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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명의 제육볶음(11)...미여지벵뒤 그리고 김영갑 단상

우리나라 사람들의 특성 중 하나가 남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배타성이 아닐까 싶습니다. 여기서 남이란 다양성을 의미합니다. 소위 대세나 거대집단은 이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집단에는 아부·아첨하며 그들의 노예를 자청하기도 하니까요. 바로 사대이며 이에 따르는 부역행위입니다. 상대인정이 아니라 종속 또는 굴종일 뿐입니다. 대중미디어의 사회엔 유행도 이에 해당될 것입니다.

 

다양성의 인정이란 남의 작은 것까지도 그의 특징으로 알고 수용하려는 자세에서 시작합니다. 남을 부정하는 것은 니체가 말한 ‘작은 우월감’에서 비롯된 졸렬함이기 쉽습니다. 제주도도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가 즐겨먹는 요리 중에 제육볶음이 있습니다. ‘제’는 ‘저’에서 유래되었으며 돼지의 한자어입니다. 제육볶음은 돼지고기볶음이 되겠지만 그 안엔 각종 채소류가 섞입니다. 이래서 볶음인데, 기름 많은 돼지고기의 느끼함을 채소를 더해 줄일 수 있고, 채소만으로는 부족한 영양소를 돼지고기로 보태 더 맛있고 더 영양 많은 음식으로 재창조된 음식이 제육볶음입니다.

 

보탬의 미감과 미학을 제육볶음에서 봅니다. 이 음식에서 이름을 따와 제주도와 육지의 볶음, 역시 제육볶음을 제주도 땅에서 기원해봅니다. 음식의 제육볶음이 각기 전혀 다른 것들이 보태져 색다르면서도 더 고귀한 새로운 것으로 창조되었듯이, 문화의 제육볶음은 제주도의 특성과 한반도 육지의 특성이 어우러져 더 독특하고 더 멋진 창조적 문화를 기대하게 합니다. 서로 이질적인 것들이 그 특별한 성질을 버리지 않고도 버무려져 새롭게 만들어질 때 이것을 우리는 재창조라고 말합니다.

 

제주어에 ‘미여지벵뒤’라는 말이 있습니다. 제주도의 큰 굿이 끝날 무렵 이승의 옷을 다 버리고 저승으로 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무대가 되는 곳, 이승의 것들을 다 놔두고 가는 곳이 바로 ‘미여지벵뒤’입니다. 제주도에서도 김녕과 가시리·조수리 등지에서 주로 쓰였던 말로써, 아무 거침없이 탁 트인 널따란 벌판을 의미합니다. 이곳이 바로 이승과 저승 사이입니다.

 

제주도 중산간을 돌다보면 정말 앞이 탁 트인 시원한 초원을 만날 수 있습니다. 제주말 육성목장과 같이 목적을 위해 특별히 조성된 초원이 아니더라도 제주도엔 낮은 능선을 따라 펼쳐진 구릉 벌판이 많습니다. 이런 자연환경이 굿에서도 나타나지 않았을까 참고해 봅니다.

 

‘미여지벵뒤’란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제주도와 육지의 볶음, 즉 제육볶음을 떠올렸습니다. 섞음이 무조건이 되어버리면 이것도 저것도 아닌 잡탕 또는 돼지죽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음식의 제육볶음처럼 섞음이 보탬이 되려면 물질들의 특성이 조화롭게 섞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제육복음이 돼지고기만 먹는 것보다, 채소만 먹는 것보다 더 맛이 좋은 것은 단지 섞어서가 아니라 보태져서 입니다.

 

 

지금 제주도는 '무조건 섞기'의 장(場)이 되어가고 있는 듯해 아쉽고 안타깝습니다. 더 솔직히 말하면 불안합니다. 이 좋은 곳이 망가질까봐서 입니다. 제주도다움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고 나만이 아니라 제주도를 진정 사랑하는 사람들은 안타까움을 넘어 탄식하기까지 합니다. 제주도가 사라지고 있다는 거지요. 무조건섞기의 발단은 경제적 이익이 무엇보다 우선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경제적 이익 안에는 단지 측량할 수 있는 재물만이 아니라 측량이 힘든 정신적 자산도 포함됩니다. 그러나 정신적 자산은 무시되고 수치로 계산되는 경제적 타산만 중시되고 있습니다. 니체가 말한 ‘작은 우월감’도 여기에 해당될 것입니다. 작은 우월감은 진정한 가치를 볼 수 없게 만들며 결국 자멸을 초래하고 맙니다. 경제란 단어는 ‘경세제민’의 약자입니다.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한다는 말이지요. 따라서 수치로만 계산되는 경제는 진정한 경제가 될 수 없습니다.

