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새로운 첫 연재를 시작합니다. 오동명의 ‘세밀화명상’입니다. 오랜 기간 신문기자 생활을 하며, 또 광고기획 일을 했던, 그리고 기자로서 카메라를 맸던 오동명 작가의 연재입니다. 모진 세상풍파와 맞닥뜨렸던 그가 그의 ‘자존’을 지키고자 그의 손놀림으로 다듬었던 채색과 스케치를 곁들인 명상의 담론입니다. ‘새로운 나라’를 꿈꾸게 된 2017년-. 우리가 가슴 속에 묻어두었던 ‘상식의 사회’를 되새기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 편집자 주 |
그래서 따라하기의 전제에 무조건이 아닌 ‘제대로’가 붙는다. ‘제대로 따라하기’는 결코 똑같이 따라하기는 아니다. 반복의 순환, 거듭되어진 순치를 넘고, 맹종·추종을 극복하는 창조로 이어질 때 비로소 ‘제대로 따라하기’가 될 수 있다. 창조는 내 것이 아닌 저 너머 다른 남의 것으로는 될 수 없다. 결코 거창하지 않은 데에서도 충분히 창조는 이뤄낼 수 있다. 생각하는 존재인 인간이란, 누구나 창조적인 사고나 실천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생각하는 존재, 인간이라면 어느 누구나.
일테면 이런 것이다.
중학 2학년생인 승민이는 곤충에 대해 모르는 게 없다. 하지만 그의 지식은 눈솔깃하게 화려히 편집된 초등학교 때 읽은 그림책들에서 얻은 것이 다다. 중학생이 되고 나와는 공부라는, 결국 성적이라는 목표로 만나긴 했지만, 곤충에 대해서는 빠삭한 그가 다른 과목에는 신통치 못하다.
관심이 실력이라는 등식을 이 어린 학생이 일깨워준다. 좋다. 우회적이지만 그의 관심으로부터 공부에 흥미를 갖게 해보자는 생각에 이르렀다. 이제 중학생답게 그림만이 가득한 책을 피해서 글이 더 많은 수준 높은 곤충관련 책을 하나 사서 선물했다. 그리고 공책 하나도. 공책 앞 부분에 곤충책에 실려있는 딱정벌레 하나를 골라 그대로 베껴 그렸다. 그리고 그 곤충이 승민이에게 거는 말, “승민이 형~~~” 말풍선도 넣었다. 그 그림이다.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할까. 군더더기, 사족이 될 것이고 잔소리가 될 터인데. 따라 베껴 그린 그림과 짧은 말풍선에 내가 승민이에게 하고 싶은 말이 다 들었다.
이런 용도로 내 자신도 세밀화명상을 해본다. 승민이가 더 멋진 어른일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이 바로 그 명상이다. 따라 그리고 베껴 새기는 동안에 미국의 루시 스톤을 떠올린다.
미국의 여성참정권 획득에 가장 큰 역할을 한 여성이란다. 백오십 년 전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고 그녀가 주장한 대로 실천했다.
“우리 여성들은 사회의 부속품 그 이상의 존재가 되고 싶다.”
그후 그녀를 따라 여성의 권리와 그에 따른 행동을 하게 된 여성들이 줄을 이었다. 루시 스톤을 따라한 여성들을 루시 스토너라고 한다.(애덤 그랜트가 쓴 <오리지널스>에서) 여성의 권리는 입법이라는 한 분야에만 머물지 않았다. 역사 이래 남자들이 독점해온 모든 분야에서 루시 스토너들이 활약했다. 바로 이것이 ‘제대로 따라하기’이다. 루시 스톤을 무조건 따라하기 한 여자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녀들은 곧 루시 스톤의 영역을 침범해 루시 스톤의 적이 된다. 그럴 수밖에. 무조건 따라하기의 한계이다. 무조건은 창조일 수 없고 추종에 그치고 결국 추잡스러워지고 만다. 유행쫓기가 바로 그것이다.
승민이에게 곤충그림을 베껴 그려주면서 단지 어릴 적 그림책 수준에만 머물게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을까.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승민이길 바란 마음이 전해졌는지, 승민이가 올 봄에는 내 작은 텃밭(<누구나오게 아무나오게 학당>에 딸린 땅)에 복수박 씨를 뿌려 그곳에 달팽이 등을 키워보겠단다.
“공부도 슬슬 재밌어져요.”
내가 해내고 있구나, 하면서 내가 참 약단 생각도 든다. 그런데 이 약아빠진 내가 그리 밉지 않은 건 왜일까? 아마도 나도 창조자가 되었다는 기쁨 때문이 아닐까. 승민이가 바뀌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오동명은? =서울 출생.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사진에 천착, 20년 가까이 광고회사인 제일기획을 거쳐 국민일보·중앙일보에서 사진기자 생활을 했다. 1998년 한국기자상과 99년 민주시민언론상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사진으로 세상읽기』,『당신 기자 맞아?』, 『신문소 습격사건』, 『자전거에 텐트 싣고 규슈 한 바퀴』,『부모로 산다는 것』,『아빠는 언제나 네 편이야』,『울지 마라, 이것도 내 인생이다』와 소설 『바늘구멍 사진기』, 『설마 침팬지보다 못 찍을까』 등을 냈다. 3년여 제주의 한 시골마을에서 자연과 인간의 만남을 주제로 카메라와 펜, 또는 붓을 들었다. 한라산학교에서 ‘옛날감성 흑백사진’을, 제주대 언론홍보학과에서 신문학 원론을 강의하기도 했다. 현재는 지리산 주변에 보금자리를 마련, 세상의 이야기를 글로 풀어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