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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장미의 이름⑥
흄 “이성은 감정의 노예” ... 율곡 “감정 후 이성 뒤따라”
인간 움직이는 동력은 감정 ... 대통령 이스라엘 발언 논쟁

영화가 진행되면서 수도원 연쇄살인 사건의 ‘범행동기’는 어이없게도 ‘웃음’이었다는 것이 서서히 밝혀진다. 수도원의 장서관藏書館을 관리하는 호르헤 수도사는 장서관 가장 깊은 곳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2권(희극편)에 독을 발라 봉인해 놓고, 이 문헌을 읽은 자들은 모두 죽게 만든다. 손가락에 침을 발라 책장을 넘기며 읽으면 독극물에 노출되는 기발한 살인방법이다.

 


수사망을 좁혀가던 윌리엄은 마침내 호르헤 도서관장이 만들어놓은 미로를 헤치고 「시학」이 봉인돼 있는 장서관 가장 깊은 곳까지 도달한다. 그곳에는 이미 호르헤가 마지막 관문처럼 버티고 있다. 호르헤는 문제의 「시학」 제2권을 죽어도 못 내놓겠다는 듯 품에 부둥켜안고 있다. 여기에서 윌리엄과 호르헤의 웃음을 둘러싼 황당한 논쟁이 벌어진다.

웃음이란 의도적인 ‘비웃음’이나 썰렁개그를 시전하는 부장님 앞에서 가차 없는 리액션으로 날려주는 폭발적인 웃음을 제외한다면 지극히 본능적이고 비이성적인 인간의 반응이다. 윌리엄과 호르헤는 그 비이성적이고 자연발생적인 반응을 놓고 치열하게 ‘이성적’인 논쟁을 벌인다.

이성으로 재단할 수 없는 문제를 이성으로 재단하려 든다. 호르헤는 웃음이라는 것을 금지하고 싶고, 윌리엄은 그것을 허용하고 싶다. 그들은 상반된 자신들의 ‘욕구’라는 ‘감정’을 온갖 이성적인 이유들로 포장해 합리화하려 든다.

호르헤: “우리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자. 웃음은 신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잊게 하기도 하고, 그런 두려움을 아예 없애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웃음이란 금지하고 제거해야 마땅한 마약이고 독극물과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모든 것을 떠나 웃는 인간의 얼굴 ‘꼬라지’는 딱 원숭이다. 이건 인간을 창조한 신을 모독하는 신성모독이다.”

윌리엄: “좋다. 이성적으로 생각해보자. 웃음은 인간의 한계를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알아야 신에게 의탁한다. 그러니 허용해도 좋은 것이며, 우리를 웃게 해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도 금서가 돼야 할 이유가 없다.”

호르헤: “미친 소리! 당신도 하나님을 모시는 수도사이니 잘 알 것 아닌가. 성경에서 하나님의 분신인 예수님이 웃었다는 기록이나 웃으라고 했던 말씀이 어느 한 곳에라도 있는가. 제발 좀 이성적으로 생각하자.”

 


윌리엄: “그렇다면 예수님이 웃지 않았다는 기록이나 웃어서는 안 된다고 하신 기록은 있는가. 예수님이 특별히 금지하지 않은 일들은 모두 예수님이 허락하신 일이 아니겠는가. 당신이야말로 이성적으로 생각하라.”

이쯤 되면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자 수도사인 이들의 진지한 논쟁이 만담꾼 2명이 주거니 받거니 하는 ‘만담漫談’이나 미국인들이 즐기는 ‘스탠딩 코미디’가 돼버린다. 영국의 철학자이자 역사학자, 경제학자로 움베르토 에코 못지않은 ‘걸어다니는 도서관’이라 할 만했던 데이비드 흄(David Humeㆍ1711~1776년)이 이 논쟁을 지켜봤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문득 궁금해진다. 

