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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현장-남기고 싶은 이야기]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28)

1993년 말 고향 제주에 관선지사로 부임한 일은 개인적으로 영광이었다. 하지만 속으론 큰 부담도 있었다. 제주가 갖고 있는 구조적 한계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인당 소득이나 생산성이 전국 평균에도 못 미치는데 소비는 더 많아 건전재정이라고 보기 곤란한 제주의 가계 상황은 그렇다 치더라도 건설업에서 여행사까지 마구잡이로 난립하고 있어 심각한 위기 수준이었다. 자영업이라고 해 봐야 음식점들인데 그 시절 통계를 살펴보니 인구 100명당 식당이 하나 꼴이었다. 친·인척 등 ‘궨당’정서에 기대 그저 고만고만한 영세영업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주의 경제부흥을 이룰 방법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배분도 중요하지만 제주의 경제성장을 이뤄야 할 판인데 도지사가 갖고 있는 수단은 제한적이었다. 제주의 행정은 물론 재정운용의 사령탑 역할을 해야 할 곳이 제주도청인데 별다른 권한이 없었다. 대통령은 예산이라는 재정권이 있고, 한국은행의 금융통화기능을 통해 금융권을 갖고 있다. 하지만 제주도지사는 돈을 빌려줄 능력 조차 없었다. 지역경제를 책임지는 자리인데 예산이라는 것만 가진 절름발이 수준이었다. 그 마저도 조세권이 없는 극히 제한적 권한이었다. 그런 것들을 풀기 위한 고민의 결과가 관광복권, 지역개발채권, 지하수의 공익상품화를 시도한 ‘제주삼다수’다. 1997년 제주도개발특별법을 개정하면서 법적으로 제주에만 특화시킨 우리의 성취물이다.

 

 

지역개발채권제도는 사실 개발사업 마다 구걸하듯 우리 도민들이 푼돈을 거머쥐는 현실이 못마땅한 반성에서 시작됐다. 그 시절 내가 보고 들은 각종 개발사업의 현장은 ‘주민동의’를 명분으로 시답지 않은 돈들이 오가고 있는 모습이었다. 하다못해 양식장 하나를 만들더라도 마을에 음성적인 돈을 쥐어줘야 했다. 주민동의를 구하기 위해 비공식적인 돈이 오가는 것이다. 사업자들도 부담이지만 나로선 “우리 제주도민이 거지냐?”는 자괴감이 있었다. 그걸 뜯어 고쳐야 했다. 골프장이 대표적이다. 그 당시 골프장은 ‘내인가 제도’라는 게 있었다. 허가 이전에 사전 내인가를 해주는 제도다. 전두환 정권 시절 만들어진 그 제도는 그런 음성적 거래가 가능하도록 만든 토양이다. 그래서 제주에만 특별법을 개정, 지역개발채권제라는 걸 만들어 도입했다. 투자할 돈이 있고, 적법한 방법으로 허가가 가능한 사업의 경우 개발채권을 매입하도록 한 것이다. 골프장의 경우 홀당 5천만원, 호텔은 객실 1실당 2백만원을 매입하도록 했다. 지역개발채권만 매입하면 주민반발에 상관 없이 사업을 할 수 있도록 제주도가 지원하는 것이다. 예컨대 한 골프장의 경우 18홀이면 9억원의 채권을 매입해야 한다. 우린 이 지역개발채권 금액중 20%를 따로 떼어내 10%는 노인복지기금, 또 10%는 장애인 복지기금으로 적립하도록 조례를 제정했다. 그리고 나머지 80%를 해당 사업장이 들어서는 마을 주민이 원하는 사업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거나 아예 현금으로 줬다. 누가 더 돈을 받고, 덜 받아 시위나 농성을 하면서 ‘떼쓰듯’ 사업자로부터 돈을 받는 초라한 풍경을 걷어치운 것이다. 더욱이 지역개발채권은 고작 1%의 금리에 30년 상환조건이기에 사실상 제주도가 거저 먹는 것과 같은 돈이다. 물론 개발사업부지를 제공하는 제주도로선 정당히 주장할 수 있는 돈이다. 일종의 개발이익 선환수제와 같다. 물론 사업자 측도 주민 각자를 만나 동의를 구하기 위해 비지땀을 흘리고 턱도 없는 요구에 시달릴 필요가 없으니 지역개발채권제는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격’이 아니라 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지역개발채권제도는 내가 98년 도지사 선거에서 낙선하면서 폐지됐다. “사업자에게 부담을 주는 것”이라는 이유였다.

