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6월 10일.
전두환 군사정권에 맞서 거리로 쏟아져 나온 시민들은 대통령을 직접 뽑을 권리를 요구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이한열 열사 최루탄 피격 사건은 국민적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결국 6·29 선언과 직선제 개헌이라는 역사적 변화를 만들어냈다.
올해는 6·10 민주항쟁 39주년이다. 39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민주주의를 얼마나 이뤄냈을까.
겉으로 보면 많은 것이 달라졌다. 제주도민들은 도지사와 교육감을 직접 선출하고, 지방의원을 뽑는다. 지방자치가 정착됐고 주민참여예산제와 공론화 제도도 도입됐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선거를 치르는 것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선거가 공정하게 운영되고, 시민들이 정치 과정을 신뢰하며 정책 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있어야 비로소 민주주의는 살아 움직인다.
그런 점에서 최근 제주사회에서 벌어진 일들은 적지 않은 질문을 던진다.
이번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치러진 더불어민주당 제주도지사 경선은 민주주의의 민낯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였다.
22년 만에 결선투표가 성사되며 전국적 관심을 모았지만 결과보다 과정이 더 큰 논란이 됐다.
결선 과정에서는 '권리당원이 아니라고 답하면 일반 여론조사에도 참여할 수 있다'는 취지의 이른바 '1인 2투표' 유도 의혹이 불거졌다. 처음에는 특정 캠프의 문제로 제기됐지만 곧 상대 캠프 관계자 역시 유사한 방식의 투표 독려를 한 사실이 드러났다. 정치적 공방은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남은 것은 경선 시스템에 대한 불신이었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승패가 아니라 룰이다. 승자가 누구인지보다 과정이 공정했는지가 더 중요하다.
제주시 오라동 도의원 경선 과정에서 불거진 유령당원·위장전입 의혹 역시 마찬가지다. 마을 주민들은 특정 선거구 권리당원 비율이 비정상적으로 높다며 문제를 제기했고 실제로 민주당은 과거 동일 주소지에 다수 당원이 등록된 사례를 적발해 징계한 전력이 있다.
사실 여부와는 별개로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자산인 정치적 신뢰가 흔들리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투표율 역시 민주주의의 또 다른 경고등이다. 이번 제주지역 지방선거 최종 투표율은 56.4%다. 전국 최하위권 수준이다. 2018년 지방선거 당시 65.9%와 비교하면 크게 낮아진 수치다. 정치에 대한 관심보다 무관심이 커지고 있다는 의미다.
민주주의는 시민 참여가 전제될 때만 작동한다. 투표장에 가지 않는 시민이 늘어난다는 것은 민주주의의 형식은 유지되지만 내용은 점차 비어가고 있다는 신호일 수 있다.
선거가 끝난 뒤에는 또 다른 문제가 불거졌다.
전국 곳곳에서 발생한 투표용지 부족 사태다. 일부 유권자들은 투표를 포기하고 돌아갔고, 일부는 출구조사 결과가 공개된 뒤에야 투표를 하게 되는 초유의 상황이 벌어졌다. 제주에서도 대학생과 시민사회단체, 정치권이 한목소리로 진상규명과 제도 개선을 요구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참정권은 가장 기본적인 권리다.
그 기본조차 제대로 보장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이번 사태는 단순한 행정 실수가 아니라 민주주의 시스템에 대한 경고로 읽힌다.
물론 제주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오히려 제2공항 논란은 민주주의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위성곤 제주도지사 당선인은 제2공항 문제에 대해 철저한 검증과 정보 공개, 숙의 과정을 약속했고 사회적 합의가 어려울 경우 주민투표나 공론조사를 통해 도민이 결정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중요한 것은 찬성과 반대 어느 쪽의 승리가 아니다. 결정 과정에 시민이 참여하고 결과를 수용할 수 있는 절차적 정당성이다. 1987년 시민들이 외쳤던 민주주의 역시 특정 정책이 아니라 국민이 주인이 되는 정치 구조였다.
제주는 또 하나의 특별한 민주주의 역사를 갖고 있다. 바로 제주4·3이다.
수많은 민간인이 국가폭력으로 희생됐고 진실은 오랫동안 침묵 속에 묻혀 있었다. 4·3의 진실 규명 과정은 곧 민주주의 회복 과정이었다. 국가를 비판할 자유와 진실을 말할 자유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명예회복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래서 제주에서 6월항쟁과 4·3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는 독재에 맞선 시민의 역사였고, 다른 하나는 국가폭력에 맞선 진실의 역사였다.
두 역사는 결국 민주주의라는 하나의 가치로 만난다.
39년 전 시민들은 최루탄 속에서 민주주의를 외쳤다. 그리고 지금 제주 민주주의는 또 다른 질문 앞에 서 있다.
경선은 공정한가, 정치는 신뢰받고 있는가, 행정은 충분히 공개되고 있는가, 시민은 정책 결정 과정에 참여하고 있는가.
민주주의는 완성형이 아니다.
1987년 6월 거리에서 시작된 민주주의는 지금도 진행형이다. 6월항쟁 39주년을 맞은 오늘,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과거가 아니다.
"제주의 민주주의는 지금 어디까지 와 있는가." 그리고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어디까지 발전시킬 준비가 되어 있는가." [제이누리=이기택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