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가 유린당하고 있다. 민주제의 정당성이 위협받고 있다. 6·3지방선거를 앞두고 흥행몰이가 한창인 민주당 경선판에서다. 대한민국 제주가 발원이지만 제주만도 아니다. 대한민국 정치현실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는 현주소다.
근원은 ‘1인2표’라는 기막힌 술수에서 비롯됐다. 위성곤·오영훈·문대림 3인이 경합한 민주당 제주도지사 후보 경선이 문제의 현장이다. 오영훈 후보가 탈락하고 위성곤·문대림 두 후보간 결선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선거판을 뒤흔든 의혹이 터졌다. ‘1인 2투표 유도’ 의혹이다.
민주당 광역단체장 경선은 권리당원 투표 50%, 일반 유권자 안심번호 ARS 투표 50%를 반영하는 방식으로 치러졌다. 기본 원칙은 ‘1인 1표’다. 그런데 지난 13일 문대림 후보 측은 위성곤 후보 측 보좌진이 카카오톡 단체대화방에 “권리당원이 아니라고 하면 1인 2투표가 가능하다”는 취지의 글을 올렸다며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나 논란은 '도긴개긴'이었다. 14일 오후에는 문대림 후보 측 관계자 역시 “여론조사 전화를 받았을 때 권리당원이 아니라고 하면 투표가 가능하다”는 취지의 글을 남겼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결국 위성곤 후보 측 보좌진과 문대림 후보 측 관계자 모두 유사한 방식의 투표 독려 의혹에 휘말리면서, 이번 사안은 특정 캠프의 도덕성 문제를 넘어 결선 막판 양측이 모두 경선 관리의 허점을 이용한 진흙탕 공방으로 번졌다. 두 후보 모두 결국 사실이 드러나자 앞다퉈 ‘사과’ 회견을 하는 ‘웃픈’ 현실을 보여줬다. 문 후보 측은 ‘고발·수사’ 운운하다 오히려 제 발등을 찍었다.
사실 이런 논란은 제주만이 아니다. 다른 지역에서도 경선 신뢰성 문제가 반복되고 있다. 전남도당 선관위는 지난 8일 선거 부정 신고 심의 결과를 발표하며 ‘이중투표 유도 전화’ 논란 등 4건에 대해 경고 조치를 했다. 또 지난 3월 광주시당에서는 특정 통신사 이용 권리당원에게 ARS 투표 전화가 가지 않는 시스템 오류가 발생, 경선 관리 부실 논란이 불거졌다.
민주제 선거에서 ‘1인1표’는 원칙이다. ‘평등선거’ 개념의 기본이다. 민주당 경선과정에서 이 기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지금 정당이 하고 있는 여론조사와 권리당원 투표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장치를 제대로 갖췄는지 여부가 관건이다. 하지만 지금의 조사방식을 잘 살펴보면 ‘조작 답변’을 걸러내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권리당원이 아니’라고 거짓말을 해도 넘어가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이건 민주적 선거방식이 아니다.
여론조사로 후보를 결정짓는 방식도 문제다.
여론조사는 처음에 시장조사에서 발전했다. 정치문제에 관한 여론의 반응을 조사하기 위해 시장조사기법을 이용한 실험을 시작한 건 1935년 미국의 통계학자 조지 갤럽(George Horace Gallup, 1901~1984)에 의해서다. 미국의 당면한 정치·사회적 문제들에 관한 전국적인 의견조사를 실시하기 시작한 이후 미국에서는 영리단체와 학술기관에서 실시하는 여론조사가 가속화되었다. 후에 미국여론조사협회(일명 갤럽 조사)의 기관지가 된 〈계간 여론 Public Opinion Quarterly〉이 창간되면서 여론조사는 대세가 됐다.
한국의 경우 선거판에서 여론조사가 자리를 잡은 건 1992년 대선(大選)에 이르러서다. 34년여의 세월을 보냈다. 국민의힘의 전신인 그 시절 신한국당이 여의도연구소를 설립, 당내 공천 문제 등에 여론조사 기법을 활용하기 시작한 게 사실상 국내에선 시초격이다. 이후 중앙일보가 여론조사 전문기자를 1990년대 중반 간판으로 내세우기 시작했고 어느 때부턴가 총선과 지방선거, 대선 등 모든 선거에서 여론조사 결과 발표시점은 선거판의 분수령이 됐다. 물론 언론에서도 주요의제 기능을 갖게 됐다.