 

관광복권은 그 시절 우리의 간판 수익모델이다. 여러 궁리를 하다 불현듯 떠오른 아이디어지만 제주도가 국내 자치단체로서는 처음으로 발행하는 일이다보니 그 시절 공무원들은 물론 당시 현역 국회의원 3인(현경대, 변정일, 양정규)이 성사시켰다는 말이 더 정답이다. 사실 복권사업은 애초부터 내 의중에 있었다. ‘사행심을 조장한다’는 비판도 있을 수 있지만 무엇보다 “경마와 카지노로 재산을 탕진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는 봤어도 복권을 사는 사람이 그런 경우는 없더라”는 말이 수긍이 가던 때였다. 당시엔 주택복권과 기술복권 등 7종의 복권이 국내에서 발행되고 있었다. 총리실에서 매년 복권의 발행한도를 규제하고 있던 때다. ‘사행심 조장’이라는 여론의 비난을 의식해 까다롭게 운용하고 있었기에 제주도의 관광복권 발행은 장애도 많을 수 밖에 없었다. 더욱이 그 시절엔 내무부도 자치복권 발행을 준비하고 있던 터라 전국 16개 시·도 중 유일하게 제주도만 관광복권을 발행하려는 데 대해 우호적일 수 없었다.

 

 

당시 현경대 국회의원이 총대를 매다시피 했다. 그는 내무부와 총리실, 재무부를 뛰어다니면서 관계자들을 설득하고 다선 의원답게 압력(?)도 행사해 제주도의 관광복권 승인을 얻어냈다. 정부와 민주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관광복권은 94년 11월 준비작업에 들어갔고, 제주의 국회의원 세 사람의 의원입법으로 국회에 제안됐다. 그 시절 민주당의 충북 지역구 정기호 의원과 민자당 소속 건교위 조진형 의원도 법안심사 소위원장을 맡아 협력했다. 도 일선 공무원으론 후일 제주시 부시장이 된 김영준 법무담당관(현 새누리당 직능위원장)이 서울에서 상주하다시피 일을 처리해 큰 일을 해냈다. 김 담당관은 자그마치 서울에서 6개월을 상주하면서 소관업무도 아닌 제주도개발특별법 개정을 통한 제주 관광복권 발행이라는 수훈갑의 큰 일을 해냈다. 그렇게 해서 제주도가 발행하는 관광복권은 95년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 과거를 돌이켜 본다. 관광복권을 발행하기 전 제주에선 ‘관광세’를 신설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제주도에 관광 오는 모든 관광객들에게 세금을 부과하자는 것이었다. “입도세(入道稅)를 신설하자는 말인가”란 공박을 받을 만한 소리였다. 엄연히 대한민국 영토 안에서 모든 국민이 신체이동의 자유가 있는 마당에 현대판 통행세와도 같은 세금을 만들어 비난을 받을 게 뻔한 생각이었다. 그런 논의를 살짝 방향을 비튼 것이 사실은 ‘관광복권’이다. 이후 2004 년 4월 정부는 복권발행과 판매기관을 일원화하는 통합복권법(복권 및 복권기금법)을 제정하였고, 제주도는 1999년 복권시장 점유율에 따라 20.145%의 배분비율로 매년 로또복권 수익금을 배분받게 되었다. 지금까지 관광복권과 로또복권 수익금으로 제주도가 챙긴 복권 수익금은 무려 7,093억원에 이른다. 올해까지 관광복권 발행으로 660억원을 벌었지만 이 때문에 당연 배분수익자가 돼 금년 한해에 받은 로또복권 수입만도 785억원이다. 관광복권을 발행, 98년까지 판매수익금으로 제주도는 제주도 전역 학교급식시설 지원사업에 투자했다. 그리 크지 않은 돈이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번 돈의 대부분인 70억원을 들여 전국 최초로 초·중·고교 전학교에 급식시설을 갖춰 주었다. 교육감이 아니라 도지사가 한 것이다. 어머니들을 도시락에서 해방시킨 것이다. 그 관광복권을 발행하게 돼 지금껏 7093억원이란 돈을 거머쥐게 됐는데 그 돈들은 지금 어떻게 쓰여지고 있을까? 자못 궁금하다.

 

경제문제 얘기를 꺼내다보니 그 시절 아쉬움이 있다. 지사로 재직하면서 난 진심으로 제주도의 지방은행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지역경제 책임자로서 제주도의 공익사업을 집행하기 위해 지역 지방은행의 성장은 필수적인 일이었다. 별다른 금융권한도 없는 도지사로서 지방은행이 튼실해야 제주도만의 시책사업도 가능한 것이어서 그렇다. 세상에 돈 없이 그저 의지만으로 될 일이 없지 않은가? 그때 내가 주목한 게 도금고(道金庫)다. 제주도의 일반회계와 특별회계 예산만 하더라도 다른 지역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적은 규모지만 그래도 그 돈이라도 예치해야 지방은행이 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 시절 제주은행은 지금처럼 신한금융지주그룹의 자회사가 아니라 말 그대로 제주도민의 제주은행이었다. 헌데 사정을 들여다보니 묘한 사실을 알게 됐다.

