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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현장-남기고 싶은 이야기]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30)

‘인사(人事)는 만사(萬事)’라고 했던가? 1993년 12월 말 제주도지사로 부임하면서 주마등처럼 많은 일들이 내 뇌리를 스쳐갔다. 행정고시에 패스, 제주도청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한 6년여 시간과 청와대와 농림수산부에서 근무했던 시간들이다. 영광도 있었지만 제주출신이란 한계에 갇혀, 육사중퇴란 학력의 굴레로, 줄을 잡지 못해 소주잔을 기울이던 과거가 떠올랐다. 그저 능력과 일로 입증하고 싶었지만 잘 되지 않아 찬바람을 맞으며 괴로워했던 기억들이다. 물론 육사동기들의 권력(?) 덕으로 일약 승진가도를 탔던 행운도 있었다. 하지만 측근·정실·보복인사의 폐해로 누구 못지않게 고통을 겪었기에 그런 ‘리더’가 될 생각은 애당초 꿈도 꾸지 않았다. 내 고향 제주를 번듯한 ‘대한민국 초일류 땅’으로 바꾸고 싶었을 뿐이다. 4년3개월여 지사 재직시절의 인사 비화를 밝힌다.

 

 

제주도청에서 1967년부터 73년까지 6년간 근무했다. 행정고시에 합격한 뒤 첫 공직생활을 시작한 내 친정이다. 93년 말 그 친정으로 돌아와서 보니 그 시절 간부가 돼 있거나 6급 주사와 7급 주사보만 하더라도 거의 아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서두에서 말했듯이 처음부터 측근·정실인사는 철저한 배제가 내 마음속에 박힌 굳은 의지였다. 또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게 나와 가까운 사람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와서 보니 이미 시장과 군수 등 고위직 인사와 관련해선 인사안이 이미 전임지사에 의해 내무부에 상신된 상태였다. 전임자 입장을 우선 존중했다. 그대로 하라고 지시하고 난 뒤 그 이후의 인사를 위한 제주도청 조직분석에 들어갔다.

 

면면을 살펴보고 나자 ‘기가 차다’란 생각을 했다. 그동안의 인사결과를 보니 능력과 일 중심의 인사와는 판이하게 달랐기 때문이다. 조직으로만 놓고 봐도 당시 가장 힘 있는 부서로 통하던 ‘내무국’ 중심의 인사가 기본틀이었다. ‘중단 없는 제주도의 발전’을 꾀하던 나로선 그 시절 경제발전과 환경, 복지분야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던 터였는데 어찌 보면 지원조직이라 할 수 있는 내무국이 너무도 비대하고, 또 그 내무국에 배치된 공무원들만 유독 ‘승진잔치’와 ‘영광’을 독식하고 있었다. 안될 말이었다. 능력 있는 공무원들은 실무부서로 전진배치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무국 중심 사고의 틀을 깨겠다고 마음 먹었다. 물론 내무부 등 정부부처로 파견 갔다가 돌아온 이들이 승진하는 관행도 제거하겠다는 게 내 방침이었다.

 

내무국에서 이른바 ‘잘나가는’ 공무원들을 수시로 빼 경제와 환경, 복지분야 실·국으로 배치했다. 사무관급 계장들이 가장 선호하는 요직이 내무국 내 행정계장이나 인사계장 자리였는데 그런 행정직 사무관들을 수시로 빼내 다른 자리에 배치했으니 앞에서 말은 하지 않지만 뒤로는 말들이 많았다. ‘좌천’이라는 둥 ‘인사에서 물 먹었다’, ‘전임도정과 가깝다고 밀려났다’는 등 오해와 불만·비난의 목소리를 수시로 들었다. 물론 불안해 하는 공무원들도 많았다. 하지만 생각대로 밀고 나갔다. 다만 다른 실무국에 배치된 공무원들이 성과를 내면 확실히 승진을 보장해줬다. 공무원들이 생각하는 서열도 안중에 없었다. 오직 우리 제주도를 위해 필요한 공무원이라면 1단계가 아니라 2단계를 뛰어오를 수도 있도록 해줬다. 내무국이 아닌 실무국에 배치될 때 불만이었던 이들은 나중 내무국에 잔류했던 공무원 보다 인사상 더 혜택을 받았다. 승진에서도 더 앞섰다.

