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8.13 (목)

  • 맑음동두천 20.6℃
  • 맑음강릉 22.2℃
  • 맑음서울 23.3℃
  • 맑음대전 22.3℃
  • 맑음대구 23.5℃
  • 맑음울산 23.2℃
  • 구름많음광주 25.7℃
  • 구름많음부산 25.3℃
  • 구름많음고창 22.2℃
  • 구름많음제주 26.3℃
  • 맑음강화 21.8℃
  • 구름많음보은 19.8℃
  • 맑음금산 20.8℃
  • 흐림강진군 24.7℃
  • 구름많음경주시 23.0℃
  • 맑음거제 22.4℃
기상청 제공
검색창 열기

이권홍의 '중국, 중국인' ... 중국의 거지 (89) 거지와 중국문화(7)

중국민족의 저열한 근성의 상당 부분은 불량배(건달, 부랑자) 근성에 있다. 근대에 원세개(袁世凱)는 군주제를 회복시키려고 여론을 조장하였다. 민의를 유린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멋대로 행동하였다.

 

“민의가 군주제에 있다는 것을 꾸미려고 하였다. 가장 우스꽝스러운 것은 여자 청원단체가 부족하면 창기 청원단체를 만들었고 국민 청원이 부족하면 거지 청원단체를 만들었다.”

 

그것은 당시 원세개의 졸개 양(楊)모씨가 꾸며낸 익살극이었다. 그는 거지 두목에게는 100원을, 일반 거지에게는 1원을 대가로 주고 3일 동안 만여 명의 거지를 모은 후 원세개에게 황제에 오르라는 청원을 하였다. 당시 여러 청원서 중 가장 많은 사람이 서명하였다. 원세개도 거지 청원서에 앞쪽에 서명한 10명의 이름을 비밀 수첩에 기록해 두었다. 그리고 비서에게 전체 이름을 베껴 쓰게 한 후 비서실 탁자 위에 올려놓고서 ‘훗날 은혜를 베풀려고 준비하였다.’

나중에 주모자인 양 모씨가 털어놓은 적이 있다.

 

“내 그 거사는 고거육(顧巨六)이 운동한 기녀 청원단체보다도 백배가 많았소. 황상의 말과 표정을 살펴보니 기녀들은 성의 없이 아첨하니 거의 무시하는 것에 가까웠소. 그런데 거지들은 공민과 같은 계열이잖소. 조금 빈천할 뿐이지! 그리고 가난한 백성에게 고루 혜택을 준다는 미명도 얻을 수 있지 않소. 그래서 황상께서 내 거사를 중시하신 것이오. 나의 공로는 그야말로 황제의 마음에 들게 하는 거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을 예측한 거지요.”

 

 

그렇게 중국거지사에 근대 정치 추문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이런 사건은 어떻게 해서 생겨났을까? ‘유개(流丐) 잔재주’가 만들어낸 결과일 뿐만 아니라 중국인의 저열한 근성, 부랑자 근성이 만들어낸 필연이었다.

 

현실사회의 경제생활을 내려다보면 ‘유개 잔재주’, 부랑자 근성은 여전히 사회의 공적 해악으로 존재하고 있다. 어느 신문이 알아차렸다.

 

“우리가 사는 이곳에 나타난 양털에 흙이 섞이고 미음에 꿀을 섞으며 가짜 약, 가짜 담배, 갈취, 함정에 빠뜨리고 억압 착취, 사람을 죽이고 물건 뺏기 등 모두 자산계급 진영에 책임을 돌리기 어려울 듯 보인다. 그렇다면 누구의 책임인가? 마땅히 부랑자 ― 유민 ― 깡패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 계층은 노동을 싫어하고 생산에 종사하지 않으며 양심을 지키지 않고 규칙을 준수하지 않는다. 엥겔스는 그들을 ‘각 계급의 타락분자로 구성된 찌꺼기이다. 그들은 모든 가능한 동맹자 중에서 가장 나쁜 동맹자이다. 그런 방탕한 무리들은 쉽게 매수되고 가장 후안무치하다.’”1)

열거한 것 모두는 부랑자 근성이 주도하는 ‘유개 잔재주’이다.

 

몇 가지 부랑자 근성의 직관적인 사실을 보자. 산동성 담성(郯城)에 유명한 민간가요가 있다.

 

“3년 구걸하면 현의 관리 자리를 주어도 바꾸지 않는다.”

 

현지에 또 하나의 풍속이 있다.

 

“구걸하지 못하는 여자는 좋은 여자가 아니다.”