 

제주도로 이주해 와서 살려는 사람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한 마디, ‘미여지벵뒤’를 먼저 보고 와라! 입니다. 제주도의 너른 들판을 보면서 졸렬하고 조악한 ‘작은 우월감’을 던져버리고 제주도에 안주해 오라는 말입니다. 이는 자기 자신의 삶에도 유익합니다. 배타를 내려놓고 이해의 정신으로 살라 하며 ‘미여지벵뒤’가 일깨워줄 것입니다. 더불어 좋은 세상의 시작입니다.

 

제주도에 와서 더 고립되고 더 자신에게 천착하며 사는 사람들을 자주 보게 됩니다. 겉은 어울리고 있지만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자신을 더 고립시켜 놓고 사는 것이 보입니다. 이는 상대혐오나 타인비하로 나타나는데, 이들은 혼자 있을 때 허무주의(염세주의)에 빠지곤 합니다. 남을 무시 또는 비하함으로써 자기를 보호하려는 또 다른 열등감입니다. 이들은 자기의 장점을 풀어 내놓으려고 하지 않고 자기의 장점으로만 주장할 뿐입니다. 니체는 이것을 잘못된 이주의 결과라고 분석했습니다. 니체는 인도인의 경우를 예로 들었습니다. 다른 기후조건에 적응하지 못한 생활에서 허무주의가 나타났다고 본 것이지요. 보헤미안을 두고 한 말입니다. 즉 떠돌이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염세·허무를 보았던 것입니다.

 

제주도엔 없을까요?

 

‘미여지벵뒤’에서 한판 굿을 벌이는 일은 제주도에로의 이주자들이 육지에서 얹어온 때들을 내려놓는 일입니다. 그리고 제주도를 품어 안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주자들의 ‘미여지벵뒤 굿’ 이런 의식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자연이 좋다하는 마음은 순백해야하지 않을까. 이래서 왔다면 자연스러워야 하고 이렇게 자연에 동화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물론 여기도 생활의 터이기 때문에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자연이 좋아, 제주도의 여유로운 분위기가 좋아 왔다면 경쟁이랄지 욕심이랄지 이기적 욕구는 자기의 어깨에서 ‘미여지벵뒤’ 위 벌판에 내려놓아야 제 몸이 가벼워지지 않을까. 삶의 기준이 되어왔던 육지의 잣대를 내려놓을 때 제주도가 더 자기 것이 될 수 있을 것 같지 않을까요.

 

다 처분하고 제주도로 와 살다가 다시 육지로 돌아가고만 상당수 사람들에게서 받은 소회는 바로 이러한 결핍이었습니다. 충분히 내려놓지 못하고 끌어안고서 더 채우려는 욕심, 이것은 풍족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정신적 결손이요 따라서 공허를 유발하기에 결핍이 됩니다. 인도인들의 유럽떠돌이, 보헤미안은 욕심의 자리에 낭만을 채웠기에 그들만의 음악이나 생활패턴을 창출하긴 했습니다. 이들의 낭만은 허무나 염세를 초월할 수 있게 하는 ‘다 버림’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여기서도 미여지벵뒤는 필요합니다. ‘다 버리기’는 자기몰입의 시발점이 될 것입니다.

 

문득 충남에서 제주도로 이주해왔던 사진가 고 김영갑(1957~2005)님이 떠오릅니다. 그가 좋아했다는 용눈이오름이나 알오름, 둔지봉 역시 미여지벵뒤입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미여지벵뒤란 이 말을 오래 전부터 써왔다는 가시리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오름들입니다. 그의 삶은 떠돌이 같았지만 그만큼 제주도에 안주하고 자기에게 안착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가 생전에 자주 말해온 ‘제주도사랑’이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다 버리고 한 가지에 집중했기에 사랑을 오래오래 받고 있는 게 아닐까. 내주는 사랑은 되돌아 받는 사랑이 됩니다. 여인의 젖가슴 같은 미여지벵뒤가 김영갑을, 우리를, 나를 감싸고 보듬어주는 것이 결국 사랑임을 이제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오동명은?=서울 출생.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사진에 천착, 20년 가까이 광고회사인 제일기획을 거쳐 국민일보·중앙일보에서 사진기자 생활을 했다. 1998년 한국기자상과 99년 민주시민언론상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사진으로 세상읽기』,『당신 기자 맞아?』, 『신문소 습격사건』, 『자전거에 텐트 싣고 규슈 한 바퀴』,『부모로 산다는 것』,『아빠는 언제나 네 편이야』,『울지 마라, 이것도 내 인생이다』와 소설 『바늘구멍 사진기』, 『설마 침팬지보다 못 찍을까』 등을 냈다. 3년여 전 제주에 정착, 현재 제주의 한 시골마을에서 자연과 인간의 만남을 주제로 카메라와 펜, 또는 붓을 들고 있다. 더불어 한라산학교에서 ‘옛날감성 흑백사진’을, 제주대 언론홍보학과에서 신문학 원론을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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