 

해보지 않은 일들을 해야 할 ‘명예로운’ 공무원들이기에, 그동안의 관행을 벗어나야만 제주발전의 중차대한 운명의 걸린 일을 할 에너지가 솟아날 수 있기에 ‘개혁’의 길을 걸어야만 할 나로선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나로선 ‘정실인사’는 철저히 배제해야 할 덕목이었다. ‘이율배반’적이고 ‘위선’에 사로잡혔다면 아랫사람의 신뢰를 얻지 못해 결국 가야할 길을 가지 못할 것이란 나의 절박함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나와 밀접할 수 밖에 없었던 인연의 고리들은 철저한 ‘역차별’을 감내해야 했다.

 

 

대표적인 게 내 사촌동생이다. 내 사촌동생 신완범은 93년 내가 관선지사로 부임할 때 7급 주사보였다. 하지만 그는 98년 내가 선거에서 낙선, 도지사직을 퇴임할 당시에도 7급 주사보였다. 승진을 안 시킨 것이다. 어린 시절 부모와 떨어져 동가식 서가숙하며 살던 내가 할머니와 살며 한솥밥을 먹고 자라 친형제나 다름 없던 동생이다. 지사로선 마음만 먹으면 어렵지 않은 일이었지만 난 철저히 그 동생을 배제했다. “네가 그러면 지사인 내 권위가 서겠냐?”며 아예 동생의 승진은 머릿속에서 지웠다. 참으로 미안한 마음이다. 그저 지금은 공직을 떠난 그가 “그 시절 형님의 마음을 이해합니다”고 허허롭게 웃어주니 고맙고 대견할 뿐이다. 하지만 그는 내 도정개혁과 인사개혁을 위해 결국 희생당한 피해자인 게 사실이다.

 

관행적으로 사고하던 일을 깬 사례는 또 있다. 민선 1기 시절이다. 내무부로 파견 갔던 박모 사무관이 다시 도청으로 복귀했다. 내무부 파견생활이 끝나고 오면 계급이 하나 더 얹어지던 게 그 시절 관행이었다. 그도 아마 당연히 서기관으로 승진해 도청의 과장자리를 꿰찰 것으로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준 자리는 여전히 계장이었다. 엄연히 민선시대가 열린 마당에 내무부 등 중앙부처에서 근무했다는 이유로 어떤 특혜를 기대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는 소리였다. 그보단 제주도 현장에서 성실히 일한 공무원을 더 우선하겠다는 선언이었다. 그는 이리저리 손 쓰고 내무부 파견을 다녀오면 자동으로 승진하던 관행과 사고를 타파하기 위한 시범타였다.

 

인사에서 물을 먹이는 게 내 취미가 아니다. 요즘 ‘선거공신’이란 말이 심심찮게 들린다. “‘점령군’들에 의해 전임도정 인사들이 마구잡이로 찍혀나가 이제 학살이 사실상 마무리됐다”는 말도 들었다. 위해를 당할 가능성이 없는 은퇴인사이기에 본인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말하고자 한다. 고계추(전 농수산국장, 제주도지방개발공사 사장 역임)! 그는 항간에 ‘내 사람’으로 불린다. 하지만 엄연히 그는 1995년 민선 1기 지방선거에서 내 상대편에 가담했다. 고교동문이란 이유로 그는 노골적으로 상대후보 선거운동을 했다. 하지만 그만 내가 95년 선거에서 당선됐다. 후일 들은 얘기지만 그는 상당히 불안감에 시달렸다고 한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민선 1기 지방선거 이전 수산과장으로 재직하던 그를 1년여 유심히 지켜봤다. 능력에 성실을 더한 사람이었다. 서기관급 공무원으로서 일본에 출장 갈 기회가 있으며 수산분야가 아니어도 지역개발에 관련된 자료를 입수해서 친절히 한국말로 번역하고 지사인 나에게 갖고 와 ‘읽어보시고 참고하시라’고 내밀 정도였다.

