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돌담, 무모한 시정, 무책임 도정 … 서귀포 관광극장 철거 왜?

  • 등록 2025.09.30 18:04:52
크게보기

핑계 뒤 숨은 졸속 행정 … 보고서 은폐·조례 위반 논란, 오영훈 도정이 답할 차례

 

담쟁이가 뒤덮인 돌벽 한쪽이 덩그러니 서 있다. 초록색 방수포가 뒤덮은 객석 바닥은 이미 원형을 잃었고, 공연을 품던 무대는 무너진 채 흉터처럼 갈라진 흔적만 남았다. 한때는 웃음과 박수로 가득했던 자리에 이제는 공사 차량 자국과 철거 상흔만이 흩어져 있다.

 

오래도록 서귀포 시민들의 추억을 품어온 서귀포 관광극장은 이제 잔해와 철거의 상처로만 존재한다. 청춘의 기억을 간직한 무대, 가족과 함께한 영화 관람, 동네 아이들이 뛰놀던 객석의 풍경은 사라지고, 남은 것은 허물어진 건축물과 그것을 지켜보는 허탈한 눈빛뿐이다.

 

현장을 찾은 건축가와 시민들은 잇따라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라면 보강이 가능했을 것"이라는 아쉬움과 함께 "무대를 배경으로 보낸 낭만의 시간이 이렇게 허망하게 사라졌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누군가 벽체를 손으로 짚으며 "아직 숨 쉬는 건물인데 왜 이렇게 급히 없애야 하느냐"고 반문했다.

 

30일 오후 이중섭 거리를 찾은 어린이와 시민, 외국인 관광객들마저 발걸음을 멈췄다. 회색빛 공사판 가벽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고, 일부는 휴대폰을 꺼내 무너진 흔적을 사진으로 남겼다. 다른 이는 "관광지에 왔더니 왜 철거 현장만 남았느냐"며 의아해했다. 서귀포 관광극장은 그만큼 시민과 관광객 모두에게 살아 있는 문화공간이었다.

 

 

그러나 서귀포시는 관광극장 철거의 이유로 '안전'을 내세웠다. 정밀안전진단에서 최하 등급인 E등급 판정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오순문 서귀포시장은 지난 24일 기자회견에서 "극장 외벽에 사실상 기초가 없다"며 철거 불가피론을 강조했다.

 

하지만 정밀안전진단 보고서는 전혀 다른 결론을 담고 있었다. 보고서에는 200㎜ 두께의 콘크리트 기초가 확인됐고, 그 위에 모르타르를 덧입힌 뒤 석축 시공이 이뤄졌다고 기록돼 있었다. 균열이나 탈락도 발견되지 않았다. 기울기에도 문제가 없었다. 즉, 보수와 보강을 통해 충분히 보존이 가능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가였다.

 

보고서는 관광극장 관리·활용을 위한 세 가지 시나리오를 제시했다. 첫번째는 보수·보강 후 재사용이다. 탄산화 억제를 위한 단면보수, 손상 부위와 철판 보강, 우레탄 방수 및 도장, 내부 인테리어 재시공 등이 포함되며 예상 비용은 약 4억4000만원으로 산출됐다. 

 

두번째는 부분철거 후 재사용이다. D·E등급으로 판정된 38개 부재를 철거한 뒤 신설 구조재로 교체하고, 나머지는 단면보수를 진행하는 방식이다. 외부 방수, 도장작업, 내부 인테리어 재시공이 포함되며 비용은 약 4억2000만원으로 추산됐다. 

 

세번째는 전체 철거 후 재건축이다. 철근콘크리트 신축 공사비와 철거비, 설계비 등을 합쳐 약 13억원 이상이 소요되는 것으로 계산됐다. 구조 안전성을 확보할 수 있지만 기존 건축물이 지닌 역사성과 상징성은 완전히 사라진다. 서귀포시는 이상(?)하게도 "대안은 없다"며 가장 비용이 많이 드는 철거만을 밀어붙였다.