 

원래 도금고는 지방재정법에 의해 도지사가 내무부장관의 승인을 얻어 지정하도록 돼 있었다. 그런데 1954년 이후 전국에서 특별시와 광역시를 제외한 8개 도는 예외 없이 제일은행을 도 금고로 지정하는 계약을 체결하는 게 관행이었다. 어느 누구에게 물어봐도 왜 그랬는지, 무슨 정치적 고려가 있었는지 아는 이가 없었다.

 

 

95년 6·27 지방선거에서 당선된 나로선 비로소 지방의 시대가 열린 만큼 지역경제를 위해 지방금융권 활성화를 기하고 있던 터이기에 도금고의 제주은행 이관을 추진했다. 그래야 제주의 중소기업도 키울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그때 우리와 호흡을 맞춘 게 다른 지방에선 전라남도와 전라북도였다. 청와대와 정부 모 부처에서 압력이 들어왔다. ‘그냥 두라’는 것이다. 하지만 반기를 들었다. 다행히 전남·북 두 자치단체도 거들었다. 도금고 이관을 기정사실화 하고 밀어제끼기 시작하자 서울에서 도지사실로 면담요청이 왔다. 이철수 제일은행장이 직접 제주로 내려와 지사 집무실로 밀고 들어왔다. 읍소하다시피 “도금고를 제일은행에 존치시켜달라”고 그는 부탁했다. 하지만 나로선 사정을 설명하고 그대로 돌려보낼 수 밖에 없었다. 황당한 경험을 겪었다. 그는 집무실에 들어올 때 무엇인지도 모를 상자 한 보따리를 내밀었다. “그저 도정을 집행하는데 필요할 터이니 요긴하게 쓰시라”는 말이었다. 직감적으로 뇌물성의 무엇(?)이라고 판단했다. 그가 가는 길에 고이 돌려보냈다. 손 대보지도 않았다.

 

1996년 1월1일 제주도 금고는 제주은행으로 넘어갔다. 그런데 막상 도금고를 넘겨 보니 황당하게도 막판 전라남도와 전라북도가 원점으로 회귀, 제주도만 유일하게 지방은행으로 도금고를 옮겼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막을 알 수 없다. 어쨌든 제주은행으로 도 금고를 옮기며 제주의 은행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은행에 금고를 넘기고 끝낼 순 없었다. 그만큼 그 시절 제주은행이 그리 좋은 평판도 아니었던 지라 지역사회에 그에 걸맞은 기여도 하도록 했다. 현재의 제주발전연구원은 그 협상의 결과다. 작고한 김성인 제주은행장의 이행각서는 네가지 사안을 담았다. 제주지역경제연구원(현 제주발전연구원) 설립기금으로 30억원을 제주은행이 출연하고, 도민참여 제주도 종합개발계획 투자업체에 여신을 우선 지원한다는 것. 또 제주도 재정 조달시 소요자금 여신지원을 이행하고, 도지사가 신용보증하는 중소기업에 대해 여신의무를 이행한다는 것 등이다.

 

에피소드가 있다. 막상 도금고를 움직이려 하자 농협의 반발과 공작은 대단했다. 노조위원장까지 가세하며 성명전을 벌이며 제주도를 압박했다. “옮기려면 제주은행이 아닌 농협으로 옮겨야 된다”는 것이다. 마침 독립 기초단체인 서귀포시는 그 때 시금고를 농협으로 옮겼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농협이라는 간판을 걸고 있지만 그들은 엄연히 일반 시중은행이었고, 제주의 농협은 그 시중은행의 지점격인데 지역경제를 살리려는 마당에 지방은행을 제끼고 농협으로 굳이 옮긴다는 건 말이 안됐다. 그럴 바엔 차라리 그대로 제일은행에 도 금고를 유지하는 것과 다른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둔한 짓이었다. 농협과 감협 등 제주 전역에 깔린 그들의 탄탄한 조직력을 무시했으니 선거에서 농민 표를 얻는 건 애시당초 힘겨울 수 밖에 없었다. 제주은행 임직원 가족의 환심을 산들 제주의 농협가족들에 비할 바가 되겠는가? 그러나 표계산이나 하면서 제주가 가야할 길을 비틀 생각은 지금도 없다.