눈 여겨 보던 그가 내가 당선된 뒤 ‘잘려나갈’ 일을 걱정하고 있는 눈치가 안타깝게 여겨졌다. 당선된 뒤 난 민선시대에 걸맞은 직제개편을 서둘렀다. 농수산국 안에선 기존 수산과와 어업지도과를 통합하는 직제개편이 단행됐다. 고계추씨는 수산과장이었고, 어업지도과장은 내가 다닌 오현고 동문 선배였다. 고 과장은 그때 당연히 자신이 ‘아웃’될 걸로 생각했다. 당시 강천종 제주교역 사장(후일 제주타임스 사장 역임)을 통해 그는 청탁을 해왔다. “일본으로 1년간 직무연수를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거절했다. 아마 그로선 좌불안석이었을 것이다. 그가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가고 짐을 꾸려야 될 지 모른다고 생각할 무렵 난 고 과장을 통합 수산과장으로 발령냈다. 능력만을 놓고 여러모로 저울질한 결과지 아무런 이유가 없다. 물론 나로선 그 이유로 퇴직한 고교선배의 비난과 야유를 감내해야 했다.

 

 

그에게 닥친 인사스토리는 그게 다가 아니다. 통합 수산과를 출범 시키고 몇 달 뒤 도청 전 실·국장에 대한 공모제를 시행했다. 민선 1기 시대에 걸맞게 줄대기 인사를 하지 말고 국장으로서 갖고 있는 포부와 직무수행방안을 제시하면 검토 뒤 국장으로 임용하겠다는 것이다. “인사위원회 심의를 거쳐 결정이 나오면 도지사는 따르겠다”는 방침도 언론에 밝혔다. 이 시기가 돼도 고 과장은 마음을 풀지 않고 있었다. 사실 그의 능력을 믿고 있었다. 그를 집무실로 따로 불렀다. 국장 공모에 신청했냐고 물어보니 “신청서를 내지 않았다”고 그가 말했다. 슬며시 그에게 “신청서를 내라”고 말했다. 결국 그는 첫 국장공모에서 당당히 국장직위에 올랐다. 통합과장이 되고 나서 몇 달만이었다. 아마 그는 황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솔직히 특정 편을 의식해서 끌어안기도, 아니면 제거하려고도 하는 어떤 마음도 갖지 않았다. 그 시절 내 염두엔 ‘감귤생산조정제’ 시행이 당면현안이었고 그는 적임자였다. 물론 실무국장으로서 그는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능력이 돋보여 눈 여겨 보던 이들은 또 있다. 초임 공무원 시절 만난 이들이다. 내가 도청에서 지역계획과장과 기획관을 하면서 만난 이들이다. 대부분 기술직 공무원들이다. 내가 재임하던 시절 김인중, 조여진(전 환경건설국장), 이성구 과장(전 교통행정과장)으로 모두 한림공고 출신이다. 그 시절 내 기억은 적어도 제주도 개발업무에 결정적 기여를 한 공직자들은 전부 한림공고 출신이었다. 토목·건축·기계 3분야다. 제주도 개발과정에서 큰 역할을 한 이들이 이 학교 다수의 동문들이란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내가 눈 여겨 본 사람이 그들 중 바로 그 세 사람이다. 능력과 열의가 출중했던 걸로 기억하는 그들이 내가 지사로 부임해보니 고작 사무관급 계장을 맡아 일하고 있었다. 오자마자 난 그들을 과장으로 발령냈다. 이유가 있다. 기억하는 일화다. 조여진 과장은 1970년대 초 8급 토목서기보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는 그 시절 일을 저질렀다. 제주도개발 작업을 시행하면서 5만분의 1, 2만5천분의 1 지도를 쓰고 있는데 5천분의 1로 확대된 지도가 필요했다. 그런데 그 조 서기보가 수작업으로 5천분의 1 도면을 그려온 것이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서 밤샘작업을 하면서 끙끙대며 그 일을 해낸 것이다. 그때 이승택 지사는 그게 너무도 기특했던지 해당 과에 금일봉을 줬다. ‘짠돌이’로 알려진 그 분이 그렇게 했다면 대단히 감격했다는 것이다. 물론 내가 지역계획과장 시절 관광운수과장을 겸직하면서 만난 김인중, 이성구씨 역시 열의와 실력이 그에 못지 않았다.