하지만 여론조사는 사실 많은 결함을 갖고 있다. 여론의 추이를 정확히 대변할 만한 표본 확보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단 긴 시간 숱한 질문에 일일이 답을 하는 피조사자부터가 평범하기 보단 비범한 인물이다. 의도를 갖고 조직적으로 대응하는 집단에 휘둘릴 가능성이 당연히 높다. 게다가 비용부담 때문에 면접원이 전화로 응대하지 않고 자동응답장치(ARS)를 활용한 여론조사가 횡행하는 상황에서 여론조작 우려는 더 크다. 조사대상자가 성별과 연령, 거주지역을 허위로 답변해도 이를 가려낼 방법은 없다. '홍위병의 농간'에 놀아나는 꼴이 될 수도 있다. 조사결과가 엉터리가 되는 것이다. ‘보통선거’의 원칙을 무너뜨리는 것 역시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가능하다.
지난 8~10일 진행된 민주당 제주지사 후보 경선 참여대상인 유권자는 10만4227명이다. 권리당원 4만4227명, 일반도민 6만명이다. 이들의 답변을 얼마나 충실히 제대로 반영했는지 솔직히 의문이다. ‘1인2투표’가 충분히 가능한 상황이기에 더 그렇다. 여론조사가 만능이 아닌데 ‘전가의 보도’로 활용되는 현실은 민주성과 거리가 멀다. 그래서 선진 민주국가에서 여론조사가 후보를 선정하거나 당락을 결정짓는 도구로 활용되는 경우는 몹시 드물다. 여론조사 등으로 얻은 결론은 다분히 참고사안으로 한정해야 할 자료일 뿐 판단의 근거로 쓰이지 않는다.
민주적 정당성 훼손이 의심되는 사례는 또 있다. 제주도의원 경선에서는 또 다른 차원의 논란이 불거졌다. 제주시 오라동 선거구에서는 마을회장 6명이 지난 13일 공동으로 문제를 제기하며 “인구 1만6000여명 가운데 권리당원이 15.4%인 2523명에 이르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반발했다. 성인 유권자로 한정한다면 권리당원 비율은 예상을 뛰어넘는다. 이들은 위장전입 가능성이 의심되는 11명의 명단까지 제시하며 특정 선거구의 권리당원 급증이 통상적 수준을 벗어난 만큼 실제 거주 여부와 당원 자격의 적정성을 확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의식한 듯 민주당 제주도당은 14일 오후 6시30분 예정된 경선 결과 발표에서 ‘오라동 선거구’를 빼고 나머지 선거구 결과만을 공표했다. 하지만 이 결과에서도 ‘유령당원 의혹’은 또 나왔다. 제주시 아라동 갑 선거구에서 재선에 도전했다가 당내 경선에서 밀린 홍인숙 의원(더불어민주당)이 15일 ‘유령당원’ 관련 전수조사를 촉구하고 나섰다. 그는 제주동부경찰서에 고발장도 제출했다.
홍 의원은 “2022년 아라동 갑 민주당 권리당원 유효투표는 386표에 불과했지만, 4년만에 1387표로 3.6배 정도 늘었다. 순수한 민심의 확장인지, 조직적 개입의 결과인지 확인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결국 논란은 이미 특정 몇개 선거구를 넘어 제주의 다른 선거구는 물론 다른 지역으로도 연쇄적 영향을 줄 태세다. 민주제를 운영하기로 한다면 정확히 확인해야 할 심각한 사안이다.
사실 제주에서 당원 자격 논란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앞서 지난 2월에는 특정 선거구에서 동일 주소지에 다수 당원이 등록되는 등 불법적인 당원 모집 정황이 포착됐다. 이어 2월 27일에는 관련 사안과 관련해 출마 예정자 A씨가 징계를 받았다. 당시 민주당 제주도당 윤리심판원 조사 결과 12명이 같은 주소지로 확인됐다. 당원 모집을 목적으로 가짜 주소를 제출한 것으로 판단해 당직자격정지 처분이 내려졌다. ‘유령당원’ 의혹은 그 연장선이나 다름 없다.
민주제 작동과정의 축제판이자 ‘마지막 의식’(final ceremony)으로 치러지는 선거가 추잡한 작태로 정당성(legitimacy)을 의심받고 있다. 민주주의 작동 원리가 붕괴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흥행몰이에만 여념이 없던, ‘내란정국’ 덕에 오히려 인기에 취해있던 집권정당 더불어민주당 경선판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지고 있는 판에서 배출된 후보는 ‘민주적 정당성’의 지위를 부여받기 어렵다. 민주제의 골간은 무엇보다 ‘절차적 정당성’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정당 민주주의' 역시 허구다. [제이누리=양성철 발행·편집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