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세계 여성의 날, 제주 여성 연대의 기록을 소환한다

  • 등록 2026.03.06 14: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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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제주여성사, 그 발자취(1) '여성의 날' 창립한 조천부인회

 

매년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이 오면 우리는 1908년 평등을 외치며 거리로 나섰던 뉴욕의 여성 노동자들을 떠올린다. 그러나 제주에도 100여 년 전 스스로 배우고 서로 연대하며 공동체의 언어를 바꾸어 나갔던 여성들의 역사가 있었다.

 

그동안 제주 여성은 ‘강인함’이라는 상징적 이미지로 자주 이야기되어 왔다. 척박한 환경 속에서 삶을 지탱해 온 노동과 헌신은 널리 칭송받았지만, 시대 속에서 사회와 관계를 맺으며 살아온 역사적 존재로서의 모습은 충분히 조명되지 못했다.

 

제주 여성은 누군가의 딸이자 어머니인 동시에 마을과 학교, 노동 현장에서 살아가던 사회의 구성원이었고, 토론과 조직 활동을 통해 공동체의 변화를 모색했던 주체적 시민이었다. 이제 그들을 자연적 존재나 신화적 상징이 아니라 역사적 존재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이는 학술적 관심을 넘어 제주의 미래 사회를 준비하는 데에도 중요한 과제다.

 

1920년대, 배움을 통해 시작된 변화

 

근대 제주 여성운동은 ‘배움’이라는 절실한 요구에서 시작되었다. 1920년대 교육시설이 늘어났지만 여성 문맹률은 1930년대까지 90%를 넘었고, 글을 모른다는 사실은 사회 참여를 가로막는 큰 장벽이었다.

 

이때 주목할 것은 마을 단위 여성 조직의 등장이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 당시 있었던 삼도리부인회, 1918년 사회사업 활동을 펼친 제주부인회 등은 여성들이 공동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초기 사례다. 이러한 흐름은 1920년대 들어 함덕, 신촌, 북촌, 김녕, 구좌, 모슬포 등 제주 여러 지역으로 퍼지며 부인회와 여자청년회, 여자 야학 조직 등 교육과 사회 활동의 거점을 만들어 갔다.

 

1924년 3월 8일, 조천부인회 창립

 

그 대표적인 현장이 바로 조천이었다. 동아일보 1924년 3월 23일자 기사에 따르면, 수양 기관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긴 조천 여성들은 강평국, 김시숙, 이재량 등의 발기로 1924년 3월 8일 ‘조천부인회’를 조직했다. 창립 직후 회원 수가 백여 명에 이르렀다는 기록은 당시 여성들의 참여 의지가 얼마나 강했는지를 보여준다. 우연히도 그 창립일은 오늘날 세계 여성의 날로 기념되는 3월 8일과 같은 날짜였다.

특히 김시숙(1880~1933)은 조천 여성운동의 주요 인물이다. 마흔이 넘어 글을 배운 그는 조천부녀야학을 세워 여성 교육에 헌신했고, 1924년 조천지역 경제 문제 해결을 위해 조직된 ‘제주산업연구회’에 여성 대표로 참여했다. 이후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 재일 제주 여성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조직과 권익 보호에도 힘을 쏟았다. 그럼에도 그의 이름은 아직 독립운동사에서 충분히 조명되지 못하고 있다.

 

조천부인회가 만든 교육의 흐름은 공립보통학교에 여자 야학부 설치라는 공적 교육 기회를 끌어내며 다음 세대 여성 리더들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는 조천공립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해 여성 교육 운동을 이끌던 강평국 등 청년 지식인들과의 협력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야학과 학교 교육을 경험한 김옥희, 황인보, 김시정 등은 이후 조천여자청년회의 중심인물로 활동했다. 또 김시숙의 딸 김정죽이 어머니가 시작한 야학을 이어받은 사례는 여성 리더십이 세대를 넘어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기록으로 이어져야 할 제주 여성 역사

 

일제강점기 제주 여성들의 사회 참여는 해녀 항일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 등 다양한 현장에서 이어졌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은 지금도 다른 형태로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삶과 활동은 아직 충분히 연구되고 기록되지 못했다. 과거를 기록하는 일은 공동체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다. 기록은 곧 소통이며, 소통이 끊기면 축적된 가치 또한 사라지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라는 어두운 시기에도 자신과 사회를 변화시키려 했던 여성들의 실천은 제주 사회에 어떤 변화를 남겼을까. 그리고 그 경험은 이후 지역 여성 조직과 공동체 활동 속에서 어떤 흔적으로 이어지고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자료의 발굴과 지속적인 연구, 그리고 지역사회의 관심이 필요하다. 여성들의 삶과 활동이 기록되고 정당하게 평가될 때 우리는 제주 사회의 또 다른 역사적 층위를 더 온전히 이해할 수 있으며, 이는 성평등한 마을 자치와 지역 공동체의 역량을 새롭게 바라보는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118주년 3·8 세계여성의 날을 맞아 제주 여성들의 연대 역사가 더 많은 이름과 이야기로 호명되고 기록되기를 기대한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고지영 = 제주 출생. 미국 시카고대에서 사회학 박사학위(2004)를 받았다. 성균관대와 KAIST, 경기도 여성가족재단,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등을 거쳐 2014년부터 제주여성가족연구원에서 일하고 있다. 최근 『근대 제주지역 여성운동 연구』 등을 통해 제주 여성 역사에 관심을 두고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고지영 제주여성가족연구원 선임연구위원 ckoh@jewfri.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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