 

특히 이성구 과장의 경우는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또 있다. 그가 에너지계장을 하던 시절이다. 하루는 미국의 모기업 인사들이 찾아와 면담을 요청했다. 제주에서 풍력발전사업을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가만히 설명을 들어보니 우리라고 못할 것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 당시 우리나라 기술수준은 고작 연구와 실험을 반복하고 있는 단계였다. 한림 월령지구에 시범연구단지를 만들어 결과를 살펴보고 있는 수준이었다. 미국의 손님들에게 말했다. “우리나란 미국과 다르다. 우린 발전하면 전부 한전이 매입해 독점적 소비자에게 공급한다. 그렇기에 미국처럼 사설전기업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렇게 말하고 그들을 돌려보냈다. 그리곤 곧바로 이성구 계장을 찾았다. “미국친구들이 이런 제안을 하고 갔는데 우리가 할 수 있겠느냐”고 그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는 뜸도 들이지 않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있습니다”고 대답했다. “경허면 허게!”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게 국내 첫 상업용 풍력발전단지인 구좌읍 행원 풍력발전단지다. 96년에 풍력발전시설을 준공했다. 대한민국에서 자치단체 주도하에 만들어져 상업운전에 들어간 최초의 풍력발전이다. 그 시절엔 그렇게 구좌읍 행원리 공유수면 10만평을 확보해 그보다 더 큰 아시아 최대규모의 풍력발전단지를 만들어보고 싶은 꿈도 가졌다. 어찌됐건 그런 일을 척척 풀어내는 이성구 과장의 추진력과 배짱, 목표완수 능력을 지켜보는 이로서 그의 승진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는 그 외에도 다른 일도 해냈다. 당시 일주도로가 171km이던 때 버스가 시내구간이 있고, 시외구간이 따로 있을 때다. 이걸 단일화 시키는데 기여한 게 그다. 환승만 하면 가능하도록 만들겠다는 구상이었는데 그걸 그가 해냈다.

 

턱없는 일로 힘겹게 고통받는 공직자가 있다면 다시 기를 펴도록 해줘야 하는 것도 리더의 덕목이라고 난 초임공무원 시절 상급자로부터 누누이 들었다. 나에게도 다행히 그럴 기회가 왔다. 관선지사로 내려와서 보니 운수과장을 하던 고경완씨가 뇌물수수 혐의인 독직사건에 걸려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내가 부임하기 전 2~3년 동안 재판과정을 거쳤고 결국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아 누명이 벗겨져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런데 그 시절 내무국장은 제대로 된 보직을 못받고 있던 그를 지방공무원교육원으로 발령내는 안을 들고 왔다. 서기관급인데 그런 안을 들고 왔길래 “어떤 사림이냐?”고 물어보니 들어서 알게 된 스토리다. 좀 역정을 냈다. “재판받느라 얼마나 고통이 심했겠는가. 보상은 못할 망정 그러면 안된다”고 잘라 말했다. 그러자 국장은 “검찰 때문에 안된다. 무죄 받아서 검찰 속이 안 편하니 검찰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이었다. 불같이 화를 냈다. “그거 말이 되는가. 검찰 무서워서 우리가 인사도 못해”라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는 그를 일부러 요직인 총무과장으로 배치했다.

