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백(小栢) 안달삼(安達三 : 1837~1886)
자는 행오(行五), 호는 소백(小栢), 본관은 죽산(竹山)이다. 조천읍 조천리에서 태어나 영주10경을 처음 품제한 매계(梅溪) 이한우(李漢雨)에게 한문을 배운 전남 장성에 살고 있던 호남의 명유(名儒) 노사 기정진(奇正鎭:1798년~1879년)의 문하에서 배웠다. 그런데, 스승으로부터 “경학(經學)에 밝고 경술(經術)을 숭상한 탐라의 선비”라고 극찬 받았다. 그리고 당대 ‘도덕과 학문을 겸비한 선비’로 명성이 나 모든 사람들이 그를 안처사라 일컬었다고 한다.
1883년 10월 승보초시(陞補初試)에 합격하였다. 해은(海隱) 김희정(金羲正)과도 교류가 깊었으며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이 제주로 유배왔을 때 적려(謫廬)를 출입하며 교분을 쌓았고, 면암 선생의 학풍을 제주에 알렸다.
아들인 병택(秉宅)을 전남 장성으로 이사시켜 노사의 문하에서 배우게 하였으며, 병택은 노사의 적전(嫡傳)이 되었다. 그의 학문이 아들 에게 이어져 제주의 한학수준을 높여주는데 커다란 영향을 주게 된 것이다.
한편, 그의 호 소백은 노사의 문하에서 공부하고 고향인 제주로 돌아올 때 스승이 잣나무 한 그루를 주자 기념으로 집안에 심은 것을 기념하여 소백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생전에 지은 글이 많겠지만, 모두 일실되었고 다음의 만사(輓詞-吳文福 編繹, 『瀛洲風雅』, 月刊 書藝文人畵, 2006, 155쪽) 한 편만이 전할 뿐이다.
輓友
光陰四十載 友也去者半
雖曰世溷濁 泉坮可同換
自君趍庭日 擬與金共斷
靜居如溫玉 進處有氣岸
何斯有斯疾 无妄不足憚
而我將北征 相顧十把腕
洛城怪哉夢 春宵不覺汗
夢乎旣不虛 今又少一伴
焉有後凋期 到此歲寒看
以子之德器 以子好才榦
不用人間世 何處更容觀
從今醫莫說 世無回生散
嗟爾無情菊 有酒誰與玩
皎皎雲間月 何心照庭畔
爲君無限恨 欲說心緖亂
逝者應有靈 知我今日歎
벗을 보내며
사십 년 세월 흐르고 보니
벗들은 태반이 떠나갔구나
비록 세상이 혼탁하다 하지만
저승과 바꿀 수야 있겠는가
그대가 아버님께 글을 배우던 날
아주 친한 친구가 되었지
평소 생활에서는 온옥과 같았고
나아가 처신할 땐 고아한 기상이 있었네
어찌 그대에게 이러한 병이 있었는지
뜻밖이라 어리둥절하기만
내가 서울로 떠나려할 때
열 발 밖에서 서로가 돌아보았는데
낙양에서 나의 꿈이 괴상하여라
봄밤인데도 땀이 번졌으니
그 꿈이 거짓이 아니어서
지금 또 한 친구를 잃었구나
맨 마지막에 시들자고 약속했는데
이에 겨울을 만나다니
그대의 덕망과 기량이여
그대의 좋은 재주와 능간이여
이 세상에서 쓰여지지 못하였으니
어디서 다시 그 얼굴 보리
지금부터 의원들은 말하지 마라
세상에는 회생하고 흩어짐이 없나니
아! 무정한 저 국화야
술이 있은들 누구와 같이 보랴
밝고 밝은 구름 사이 저 달은
무슨 심보로 이 뜰을 비추는가
그대를 위한 한탄 끝이 없어서
말을 계속하고자 하나 마음이 어지러워
떠나간 벗이여 영혼이 있어서
나의 오늘 한탄을 알기나 하는가
글=백종진/ 제주문화원 문화기획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