그곳에서는 거의 모든 가정의 여자들이 밖에 나가 구걸한다. 담성은 ‘거지의 고향’ 되었다.

 

담성 근교 소부(小阜)향에 10여 년 동안 여성 주임을 맡은 여인이 있었다. 남편은 회계사였다. 집안의 경제상황은 마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였다. 앞뜰과 뒤뜰로 구성돼 있고 새로운 기와집에 새로운 가구를 들여놓았다. 햇빛도 잘 들고 수목화초가 심어져 있다. 집안에는 라디오, 녹음기, 소파, 재봉틀을 갖추었다. 그런데도 그는 한 무리의 여자를 이끌고 밖에 나가 구걸하였다. 그는 피하지도 않고 공공연히 말했다.

 

“간부를 맡은들 내게 무슨 이로움이 있겠는가? 간부가 되는 것보다 거지가 되는 것이 좋다. 거지 3년이면 현의 관리 머리 위에 앉는다!”

 

사실, 중국에서 이러한 ‘거지의 고향’이 어디 담성 하나뿐이겠는가.

 

A시 민정국은 1983년 여름 한 차례에 그 현의 B향으로 ‘맹목적으로 이동해 들어온 시골사람’ 43명을 돌려보냈다. 그곳 사람들은 구걸하는 것을 피곤하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즐거워했다. 체면을 잃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아가씨가 상대를 고를 때 상대방이 구걸을 할 줄 아느냐가 표준이 되었다.

 

현지에 심란하(沈蘭霞)라는 이름을 가진 중년 부인이 있었다. 부부 둘에 자식 둘, 네 식구는 괜찮게 살았다. 그런데도 겨울철 농한기에 남자는 집을 지키고 여자는 자식 두 명 이외에 막 방학한 조카딸도 함께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손에는 가짜 증명서를 들고 눈물을 뿌리면서 농사를 짓는데 물난리가 나서 곡식 한 톨 수확하지 못했다고 거짓말하며 유개차에 올라 타 심양까지 구걸하고 다녔다.

 

사실은 어떤가? 쌀 3천여 근을 수확하였다. 그렇게 일주일 만에 200여 원을 구걸하였다. 몇 년 동안 그녀는 3천여 원을 구걸해 고향에 방이 여섯이 달린 기와집을 지었다. 그녀는 말했다.

 

“결국 집안에 앉아 공밥을 먹을 수는 없는 거지요. 내 코 밑에 또 입이 하나 달려 있잖아요.”

거지란 돈을 버는 또 하나의 직업이라는 말이다.

 

감숙(甘肅)성 영등(永登)현 설가만(薛家灣)촌에 거주하는 주민은 백여 가구다. 40년 전에 그곳 사람들은 대부분 서너너덧이 한패가 되어 여러 해를 계속 사방으로 다니며 병을 고치고 재앙을 막아주는 점을 쳐 주면서 구걸하였다. 그들의 풍속습관은 유럽 유랑민족 ― 집시와 비슷한 점이 많다. 지극히 특수한 민간 직업 집단을 형성하고 있다.

 

학자들이 조사하면서 찾아낸 점은 이렇다. ‘설가만 주민’은 거지를 대단히 친하게 대한다. 걸식하러 찾아온 자에게는 결코 빈손으로 돌아가게 하지 않았다. 남은 밥이나 식은 국을 주지도 않는다. 식사 시간에 오면 거지에게 들어오라고 해서 같이 먹었다. 평상시에는 찐빵이나 국수를 대접하였다. 그들은 스스로 말한다.

 

“우리도 집을 떠나온 사람들이다. 집을 떠나온 사람들의 어려움을 잘 안다.”

같은 운명이라는 심리 결과다. 이른바 ‘공동 운명’이라는 의식의 작용이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1)『광명일보(光明日報)』 주관 「문적보(文摘報)」 1988년 11월 27일 제3판, 원문 『경제학주보(經濟學週報)』 1988년 11월 20일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 학사, 대만 국립 정치대학교 중문학과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자로 『선총원(沈從文) 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 『재미있는 한자풀이』, 『수달피 모자를 쓴 친구(선총원 단편선집)』, 『음식에 담겨있는 한중교류사』, 『십삼 왕조의 고도 낙양 고성 순례』, 『발자취-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가는 여정』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추천 반대
추천
2명
100%
반대
0명
0%

총 2명 참여


배너
배너

관련기사

더보기
93건의 관련기사 더보기

배너
배너

제이누리 데스크칼럼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실시간 댓글


제이누리 칼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