 

 

인사문제와 관련, 또 다른 케이스도 이제 말하련다. 지금도 여성 공무원들이 욕할지 모르지만 당선되고 나서 민선 1기 시절 특채로 영입한 오옥화 과장의 사례다. 유일하게 인정한다. ‘선거공신’이란 이유로 임용했다고 한다면 사실관계에서 맞다고 본다. 하지만 그는 민선 1기 내 선거를 돕기 전 제주에서 여성법률상담소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전문성에서 그는 여성공직자 사회에서 새바람을 불러 올 것으로 난 기대했다. 남성 공직자사회 처럼 그 때 여성공무원도 위계질서가 있었다. 그런데 그걸 깨고 싶었다. 오 과장을 여성정책과장으로 앉히면서 그때 가정복지국장이었던 여성공직자를 내보냈다. 물론 반발이 컸다. 침체된 여성 공무원 사회의 신진대사를 위한 조치였다. 그리고 오 과장에겐 “제주도가 여다(女多)의 섬인데 여성 공무원들이 제대로 역할을 못하고 있다.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라. 전권을 준다”고 했다.

 

물론 나로선 도청 전 조직이 ‘일 중심 능력위주’의 시스템 조직으로 개편할 필요가 있었다. 민선시대가 도래한 마당에 과거처럼 내무부의 개편안 대로 따라갈 이유도 없었다. 당시 모 내무부 장관이 제주도에 초도순시차 오자 보란 듯이 장관석과 도지사석을 동등 배치한 것도 그걸 제주도내 공무원에게 알리는 신호였다. 과거부터 비리와 복마전의 온상이라 여겼던 도청 내 내무국을 폐지했다. 대신 자치행정담당관을 따로 두고 총무과를 내무국 소속에서 행정부지사가 직접 관장하는 독립부서로 개편했다. 이어 실무형 국을 보강하면서 농수산국을 만들고, 환경국을 독립시킨 뒤 그 속에 산림과를 뒀다. 또 지역경제국을 재정경제국으로 개편했다. 철저히 경제와 환경, 복지 중심으로 가겠다는 입장 표명이었다. 더불어 그동안 승진 등 인사상 이익을 독식하고 있던 행정직의 자리를 기술직에 넘겨주는 작업을 벌였다. 대표적인 게 강정효 초대 제주개발공사 사장이다. 기술직 출신인 그를 기획관리실장 자리에 앉힌 것이다. 그가 토목직 공무원 사상 최초의 기획관리실장이다. 행정직이 아니면 꿈도 못 꾸는 시절이다. 그 인사로 그동안 난마처럼 얽혀 있었고, 각종 승진요인에서 적체돼 있었던 기술직 공무원들의 승진 숨통이 모두 트였다. 토목직 농업직 수산직 등 기술직 중심의 인사를 한 이유는 간단하다. 제주도는 그래야 일을 하는 분위기가 될 것이란 판단이었고 결과는 예상대로 흘러갔다. 물론 그런 일은 도청 내 만이 아니라 산하 사업소 영역으로도 확대됐다. 초기 공사설립 단계에서 김인규 기획관리실장을 초대 사장으로 보내고 난 뒤 본격 공장설립 과정에 들어가자 난 2대 사장으로 강정효 기획실장을 보냈다. 제주교역은 코카콜라 한국지사장 출신을, 제주국제컨벤션센터는 대우그룹 하노이호텔 사장을 하던 김경원씨를 발탁했다. 회의장 중심의 리조트형 컨벤션센터는 국내 초유의 일이기에 서울상대 출신인 그를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에게 매달리듯 졸라 영입했다. 그 당시 직원들 역시 전국 공채로 우수인재를 선발했다. 한국관광업계 최고대우를 약속하고 30여명을 뽑았다. 하지만 알아보니 이제 그 인력은 온데 간데 없다고 한다. 기막힌 일이다.

