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인희의 작품 세계, 얽힘과 설킴의 아름다움
예술은 화가 자신의 정신세계의 표현이라고 헤겔은 말한다. 그 예술을 담아낸 것이 바로 작품이라면, 그 작품은 화가의 영혼이 담긴 하나의 파일과 같다. 그래서 곶자왈은 곧 서인희가 영혼으로 만든 자연 정원이인 것이며, 그 곳 자연의 이름다움에서 그의 정신세계가 빛나는 것이다.
서인희 작품에는 제주 풍토에서 나오는 강렬한 색, 자연환경이 만든 얽키고 설킨 넝굴의 선, 양치류 식물들의 아름다운 질서, 하늘을 향해 자유로운 해방감을 발산하는 나무, 마소의 방목(放牧)을 관리하기 위해 쌓은 곶담(고자왈의 돌담)의 정겨운 형상, 곶자왈에 무질서가 오히려 아름다운 질서가 되는 느낌 등은 돌과 식물이 오랜 시간에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면서 생성한 자연 형상들이 있다.
그래서 서인희의 곶자왈에서는 공간이 곶자왈을 만든 것이 아니라 곶자왈의 식물이나 사물 형상들이 공간을 만들었기 때문에 화가의 영혼이 그 정원을 걸어간다고 말할 수 있다. 주어진 공간에 그대로 주어진 자연이라고 생각한다면, 작품이 예술가의 정신세계의 산물이라고 말하기가 어렵다. 결국 예술가의 해석이란 자연을 대하는 화가 자신의 삶 전체에서 나오는 존재의 울림이었다는 것이 타당한 평가이다.
<유기적 순환>은 오래된 돌담과 그 위에 세월이 이룬 넝쿨 식물들의 하모니를 보여준다. 청색의 하늘은 변화무쌍한 하늘의 기후를 보여주고, 오랜 돌담, 아마도 잣담이나 캣담으로 는 보이는 마소 관리용 돌담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 돌담을 감싸 안은 듯 잎사귀가 떨어져 버린 칡넝쿨이 고리처럼 돌담을 싸고 있다. 줄기(선), 돌담(괴체:덩어리), 하늘(암시)은 겨울로 접어둔 곶자왈의 상황을 말하고 있다.
<얽힌 희망의 숲> 곶자왈에 옛사람이 다니던 길은 없다. 곶아왈에서는 여름 한 개절이면 공간을 뒤덮어버린다. 넝쿨은 리좀(Rhizome)으로 사방에 번지면서 서로를 연결시켜 하늘을 가려 버린다. 리좀은 가지가 흙에 닿는 순간부터 뿌리가 내려 줄기가 나는 지피식물에서 착안한 철학개념인데 중심이나 시작이 없고, 시작과 끝이 분명하지 않으며, 어느 지점에서든 자라나고 끊어져 다시 자랄 수 있어 특정 중심이나 주체가 거부되는 전복적인 개념으로 현실 세계의 복잡성을 설명하는데 매우 유용하다.
<켜켜이 쌓은 생명의 흔적>은 돌담가 넝쿨, 나무가 섞여 얼핏 어지러운 상황인 것처첨 보이지만 조금 천천히 들여다보면 식물의 신기함을 볼 수 있다. 어느 것 하나 겹쳐서 힘겹게 견디는 줄기나 가지가 없다. 식물은 어떤 식으로는 작은 틈이라도 만들어 광합성 작용으로 생명을 유지하려고 애쓴다. 나무가 흙에서 자라지만 아름드리 나무도 그것의 성장은 흙이 아니라 물과 산소와 이산화탄소가 전부였다는 것을 알면 놀라게 된다. 식물들은 복잡하게 얽혀있지만 서로를 침범하지 않고 상생하여 공존하고 있다.
<겨울의 기억>은 나무가지가 거꾸로로 늘어진 선들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다. 버드나무같이 원래 나무의 속성이 아니라 바람 많은 환경이 나무의 속성을 바꿔버린 경우이다. 매우 역동적인 선묘들이 땅을 향하고 있다.
<계절은 끝내 꽃을 품는다>는 겨울 동백을 그린 작품이다. 온 화면은 청색으로 채워지고 어렴풋이 잎사귀 선묘 사이에 붉은 동백 꽃망울이 군데군데 피어 있어 시각적으로 더욱 붉게 느끼게 한다. 색의 대비가 아름다운 매력 있는 작품이다.