 

건축사회와 전문가들은 "철거가 전제가 아니라, 필요한 경우 보강을 우선해야 한다"며 행정이 안전진단 결과를 왜곡하고 보강 대안을 의도적으로 배제했다고 비판했다. 사실 왜곡이라고 보다 거짓해명이란 표현이 더 옳다.

 

문제는 2014년에 진행된 보수·보강 공사에서도 드러났다. 당시 일부 부위는 아예 누락되거나 불량하게 시공돼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결함이 재발생한 것으로 확인됐다.

 

행정의 관리 소홀과 부실 공사가 지금의 철거 논란으로 이어졌다는 지적이 설득력을 얻는 대목이다. "제대로 관리했더라면 오늘의 철거는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시민들의 원망도 커지고 있다.

 

이와 맞물려 서귀포시는 지난 7월 또 다른 행정 조치를 내렸다. 관광극장의 건축면적을 직권으로 절반 축소한 것이다. 지붕 없는 야외공연장을 별도 건물로 분리하면서 면적을 800㎡에서 300㎡로 줄였고, 동시에 주용도도 문화집회시설에서 제2종 근린생활시설로 변경했다.

 

이는 애초 "공론화를 거쳐 방향을 정하겠다"던 발언과 달리, 이미 철거를 전제한 사전 정지 작업을 끝내놓은 것 아니냐는 비판을 낳았다.

 

더욱 뼈아픈 점은 서귀포 관광극장이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2020년 제주도가 발간한 '제3차 건축자산 기초조사 학술용역 보고서'는 이 건물을 건축자산으로 공식 지정하며 보전 수준 최고 등급인 '상(上)'을 부여했다.

 

보고서는 관광극장의 가치를 세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과거 동네 주민들이 함께했던 문화시설로서의 역사적 가치. 둘째, 공공 공연장으로서 이어져 온 사회문화적 가치. 셋째, 정면부 콘크리트 차양 장식과 잡석조 외벽의 보존 상태가 양호해 독특한 공간미를 구현한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행정은 일찌감치 '멸실'을 거론했다. 2022년 3월 제주도의회 행정자치위원회 회의에서 서귀포시는 이중섭미술관 부지 매입을 설명하며 "이중섭미술관이 멸실되고 신축부지가 확장되면 관광극장이 멸실되지 않을까 본다"는 발언을 남겼다.

 

공무원의 입에서 직접 '관광극장 멸실'이 거론된 것이다. 당시 문종태 의원은 "사람들의 기억을 가진 극장이 하나 더 사라지는 것"이라고 했고, 강철남 의원은 "(제주시내) 현대극장 소멸로 아쉬움이 큰데 같은 과오를 반복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이경용 의원은 "극장이 사라지면 이중섭미술관의 가치도 무너진다. 반대투쟁도 불사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질타가 이어지자 서귀포시는 "멸실 계획은 없으며 공론화를 거치겠다"고 물러섰지만 이후 3년간 공론화 기회는 단 한 차례도 열리지 않았다. 행정은 도민과 도의회를 기만한 채 철거로 직행한 셈이다.

 

 

더 큰 의혹은 바로 이중섭미술관 신축 공사와의 연관성이다. 미술관 공사는 지하 18미터를 파내는 대규모 굴착을 수반한다. 법적으로 공사업체는 주변 건축물에 피해가 없도록 하는 '안전계획서'를 제출해야 한다.

 

건축계는 이 문서에 이미 '관광극장 벽체 철거 계획'이 포함된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한다. 실제 안전진단보고서에는 "무진동 공법을 적용하더라도 미술관 공사 진동이 극장 벽체에 전달된다"는 문구가 있었다.

 

결국 '철거 불가피론'은 미술관 공사 일정과 맞물려 등장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제주도건축사회, 제주건축가회, 제주건축학회 등 도내 건축 3단체는 성명서를 통해 "이중섭미술관 공사와 관광극장 철거가 어떤 관계인지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행정 절차 위반도 적나라하다. 서귀포시는 면적 축소를 통해 공유재산 심의를 피해 갔다. 단순 착오라 해명했지만 시민사회는 '의도된 계산'이라고 의심한다.

