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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바둑은 초대 국수 조남철에 이어 김인(金寅), 조훈현(曺薰鉉), 서봉수(徐奉洙), 이창호(李昌鎬) 등 국수산맥이 이어지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했다.
조남철이 15세 때인 1937년 일본으로 건너가 1941년 일본 프로 수업을 거쳐 입단하고 1943년 귀국하여 현대바둑 보급을 위해 한성기원을 설립한 1945년 11월이 한국기원의 원년이 된다. 한성기원이 설립되기 전까지 한국에서는 현재의 바둑과는 달리 여덟 곳의 장점(將點)에 각각 네 개의 돌을 먼저 놓고 대국을 시작하는 순장(巡將)바둑을 두었다. 이 시대 중국은 네 귀퉁이 화점(花點)에 각기 두 개의 돌을 먼저 놓고 시작했고 일본에서만이 오늘날 바둑과 같이 사전에 돌을 놓지 않았다. 초반부터 전투에 돌입할 수밖에 없던 순장바둑에서 미리 돌을 놓지 않는 바둑인 현대바둑으로 규칙이 변화하면서 바둑의 묘미는 순장바둑에 견줄 바 없이 무한했고 바둑의 기술도 진화하는 계기가 됐다.
조남철은 귀국 한 해 전 여름 잠시 한국에 돌아와 노사초를 비롯한 당대의 국수 8명을 모두 꺾어 1인자가 됐다. 한국기원의 전신인 대한기원은 1950년 6월 20일 최초의 단위결정시합을 열어 조남철 3단과 함께 민중식, 이석홍, 김봉선 등 13명의 초단이 탄생했다. 1954년 1월 8일 사단법인 한국기원이 출범해 1954년 4월 제1회 승단대회, 6월에는 제1회 입단대회를 열었다. 1956년 동아일보 주최로 최초의 프로기전인 국수 제1위전(국수전의 전신)이 창설됐다.
조남철은 48년 전국위기선수권전부터 75년 최강자전까지 30년간 한국 프로바둑 국수의 계보를 열면서 우승 30회, 준우승 14회라는 위업을 쌓았다. 이 때문에 바둑의 승패를 다툴 때 대국자는 물론 주변에서 “조남철이 와도 이길 수 없다”, 사활(死活)이 문제됐을 때 “조남철도 살릴 수 없다”는 말이 유행어가 되곤 했다.
조남철 ‘1인 천하’였던 1958년 제8회 입단대회에서 프로가 된 열다섯의 김인(金寅)은 ‘조남철의 키드’였다. 62년 일본으로 건너가 기타니문하에서 바둑수업을 거쳐 일본 기원 3단으로 추증됐다. 1년 남짓 있다 귀국하여 65년 10연패를 노리던 조남철 국수를 물리쳐 철벽을 무너뜨렸다. 65년 27승 3패 승률 90%, 68년 89.3%(56승 8패)의 기록은 현재까지 한국기원 통산승률 부문 1, 2위의 자리이다. 김인은 76년 패왕전까지 30회의 우승을 차지하고 86년 박카스배를 끝으로 도전무대에서 물러나기 까지 22회의 준우승 기록을 남기어 승부의 결과보다 과정의 기(技)와 예(藝)에 더 마음을 쏟았던 그의 시대를 마감했다.

조훈현은 전관제패 3회(80, 82, 86년)라는 불멸의 금자탑을 쌓았고 1989년 9월 제1회 응씨(應氏)배 세계프로바둑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면서 한국바둑이 세계를 제패했다. 88년 후지쯔배와 함께 창설된 응씨배는 중국의 녜웨이핑의 활약에 고무돼 대만의 부호 잉장치가 중국 바둑의 위상을 드높이기 위해 40만 달러의 우승 상금의 걸고 4년마다 1회씩 열리는 바둑올림픽 같은 세계대회이다. 바둑황제 대관식을 치른 조훈현은 이튿날 김포공항에서 관철동 한국기원까지 최초의 카퍼레이드를 펼쳤다. 93년 제2회 응씨배에는 서봉수가, 97년 제3회 응씨배에는 유창혁(劉昌赫)이, 2001년 제4회 응씨배에서는 이창호(李昌鎬)가 우승을 차지하면서 연속 16년간 세계 정상의 위업을 이루었다.