 

물론 그 당시에도 일련의 인사개혁 조치가 그렇게 순탄하게 갈 리가 만무였다. 나로선 ‘걸리적 거리는’ 세력들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좀 더 강도가 높은 2단계 인사개혁에 들어갔다. 부이사관급 7명을 한꺼번에 공로연수를 보냈다. 정년이 1~3년 남은 사람들이었다. 남제주군수를 지냈던 김모 국장도 그 배를 탔다. 고향인 조천읍 선배다. 황모 국장도 그렇게 공로연수를 떠나야 했다. 내가 중학생이던 시절 우리 동급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쳐주기도 한 분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오로지 개혁만을 생각하다 모두에게서 적이 된 것 같은 회한이 남아 있다. 그때 다진 내 신조는 ‘중단 없는 전진’이었다. 전투에 임하며 급박한 전장의 상황에 따라 전투력 재정비만을 염두에 두다 보니 음으로, 양으로 나를 보좌하던 이들까지 ‘개혁’의 미명 아래 고지도 밟기 전에 스러지도록 한 장수였던 셈이다. 내 불찰이자 과욕이 있었던 점을 솔직히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도 죄송스런 마음이다.

 

나의 과오는 또 있다. 지금 무기계약직으로 명칭이 바뀐 그 시절 일용직 문제다. 도청 내에서 일하던 그 일용직들을 살펴보니 한 40명쯤 됐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인사서류 면면을 살펴보니 이른바 ‘빽’이 좌지우지한 얼토당토 않은 인사파일이었다. 이리저리 살펴보니 대개 도청의 고위공무원, 도의회 의원, 언론, 경찰 등등의 권세에 힘입어 그런 기관과 인사들의 청탁에 의해 도청에 들어온 케이스였다. 물론 대부분 여성들이다. 몇몇을 만나 근무자세와 미래계획을 들어보니 솔직히 한심했다. 그저 도청에서 근무하다 배필을 만나거나 혼인 전에 그저 소일이나 하는 자리로 일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난하지만 능력 있는 사람들이 와서 일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일용직은 예산편성을 하지 않으면 없어지는 자리다. 예산편성을 하지 않았다. 그들에겐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었을지 모르지만 나로선 ‘일하는 분위기’로 도정을 개편해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지위고하를 막론할 처지가 아니었다. 물론 ‘부당해고’라며 노조 그룹의 강한 반발을 샀다. 지금 이름만 대면 알 도의회의 고위직이 찾아와 거세게 항의하기도 했다. 이렇게 하루 아침에 직장을 잃은 일용직 공무원엔 훗날 안 일이지만 민선 1기 선거에서 날 도와준 이의 자녀까지 포함돼 있었다. 이런 식의 일촉즉발의 인사로 그후 나는 여러 경로에서 망가졌다. 하지만 제주도정은 그후 제대로 된 시스템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도청 공무원이란 선민의식으로 도민 위에 군림하려는 자세도 사라졌다. 오로지 일과 결과, 능력으로 보여주겠다는 중·하위직 공무원들의 박수소리도 간간히 귀에 들려왔다. 그들이 이젠 나의 업적이자 치적이라고 불린 일들을 전면에 나서 해낸 진정한 공로자란 걸 난 잊을 수 없다.

 