 

더 큰 문제는 '도의회 패싱'이다. 31억 원에 달하는 공공재산은 매입 당시 도의회 의결을 거쳤고, 기능 변경 시 재의결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좌석과 무대, 외벽이라는 핵심 기능을 철거하면서도 도의회의 문턱은 넘지 않았다. 도민을 무시한 일탈이나 다름 없는 셈이다.

 

 

국내외 건축계와 도민사회의 반발도 거세다.

 

근대건축 유산 보존을 위해 활동하는 국제단체인 도코모모 인터내셔널과 도코모모코리아는 "1963년 개관한 서귀포 관광극장은 지역 최초의 영화관이자 시민들의 문화 향유 공간이었다"며 "행정 주도의 일방적 철거를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대한건축사협회 제주건축사회 역시 "제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극장 건축물이자 전통 돌쌓기 기법과 철근콘크리트 구조가 결합된 드문 사례"라며 보존 필요성을 강조했다.

 

제주올레 이사회는 "남은 것을 어떻게 지키고 계승할 것인가라는 과제를 남겼다"고 했고, 차성민 건축가는 "시민의 추억을 짓밟는 일이 반복돼서는 안 된다"고 호소했다.

 

그러나 감사위원회는 행정의 주장을 걸러내지 못했다. 강기탁 감사위원장은 제미나이 AI 답변을 그대로 인용해 "E등급이면 보전이 불가하다"는 서귀포시 설명을 옹호했다.

 

도정 하부조직이 아니라 견제를 위한 독립기관의 수장이 'AI답변'으로 시정을 옹호하는 행태를 보였다. "본분을 망각한 경거망동"이란 비판이 쏟아졌다. 그 역시도 결국 나중에 "경솔했다"고 사과했다.

 

보고서에는 분명 보수·보강 대안이 존재했다. 감사 기능은 그냥 눈을 감은게 아니라 굳이(?) 시정만을 옹혼한 셈이다. 도민사회는 특별감사를 요구하며 "행정이 도민을 속였다"는 비판을 이어가고 있다.

 

서귀포 관광극장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다. 반세기 넘게 시민들이 추억을 쌓고 공연을 즐긴 공간이자 제주의 근현대사를 증언하는 건축 자산이다. 그러나 지금 남은 것은 돌무더기와 무너진 신뢰뿐이다. 문화도시 서귀포라는 이름은 공허해졌고, 행정은 스스로 도민의 믿음을 저버렸다.

 

안전진단 보고서의 대안은 왜 묵살됐을까? 도의회와 조례는 왜 무시됐는가? 미술관 공사와 철거는 어떤 연관을 가졌는가? 감사위원회는 왜 제 기능을 하지 못했는가? 국제단체와 국내 전문가까지 보존을 촉구하는데도 행정은 왜 귀를 닫을가?

 

수많은 의문은 이제 오순문 서귀포시장만을 향하지 않고 있다. 자치권 없는 서귀포시가 아닌 자치권을 가진 제주도정의 책임을 묻고 있다. 그러나 지금도 제주도정은 침묵이다. 오영훈 도정이 답해야 할 차례다. [제이누리=김영호 기자]

김영호 기자 jnuri@jnuri.net
< 저작권자 © 제이누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추천 반대
추천
3명
100%
반대
0명
0%

총 3명 참여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원노형5길 28(엘리시아아파트 상가빌딩 6층) | 전화 : 064)748-3883 | 팩스 : 064)748-3882 사업자등록번호 : 616-81-88659 |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제주 아-01032 | 등록년월일 : 2011.9.16 | ISSN : 2636-0071 제호 : 제이누리 2011년 11월2일 창간 | 발행/편집인 : 양성철 | 청소년보호책임자 : 양성철 본지는 인터넷신문 윤리강령을 준수합니다 Copyright ⓒ 2011 제이앤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jnuri@jnuri.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