이창호는 89년 제8기 바둑왕전 우승으로 세계 최연소(만14세) 타이틀을 획득, 천재 소년기사로 세계바둑사의 혁명을 이뤘다. 92년 제3회 동양증권배 우승으로 최연소 세계챔프 등극, 94년 최다관왕(13관왕), 사이클링히트(16개 기전 한차례씩 석권) 등, 이창호가 가진 세계대회 우승 23회(비공식 2회)는 불멸의 기록이다. 또한 94년 세계 최초로 바둑전문 방송 ‘바둑TV’가 개국되면서 한국 바둑은 급격한 발전을 이룩하게 됐다.
한편 조훈현의 전관 제패의 빛을 잃게 한 것은 62년 일본으로 바둑유학을 떠난 조훈현의 두 살 아래 조치훈(趙治勳)이다. 조치훈은 80년 일본 바둑계의 1인자 상징인 명인을 쟁취하여 한국 언론계를 뒤흔드는 바람에 조훈현의 기록은 외면되고만 것이다. 조치훈 9단은 일본 바둑사상 초유의 그랜드슬램(7대 기전을 한 차례씩 석권)을 달성하고 96년에는 일본 3대 메이저 타이틀인 기성(棋聖), 명인(名人), 본인방(本因坊)을 동시에 석권하는 ‘대삼관(大三冠)’의 위업을 달성하며 일본바둑계의 명실상부한 일인자로 도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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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맞은 한국바둑은 ‘이창호 키드’인 이세돌, 윤준상, 최철한, 박영훈, 원성진, 강동윤, 김지석과 최근 이세돌과 선두를 다투는 박정환 등 신진기예들이 중국과 격돌하고 있다.
일본바둑은 이미 침몰했다. 2011년 일본은 한국이 후지쓰배 6회부터 24회까지 19차례 중 15차례를 우승하자 후지쓰배 대회를 접었다. 그런데 2013년 들어 LG배 조선일보 기왕전 1‧2회전에서 한국기사 14명이 모두 탈락하고 8강에 중국 6명, 일본 2명이 올랐다. 이때 ‘한국바둑의 몰락’이란 말이 대두됐다. 중국은 20년전 ‘한국 추월’을 목표로 바둑영재를 키우고 있다. 90년대 이후 태어난 ‘90후(後)’ 신세대 인재를 바둑계로 끌어들였다는 것. 일본은 전자게임이 청소년을 바둑판에서 떼어놓았듯 한국은 스마트폰에 빠졌기 때문에 한국 바둑의 위기설이 돌고 있다. 한국바둑의 지나친 속기(速棋)화로 국제경쟁력을 잃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한국기원은 상설 ‘바둑 국가대표’팀 구성을 모색, 바둑 영재를 키우려하고 있다. 국회에서는 바둑진흥법을 제정, ‘바둑의 날’을 지정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한국기원은 2011년부터 입단제도 개혁을 통해 매년 12명씩의 입단자를 뽑고 있다. 여기에 더해 아마추어가 오픈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올리면 입단이 가능하게 ‘포인트 입단제(포인트 100점)’도 2009년 도입했다. 올 8월 16일 현재 한국기원 소속 프로기사 수는 285명(남 234명, 여 51명)이다. 바둑에서 프로가 되려면 사법고시보다 더 높은 벽을 뚫어야 한다.
‘영원한 승자는 없다’는 것이 인간사의 이치라 하지만 세계바둑의 패권을 놓고 한‧중 각축전은 벌써 시작됐고 한국이 밀리는 경우도 많아졌다. 한국에서도 바둑 영재를 키워내야 한다는 시대적인 요구가 있게 됐다. (이 글은 한국기원의 ‘한국기원 약사’, 손종수 바둑컬럼니스트의 ‘한국바둑의 성장과 발전’ 등의 자료를 토대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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