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생들에게 건네는 아버지의 응원

  • 등록 2017.11.17 15:2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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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인시평] 신종플루.메르스.세월호에 '지진수능' ... 영광과 환희는 온다

 

 

우리는 1967년생이다. 양띠다. 

 

우리는 1974년 지금의 초등학교라 부르는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코흘리개 시절이건만 그해 8월15일 터진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 여사의 피격사건을 보며 곧 전쟁이 터질 것 같은 공포를 느꼈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새마을운동 정신의 뜻을 머리에 새겼고, 박정희 대통령이 제정·공포했다는 국민교육헌장을 달달 외우는 교내경시대회까지 치렀다. 1977년 우리나라가 수출 100억 달러를 달성했다는 쾌거는 자부였다.

 

우리는  초등 6년 시절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은 부하가 쏜 총탄에 맞아 숨졌다. 머리를 깎고 중학생이 되던 해인 1980년엔 광주5·18이 터졌다. 한참 지난 성년이 되고 나서야 뒤늦게 실체를 알았지만 그건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의 학살이었다.

 

그래도 세월은 흘렀다. 중3 시절 두발 자율화란 정책으로 헤어스타일을 신경 쓰기 시작했고, 고교에 들어가자 교복도 자율화돼 어울리는 사복을 차려 입느라 부모에게 많이 졸라댔다. 팍팍한 형편인 부모의 속마음을 잘 몰랐다. 지금 세대는 모르지만 학교군사훈련 때 입던 교련복이 그래도 부모의 처지를 이해한 친구들이 즐겨 입던 ‘준교복’이었다.

 

우리는 학력고사 세대였다. 비록 대학을 간 이는 소수지만 1985년 말 학력고사를 봤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들을 ‘학력고사 실험세대’라고 본다. 인문·자연계로 나뉘기에 과목수는 달랐지만 무려 16~17개 과목 시험을 치렀다. 게다가 문과는 제2외국어가 필수였고, 사상 처음으로 논술시험도 봤다. 지금까지 대입 시험사상 가장 많은 과목의 시험을 치렀다. 그래선지 깊이는 모르지만 이것저것 잡다하게 아는 친구들이 많다. 그 후로도 우리 후배들은 과목수는 줄었지만 6년간 학력고사를 더 치렀다.

 

어렵사리 들어간 대학은 시위와 휴강의 연속이었다. 군사독재에 항거했다. 한 해 앞서 대학에 들어간 서울대생 박종철 선배가 고문치사사건으로 숨지더니  대학 동기인 연세대생 이한열이 최루탄에 피격돼 사경을 헤매다 숨져 들불처럼 일어섰던 세대다. 1987년 민주화운동의 주역이라고 자부한다.

 

그리고 돈벌이를 해야 했기에 직장을 얻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란 음악에 신선함을 느꼈고, 직장에선 우리를  ‘X세대’라 부르기도 했다. 나이가 차 결혼을 했고, 그리고 아이도 얻었다. 집도 장만했지만 지금 우리는 구제금융(IMF) 위기에 겨우 살아 남은 이들이다. 물론 앞서 ‘명퇴’란 이름으로 평생의 삶터 직장에서 나온 이도 많다. 조그만 가게라도 차려 가족의 생계를 여전히 책임지고 있다. 괴롭고 힘든 시간의 연속이었지만 영광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 대한민국 고3은 바로 우리들의 자녀인 경우가 많다. 1999년생이다. 토끼띠다. 부모로선 이들이 태어나던 해 걱정이 많았다. ‘밀레니엄 버그’라며 컴퓨터가 2000년은 인식하지 못해 이 아이들의 존재 자체가 사라지는 것 아닌가란 걱정을 했다. 주민등록번호 뒷자리가 그 다음해부터 남자는 3, 여자는 4로 바뀌었다. 99년생은 우리 사회의 마지막 남자 1, 여자 2 코드다.

