 것은 대부분 자신을 배불리는 데에 썼고 다른 사람들은 백분의 십일도 얻지 못하였다.”
원래 ‘증명서’를 발급받아 구걸하는 것은 현재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청나라 말기에 이미 유행하였다. 이처럼 ‘맹목적으로 이동해 들어온 사람’이 구걸하는 것은 오래 전에 이미 여러 지역의 습속이 되었다.
오늘날에 이르러 이러한 케케묵은 낡은 풍습이 다시 떠오르고 있다. 당대의 구걸하는 새로운 조류를 이루었다. 부랑자 근성도 현대 자회의 잠재적인 공공의 해악으로 확산되고 있다. 이 점은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경계를 늦춰서는 안 된다. 당초에 『열자·황제』에 ‘이때부터 범씨 문도는 길에서 거지와 마의를 만나며 감히 모욕을 주지 않았다’라는 기록에서 이미 거지 단체의 부랑자 근성이 중국민족의 문화 토양에 이식되었고 풍속 미담이 됐다면 오늘날에 파생된 나쁜 결과는 뚜렷해졌다.
중국은 협의(俠義) 정신을 숭상하는 전통심리를 가지고 있다. 사마천이 『사기』에 ‘유협열전’을 기술하였다. 유협정신도 부랑자 의식이 파생된 형태의 하나임에는 틀림없다. 역대로 ‘무협’, ‘유협’, 혹은 ‘강호 협객’으로 허풍 떨거나 높이 평가하여 전송한 자는 ‘유개 재주’가 적지 않다. 그 정신의 실질은 모두 부랑자 근성의 기본 궤적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 학사, 대만 국립 정치대학교 중문학과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자로 『선총원(沈從文) 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 『재미있는 한자풀이』, 『수달피 모자를 쓴 친구(선총원 단편선집)』, 『음식에 담겨있는 한중교류사』, 『십삼 왕조의 고도 낙양 고성 순례』, 『발자취-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가는 여정』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