<겨울 흔적>은 곶자왈에 가장 흔한 양치식물인 고사리 잎의 패턴이 아름다운 작품이다. 고사리 잎 위에 살짝 하얀 눈이 내려앉아 형태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한 작품이다. 동일계통의 색에서는 형태가 잘 보이지 않지만 흰 눈이 내림으로써 고사리의 새로운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는 작품이다.
<겨울 속 꺼지지 않는 생명>은 한겨울인데도 푸른 식물이 자라나는 것을 보고 생태의 강인함을 표현한 작품이다. 곶자왈은 식물이 보라(寶庫)고 할 만큼 아열대 종들이 섞여 있어서 겨울에도 푸른 잎을 볼 수 있는 식물들이 많다. 한라산이나 산악을 제외하고는 영하로 내려가는 날이 드물며, 대체로 겨울 온도가 섭씨 1도~5도여서 겨울 무나 배추도 파랗게 자라나 제주도 방문자들은 놀라게 한다.
서인희의 목판화 작업은 마치 회화 작업의 사전 준비작업으로 보인다. 판화로 회화의 느낌을 보여주어서 그런지, 아니면 판화의 재료가 목판을 선택해서 그런지 차가운 느낌보다는 정갈하면서 절제된 느낌을 주고 있다. 서인희 판화는 선묘의 미학이 잘 드러나는 데 동양화의 철선묘(鐵線描)적인 단정함과 예리함이 깃들어 있다.
서인희 판화는 회화와는 달리 모노크롬의 대비적인 효과 때문에 직선이 주는 맛이 강렬하고 단색의 바탕색이 오히려 식물 줄기들의 속도감을 강화해줌으로써 판화는 맞지만. 점점 회화의 영역으로 옮겨가는 전조를 보여주고 있다. 바이오필리아가 판화에서 준비되는 과정이라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서인희의 바이오필리아(생명 사랑)는 곶자왈의 생태에서 생명의 아름다움을 찾아가는 장인의 굴기(屈起) 정신으로 표현한 작품들이다. 특히 얽힘과 설킴은 곶자왈의 특성 가운데 겨울이면 더욱 잘 드러나는 식물들의 생태의 모습인 나무와 넝쿨의 구조라고 할 수 있는 가지와 줄기의 하모니를 주제로 삼고 있다.
물론 목판화 작업에서도 얽힘과 설킴을 보여주었지만, 거기에서는 정리되고 관리되는 작업 패턴을 보여주었다. 자연에서와 달리 인간 세상에서 얽힘과 설킴은 사건으로 연결돼 결말이 험악하게 끝나기도 한다.
그러나 자연에서의 얽힘과 설킴은 그 관계도 다른데 서로서로 누르지 않고, 조금이라도 부딪치지 않게 피하면서 각자 살길을 모색하는 걸 보면, 비로소 얽힘과 설킴이 왜 아름다운 관계가 되는지 생명 사랑의 교훈을 깨닫게 한다.
작가의 말대로 자신이 곶자왈을 걸을 때마다 행복한 희열을 느끼는 것은 세상살이에서 맺힌 가슴을 자연이 풀어주기 때문에 편안하다고 했다. 자연은 분명 인간이 모르는 생명 사랑의 비밀을 가지고 있다. 우리 인간이 바로 자연에 근원을 두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자연 앞에만 서면 스스로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바이오필리아는 가르쳐 주고 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김유정은?
= 최남단 제주 모슬포 출생이다. 제주대 미술교육과를 나와 부산대에서 예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술평론가(한국미술평론가협회), 제주문화연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제주의 무신도(2000)』, 『아름다운 제주 석상 동자석(2003)』, 『제주의 무덤(2007)』, 『제주 풍토와 무덤』, 『제주의 돌문화(2012)』, 『제주의 산담(2015)』, 『제주 돌담(2015)』. 『제주도 해양문화읽기(2017)』, 『제주도 동자석 연구(2020)』, 『제주도 산담연구(2021)』, 『제주도 풍토와 문화(2022)』, 『제주 돌담의 구조와 형태·미학(2022)』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