흄은 “이성(Reason)은 감정(Passion)의 노예”라는 유명한 명제를 남긴 인물이다. 그의 대표작인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A Treaties of Human Natureㆍ1739년)」 제3권에서 그는 “이성은 감정의 노예이며, 또한 오직 그래야만 한다(Reason is, and ought only to be the slave of the passions)”고 인간 본성을 결론 짓는다. 

흄은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실제 동력(Motivation)은 항상 ‘감정(passion)’이지 이성은 아니며, 이성은 자신의 감정을 합리화하는 장치에 불과하다고 믿는다. 이성이 감정의 영역을 침범하려 할 때 발생하는 오만을 경계해서 ‘이성은 오직 감정의 노예여야만 한다’고 이성과 감정의 서열에 대못을 박는다.

‘이성은 감정의 노예’라는 흄의 논지는 이율곡李栗谷의 ‘기발리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의 표절이거나, 영어로 번역해놓은 것처럼 빼닮아서 놀랍다. 기발리승일도설은 인간이란 ‘감정(氣)’이 급발진하듯 먼저 뛰어 나가고 ‘이성(理)’은 그 뒤를 따르며 감정을 합리화하면서 감정과 ‘한길(一途)’로 간다는 뜻이다. 율곡도 흄처럼 결코 이성이 감정 위에 올라타서 감정을 이끌고 가지 못한다고 봤다. 

윌리엄과 호르헤의 논쟁은 겉보기에는 호르헤의 고결한 신앙심과 윌리엄의 냉철한 기호학이라는 이성의 대결처럼 보이지만, 그 밑바닥에 자리 잡은 동력은 지극히 감정적이다.

호르헤가 수도사들을 죽여가면서까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감추려 했던 것은 변화를 두려워하는 ‘공포’란 감정이었고, 윌리엄이 「시학」을 찾기 위해 목숨을 걸고 나선 동력도 결국은 미지의 것을 밝혀내려는 ‘지적인 허영’이라는 감정이었다.

윌리엄과 호르헤 모두 자신의 감정이 시키는 대로 이성을 ‘노예’처럼 부려 ‘논리’를 만들어내고 있을 뿐이다. 두 사람 모두 이성의 힘으로 감정을 통제하고 감정이 치닫는 길을 바꾸지는 못한다.

 


며칠 전 대통령이 조금은 ‘열 받아 급발진’한 듯, 이례적으로 ‘이란 전쟁’이 터지자 떡 본 김에 제사 지내는 것처럼 레바논을 무차별 폭격해대는 이스라엘을 향해 비판을 넘어 거의 비난을 퍼부어서 설왕설래가 계속된다.

물론 대통령이 이스라엘을 ‘비난’하는 ‘반인권적’ ‘국제법 위반’이란 이성적인 이유가 따라붙긴 한다. 하지만 어쩌면 그런 이유들 데는 이 이란 전쟁 탓에 대통령이 노심초사하는 ‘민생’과 ‘경제’가 위기를 맞아 ‘화(감정)’가 난 것을 포장하는 수사修辭일지 모르겠다. 

근거 없는 ‘선민의식’ 중독 환자 같은 이스라엘이 한국 대통령에게 욕먹고 화(감정)난 것은 충분히 이해하겠는데, 우리 내부에서 또 다른 진영싸움으로 비화되는 것은 어리둥절하다.

대통령에게 반대하는 진영에서는 “북한 인권에는 한마디도 못하고, 중국에는 ‘쎼쎼’하면서 우리 우방국 잘못만 지적하냐” “대통령이 문제 삼은 동영상은 2년 전의 것” “할 말 있으면 외교부가 해야지 왜 대통령이 나서냐” 등등의 논리로 비판한다. 이 역시 흄이나 이율곡 식으로 독해하면 대통령이 하는 일은 모두 싫다는 자신들의 감정을 이성적으로 보이게 만들려는 ‘수사’에 불과한지도 모르겠다.  [본사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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