미안한 점은 또 있다. 그렇게 ‘능력과 일’을 중시했으면서 정작 능력을 갖춘 공무원들을 제대로 대접하지 못한 무안함도 있다. 재임시절 고모 계장이 한걸음에 내 집무실로 달려왔다. ‘한라산눈꽃축제’를 구상하다 여러 가지 단점이 노출돼 더 검토가 필요하다고 판단, 유보 쪽으로 가닥을 잡아가던 때였다. 그는 다짜고짜 “못하게 했습니까?” 그렇게 물어봤다. 기가 찬 얼굴로 “그랬다”고 하자 그는 “그러면 지사님! 버릴 셈 치고 5천만원 주십시오”라고 들이댔다. 그 돈이면 축제 해낼 수 있다고 우기는 것이었다. 일단 맡겨보기로 하고 준비상황을 지켜봤다. 솔직히 좀 놀랐다. 제주도 공무원 수준에서 우리나라 기상데이터를 못 믿겠다고 일본 오키나와 미군기지의 기상자료와 데이터를 뒤져가며 행사준비를 하던 것이었다. 짐짓 다시 보던 차였는데 그들은 뭉치이벤트 김영훈 대표를 끌어들였다. 그리고 기획서를 내밀기에 훑어봤더니 참신성이 돋보였다. 그래도 못 미더워 나중 새벽에 기획사 사무실을 한번 들이닥쳐 보니 이들이 외국으로 전세기까지 띄우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것이었다. 게다가 국내 각국 외교사절단까지 초청하고 있었다.

 

축제는 성공적이었다. 특히 그 때 행사장을 찾은 외국인들은 환호했다. 그때 외국 대사 중 한 사람이 주한외교사절단 스키단장이었다. 그 친구의 얘기가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그는 “제주도에 스키장이 없는 게 이상하다. 눈 품질이 알프스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전 세계적으로 공항에 내려서 20분이면 눈 속에 빠지는 곳은 여기 밖에 없다. 근데 왜 스키장 없나?” 눈꽃축제 행사 한번으로 머리를 얻어맞은 느낌을 가졌다. 행사가 끝나고 어승생 밑 노루오름에 60ha 규모의 스키장 조성을 구상했다. 겨울엔 눈 스키, 여름엔 잔디스키가 가능하도록 만들어 볼 요량이었다. 뒤이어 벌어진 논란은 예상보다 컸다. 물론 그 결과는 지금의 현실이다. 물론 행사를 잘 치른 그 공무원에게 특별한 인사상 이익을 주지도 못했다. 오히려 그가 ‘내 사람’으로 분류돼 지금도 힘겹다는 말이 들려 안타까울 뿐이다.

 

 

안타까움은 그 정도만이 아니다. 뭉치이벤트를 운영했던 김영훈 대표는 그 행사 이후 망했다. 이돈 저돈 다 끌어다 썼는데 도에서 보전해 준 돈은 푼돈이었고, 후속 프로젝트의 진행도 없었기에 한방에 무너져 버린 것이다. 제주은행에 근무하던 부인은 빚으로 시달리다 돈 벌 궁리로 일본으로 떠났다. 새까맣게 모르던 사실인데 지난해 5월 초 우연히 그를 만나 알게 됐다. 하루는 페이스북을 통해 나에게 김영훈이라면서 한번 뵙고 싶다고 글을 남긴 이가 있었다. 퍼뜩 그 사람이라 생각했다. 지난해 5월21일 우리 부부를 ‘부부의 날’이란 명목으로 초청해줘 만났다. 함께 식사하던 중 그가 울면서 그 때의 상처와 고통을 나에게 얘기했다. 듣는 나로서도 쓰라렸다. “왜 그 시절 그런 얘기를 하지 않았느냐”고 되물었더니 “어떻게 우리가 지사에게 접근합니까?”란 소리였다. 내가 ‘인의 장막’에 가려졌던 것이다. 그런 그는 지금 재기했다. 아내도 그 회사에서 전무역을 맡아 성실히 일하고 있다. 지금이라도 다시 일어선 그를 보게 돼 다행스럽고 무거운 마음의 짐이 조금이라도 가벼워진 것 같아 고마운 마음이다.

