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기운이 완연한 지금, 오늘 하루는 다섯 날을 쉼 없이 산 당신을 위한 시간입니다. 여유로운 주말, 시 한 편의 여유를 선사합니다. 당신의 주말을 위하여. 매주말 허유미 시인이 전하는 '잠시의 여유'를 전합니다. [편집자 주]
여름비
허유미
할머니 잇몸으로 수박 반 통 잡수시고
밤새 수국 같은 요강에 오줌을 계속 누셨네
오늘 빗소리처럼
나비잠 자겠네
요즘 제주에는 수국이 한창이다. 비를 머금은 수국들은 섬의 여름을 깊고 푸르게 만든다. 제주 수국은 유난히 크다. 축구공만 하기도 하고 수박만 하기도 하다. 나는 가끔 담장 밖으로 늘어진 수국을 수박 들 듯 두 팔로 안아 들곤 했다. 할머니 집 앞 수국도 그랬다. 마루 구석에 요강처럼 크고 둥글게 피어 있었다.
‘수국 같은 요강’이라는 표현은 여기서 비롯되었다. 할머니는 여름이면 이가 없어도 잇몸으로 수박을 오래 드셨고, 밤에는 몇 번씩 일어나 요강을 찾으셨다. 어린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두 팔 벌려 잠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한 사람의 늙어가는 몸이 내는 소리였지만, 그때의 내게는 아득하고 편안한 인기척이었다.
이제는 할머니가 안 계신다. 그런데 여름비가 내리면 오래전 그 소리가 다시 들려오는 듯하다. 빗소리는 지나간 시간을 데려오고, 사람은 떠난 뒤에도 소리로 남았다.
사람과 함께 산다는 것은 서로의 소리를 기억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방문 여닫는 소리, 부엌에서 국 끓는 소리, 밤중의 기침 소리 같은 사소한 기척들. 함께 살 때는 미처 귀 기울이지 못했던 소리들이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한 사람의 존재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점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는 삶 속에서, 여름비는 오래전 곁에 있던 사람의 체온과 인기척을 다시 데려오는 소리다. 여러분의 마음에는 어떤 여름비가 내리고 있습니까?
☞허유미는?=제주 바닷가 마을 모슬포에서 태어났다. 수평선, 물너울, 등대, 섬은 나의 첫 친구들이었다. 말문이 트였을 때 엄마라는 말보다 바다라는 말을 많이 했다. 물질하는 엄마를 기다리는 동안 바다는 파란 요람, 파란 집, 파란 놀이터였다.
청소년 시절 유난히 말수가 적어 엄마 아빠가 걱정했다. 말수가 적은 대신 사람들의 말을 많이 듣고 남들이 쉽게 지나치는 풍경이나 사물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 시절부터 시집을 읽는 시간이 많았다. 책꽂이에 시집이 많아지면서 시인이 되겠다는 꿈을 갖고 국문학과에 진학했다.
2016년 제주작가 신인상, 2019 서정시학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우리 어멍은 해녀」, 「바다는 누가 올려다보나」. 한국작가회의 회원, 제주작가회의 회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