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라의 맛 ... 세월의 맛

  • 등록 2026.05.08 15:30:37
크게보기

[한 편의 시, 그리고 잠시](3) 소라 맛 보려면 ... 세월의 한잔

봄 기운이 완연한 지금, 오늘 하루는 다섯 날을 쉼 없이 산 당신을 위한 시간입니다. 여유로운 주말, 시 한 편의 여유를 선사합니다. 당신의 주말을 위하여. 매주말 허유미 시인이 전하는 '잠시의 여유'를 전합니다. [편집자 주]
 

 

소라 맛 보려면

허유미

 

소라 맛을 보러왔다가

술 한 잔 먹고 소라 몇 번 씹고

소라 맛 좋네 하는 손님에게 엄마는 말했다

 

고추 맛을 보려면 수백 개의 해와

수백 개의 달과 수만 개의 빗방울을 생각한 다음에야

아삭한 고추 맛을 아는데

소라 맛을 보려면 마라도 끝에서부터 오는 물살과

수십 번의 숨비소리를 생각한 다음 먹어야

소라의 고소함을 알 수 있어요

 

아주메 소라 맛 알다가 세월 끝나면 어쩌요

 

소라 잡다 세월 끝나는 사람도 있으니

소라 맛 알다 세월 끝나는 사람도 있어야지요

소라 팔며 자식 키우다 세월 끝나는 부모가 있으면

부모 맘 알려고 세월 끝나는 자식도 있을 테고요

오늘 먹은 소라가 세월 끝 바라보는

여든 할머니가 잡은 소라예요

 

나를 힐끔 돌아보지 않고

해녀 식당 지붕 들썩이도록 큰 소리로 말한다

 

 

소설 동백꽃에서 점순이는 소년에게 “느그 집에 이거 없지” 생색을 내며 봄감자를 내민다. 봄감자가 맛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나는 오늘 봄 소라 시를 건네며 생색을 낸다. 겨울 낮은 수온을 견딘 봄 소라는 맛과 영양이 알차게 오르고 쫀쫀한 식감이 절정에 이른다. 고기도 씹어본 사람이 안다고, 봄 소라도 먹어본 사람이 맛을 안다. 봄 소라철에 엄마가 집에 오자마자 소라를 빨리 손질해 달라 조른다. 생으로 먹고 구워 먹고 삶아 먹고, 젓을 담거나 계란찜에 넣어 먹기도 한다.

 

봄 소라는 어떻게 먹든 맛있다. 엄마는 매번 소라를 주면서 나에게 아직도 소라 맛을 잘 모른다고 말했다. 소라철이면 엄마는 밤마다 끙끙 앓는다. 아침에 바다에 들어갔다 나온 몸이 밤이 되면 더 무거워지는지, 뒤척이는 소리가 길게 이어진다. 그 소리를 들으면서도 나는 다음 날 먹을 소라를 먼저 생각했다.

 

내가 먹은 소라에는 소라 맛이 오기까지의 시간이 있었다. 바다에서 건져 올리는 일과 그 시간을 견뎌온 몸이 함께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동안 그것을 따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소라 잡다 세월 끝나는 엄마는 매번 내가 아직 소라 맛을 모른다고 말했는지도 모른다.

시에서 말하던 것처럼, 맛을 안다는 것은 그 앞에 놓인 시간을 함께 생각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어버이날이 가까워질수록, 나는 이제야 그 시간을 함께 떠올리게 된다.

 

☞허유미는?=제주 바닷가 마을 모슬포에서 태어났다. 수평선, 물너울, 등대, 섬은 나의 첫 친구들이었다. 말문이 트였을 때 엄마라는 말보다 바다라는 말을 많이 했다. 물질하는 엄마를 기다리는 동안 바다는 파란 요람, 파란 집, 파란 놀이터였다.

 

청소년 시절 유난히 말수가 적어 엄마 아빠가 걱정했다. 말수가 적은 대신 사람들의 말을 많이 듣고 남들이 쉽게 지나치는 풍경이나 사물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 시절부터 시집을 읽는 시간이 많았다. 책꽂이에 시집이 많아지면서 시인이 되겠다는 꿈을 갖고 국문학과에 진학했다.

 

2016년 제주작가 신인상, 2019 서정시학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우리 어멍은 해녀」, 「바다는 누가 올려다보나」, 한국작가회의 회원, 제주작가회의 회원.



 

허유미 시인 eojini104@daum.net
< 저작권자 © 제이누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추천 반대
추천
2명
100%
반대
0명
0%

총 2명 참여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원노형5길 28(엘리시아아파트 상가빌딩 6층) | 전화 : 064)748-3883 | 팩스 : 064)748-3882 사업자등록번호 : 616-81-88659 |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제주 아-01032 | 등록년월일 : 2011.9.16 | ISSN : 2636-0071 제호 : 제이누리 2011년 11월2일 창간 | 발행/편집인 : 양성철 | 청소년보호책임자 : 양성철 본지는 인터넷신문 윤리강령을 준수합니다 Copyright ⓒ 2011 제이앤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jnuri@jnuri.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