 

지금껏 인사문제를 거론하며 말한 건 사실 지금부터 하려던 얘기를 위해 동원한 비유와 수사(修辭)일지도 모른다. 아마 공직자들 사이에선 한동안 ‘비전향 장기수’란 표현이 회자된 적이 있다. 지금도 그런 용어가 돌고 있다면 참으로 기가 찰 일이다. 별다른 연고도 없이, 학연과 지연, 혈연의 굴레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내가 능력으로 대접했던 공무원들은 정작 내가 98년 민선 2기 선거에서 낙선하자 흡사 단두대에 줄을 서는 처지가 됐다. 강석정 총무과장이 농촌진흥원 총무담당관으로 좌천됐다. 내 재임시절 총무과장이란 이유로 심복으로 낙인찍힌 것이다. 고상윤 내무국장은 도 산하 사업소인 문예진흥원 부장으로 발령났다가 그 뒤 다시 직제도 없는 북군 기획담당관으로 쫓겨갔다. 최근 언론에 나온 전임 도정 공보관이 찍혀나가는 과정과 닮은 꼴 같기도 하다. 그것만이 끝이 아니었다. 소위 ‘신구범 편’에 섰던 공무원들을 내 후임 지사는 개별적으로 만나거나 심복을 동원해 모두 접촉했다. 그리곤 “자! 지금부터 충성을 맹세해라. 나한테 충성맹세하면 보직을 준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면 보직은 없다.” 그렇게 겁박했다는 것이다. 그 공포 분위기에 충성맹세서약서까지 내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봐도 ‘바보 같은’ 세 사람은 그걸 거부했다. 이성구, 김동화, 김화옥 세 명의 과장급 서기관이다. 그러자 그 3명은 보직도 받지 못하고 도청 별관 귀퉁이 사무실에 처박혔다. 어쩔 수 없이 다들 전향을 했는데 이들은 끝까지 버틴 것이다. 그중 김화옥 과장은 결국 면직처분까지 받았지만 소송에서 ‘부당처분’으로 승소했다. 그들이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나로서도 어쩔 수 없이 굴복했을 것 같은 기분이다. 어찌 보면 나보다 더 독한 사람들이란 생각마저 있다.

 

‘신파의 패거리’로 몰려 고통을 겪은 이가 있을 지 모르지만 내 도정시절 전임 도지사 인물이라고 해서 고통을 준 적은 없다. 일과 능력이 우선시되는 풍토를 만들고 싶었을 뿐 나와 특정 학맥과 지연의 고리, 혈연의 굴레에 놓였던 이들은 오히려 역차별을 당했다. 그런 그들은 내 재임시절 그렇게 개혁의 미명 하에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지 못했다. 그런데 후임 도정에선 다시 내 인연의 끈에 있다고 모진 탄압과 굴복을 강요받아야 한다면 이게 탕평이고 도민화합인가? 이게 미래를 향한 제주도정의 발걸음인가? 이런 건 인사가 아니라 패거리들이 모여 하는 술수이자 작당이라고 하는 표현이 더 맞다. 만 가지의 일을 그르치는 정도만이 아니라 우리 고향 제주를 썩어 문드러지게 만드는 일이었다. 더 기가 찬 건 그런 일들이 지금도 횡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참으로 통탄스럽다.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

 

=1942년생. 오현고를 나와 육군사관학교 4년을 중퇴, 1967년 5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직자로 입문했다. 제주도 기획관, 주이탈리아 한국대사관 농무관, FAO(국제식량농업기구) 한국교체수석대표, 농림수산부 축산국장, 농업구조조정정책국장, 기획관리실장을 거쳐 YS정부 시절인 1993년 12월 제29대 제주도지사로 취임했다.

 

이어 첫 민선 지방선거인 95년 6·27선거에선 무소속으로 출마, 당선돼 31대 지사를 역임했다. 그러나 98년, 2002년 두 번의 제주지사 선거에선 연거푸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그후 축협중앙회장을 거쳐 친환경 농업회사법인인 (주)삼무와 전시판매장인 삼무힐랜드를 운영했지만 지사 재직시절 뇌물수수사건에 휘말려 2년여 수감된 뒤 풀려났다. 삼무힐랜드는 수감기간 중 문을 닫았다.

 

제주삼다수와 관광복권, 제주국제컨벤션센터, 제주교역, 제주세계섬문화축제 등이 그의 지사 재직시절 작품이다. 현재 제주생태도시연구소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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