 

이 아이들의 초등학교 입학은 우리에겐 축복이자 기쁨이었다. 언제인지 기억이 가물거리지만 부모 세대와 달리 이 아이들은 주5일 시스템에 맞춰 토·일요일 학교를 쉬었다. 바쁘게 살았지만 주말 아이들과 놀아주고자 애썼다. 하지만 마음처럼 시간을 함께 하진 못했다. 어느 덧 30대 후반이 된 아빠로선 생계의 현장인 직장이 우선일 수 밖에 없었다.

 

아이들이 초등 4학년이 되자 전국적으로 신종플루가 유행했다. 가을운동회가 취소되더니 수학여행은 언감생심이었다. 이 아이들의 수난사는 여기서 예고된 것 같다. 이 아이들이 중학교 3학년이던 2014년 4월16일. 우리는 비보(悲報)를 들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다. 아이는 밤 늦도록 울었다. 그 마음이 어찌나 애잔하게 다가오던지, 같은 시대를 산 아이들의 고통과 슬픔을 이해하는 아이에게 처음으로 기특하고 대견하단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해 예정된 아이의 중학 수학여행은 취소됐다.

 

우리의 아이가 고교에 진학한 건 2015년이다. 도무지 황당할 노릇이다. 이번엔 중동 호흡기증후군(MERS)이 전국적으로 맹위를 떨쳤다. 졸지에 36명의 목숨을 잃었다. “치사율이 높은 전염병”이란 뉴스보도에 당연히 고1때 떠나는 아이들의 수학여행은 또 사라졌다.

 

2016년 겨울의 추위는 혹독했다. 30년 전 나라의 민주화를 외치며 시위대열에 선 적이 있건만 우리가 촛불을 들고 다시 광장으로 나서야 될 줄은 몰랐다. 정권의 국정농단 사태를 지켜보면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이런 나라를 우리 아이들에게 넘겨줄 수는 없었다. 광장으로 나갔다. 하지만 아이에겐 "부모가 나설 일이니 공부나 전념하라"고 말했다. 하지만 SNS에 아이가 올린 광장 인증샷 사진을 봤다. 불처럼 화를 냈다.  주의를 줬지만 마음 한켠으론 "이 녀석도 이제 제상에 할 말은 하려 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아이가 아니라 어느덧 훌쩍 자란 친구로 다가왔다.

 

2017년 우리의 아이가 고3이 됐다. 하지만 도무지 이 1999년생의 ‘흑역사’는 이리도 모질단 말인가? 우리는 지난 10월 10여일간의 긴 추석연휴를 가슴 졸이며 보냈다. 아이들과 가족여행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그 아이들이 고3 수험생이 됐는데 하필 사상 최장 황금연휴가 왔다. 수능시험 막바지 공부로 아이가 피를 말리는데 ‘여행’따위는 입에 담을 수도 없는 말이었다. 부모는 그렇게 가슴 졸이며 그 아이를 지켜봤다.

 

 

기다렸던 수능시험을 하루 앞둔 11월15일-. 경북 포함 일대가 지진으로 크게 흔들렸다. 서울·제주·부산 등 전국 곳곳에서 감지될 정도였다. 예비소집까지 아이가 다녀온 마당에 ‘설마’했지만 교육부는 밤 늦은 시각 ‘수능 1주일 연기’를 발표했다. 아이는 넋을 잃고 방문을 걸어 잠그고 울었다. 이젠 이 아이들이 '지진수능세대'로 불릴 판이다. 솔직히 아버지·어머니 마음으로도 “이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이리 시련이 많은가”라고 가슴을 움켜쥐게 된다.

 

하지만 그 아버지는 그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살다 보면 살게 된다. 세상 일이란 아무도 모른다. 아무리 힘들어도 영광과 환희의 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우리도 그랬단다. 1999년생 우리 아이들아! 모두 힘내자! 우리가 뒤에 있다. 너희들이 우리 대한민국의 미래다!!” [제이누리=양성철 발행·편집인]

 

양성철 발행.편집인 j1950@jnuri.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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