 

금융의 문제도 있지만 지역경제를 살찌우고 싶은 내 욕망은 관선지사로 부임하고 나서 우리의 농산물과 수산물 수출경제에도 눈을 돌리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뇌리에서 사라져 버린 이름이 있다. 삼다수를 만들어 지금 그렇게 짱짱거리며 잘 나가는 제주의 공기업 ‘제주도 지방개발공사’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을 테지만 ‘제주교역’이란 이름은 이제 사실상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달랑 법인 이름만 남고 아무런 기업활동을 하지 않고 그저 서류상으로만 이름을 올린 ‘페이퍼 컴패니’가 됐다는 소리도 들린다.

 

 

제주교역은 1994년 말 창립했다. 그러나 선거과정을 거치며 상대후보의 민영화 공약대로 민간에 팔아 넘겼고 이젠 유명무실한 기업으로 사실상 문을 닫은 처지인 것으로 안다. 하지만 제주교역의 설립배경을 알게 되면 그렇게 해선 안되는 일이었다.

 

매해 60만톤 내외의 감귤이 제주에서 생산되고 있다. 그런데 나로선 의문이 들었다. 그 생산량 중 우리가 제주 안에서 자체 소비할 수 있는 능력은 어느 정도일까란 의문이다. 여러 분석을 들이대 보니 기껏해야 5만톤을 소비하면 다행이었다. 그 얘기는 뒤집어 말하면 나머지 물량을 소화할 수 있는 제주 밖 시장이 없다면 우리의 생존을 담보할 수 없다는 소리가 된다. 또 다른 의문도 있다. 감귤에 있어서는 전국 독점생산지나 다름 없는 제주도가 생산자 가격을 만들어 내지 못하고 우리 농민들이 전국 곳곳 소비자를 찾아 다니며 감귤을 팔아야 하는 현실이었다. 육지 공판장으로 가서 사정하듯, 유통상인을 찾아 애걸하듯 물건을 맡기고 그들의 처분대로 감귤값을 받아 겨우 연명하는 현실이다. 대도시에 제대로 된 제주농산물 유통시설을 만들고 싶었다.

 

그 시절 우리의 수출 1위품목은 고작 넙치였다. 지금도 수출 효자품목이다. 최근의 통계만 놓고 보더라도 연간 양식넙치의 수출액은 미화 4500만 달러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그런 수출품을 일본으로 내다 팔아야 하는데 우린 직항로가 없었다. 부산으로 물건을 싣고 가서 일본으로 가는 배에 부탁해서 물건을 넘기는 것이었다. 대도시 대형유통시설, 대일 수출직항로 개설을 위한 공기업적 착안이 바로 제주교역인 것이다. 더욱이 제주교역은 정부가 제주감귤협동조합에 위임한 MMA(Minimum Market Access; 최소시장접근)에 따른 오렌지 수입권을 대행하면서 대행수수료 벌이가 가능하도록 할 생각이었다. 감협은 수출입 기능이 없었기에 가능하리라 보았다. 그러나 감협이나 농민단체는 제주교역을 자꾸 떼낼려고 했다. 밥그릇을 빼앗기고 있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 부정적인 여론화가 지속되면서 제주교역은 난감했다.

 

그렇게 겨우겨우 사업을 하던 제주교역은 무너져갔다. 내가 선거에서 지면서 비전문가가 대표로 그 자리를 꿰차는 일도 벌어졌고, 이미 재임시절 제안이 들어왔지만 여러 경로로 분석해 보고 현지에 공무원을 파견해 면밀히 분석해 본 결과 도저히 가망성이 없는 것으로 판정이 난 대미 호접란 수출사업을 이 제주교역이 떠 안게 되면서 회생불능의 경지로 갔다. 연료를 쓰지 않고 호접란을 생산하는 대만과 생산에서 경쟁해야 하고 미국 현지시장의 유통을 장악한 일본과 경쟁하겠다는 것 자체가 상식을 벗어난 구상이다. 그렇기에 호접란 대미수출사업은 사실 말도 안 되는 허황한 일을 저지른 것이다. 100억원 이상의 알토란같은 제주도민의 혈세를 태평양 건너로 날려버리고 만 셈이다. 물론 참여 화훼농가도 엄청난 피해를 입고 고통을 겪었다. 결국 20~30여명에 이르던 최초의 임직원들은 모두 그 회사를 떠났고 제주 곳곳에서 다른 방향으로 재기하거나 일을 벌이고 있다.

 

 

내 치적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수없이 많은 고민과 시행착오를 거쳐 찾아낸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얻어낸 결실을 다시 미래를 향해 재투자 하지 않은 결과는 쓰라리다. 기업이 무너지고 방황한 제주교역 임직원들의 가슴 아픈 삶의 사연을 들을 땐 눈물겹다. 기껏 돈벌이를 만들어 뒀더니 이곳저곳 잔치판에서 흥청망청 탕진하고 있는 소리가 들리니 어찌 마음이 괴롭지 않을 것인가? 우리에겐 아직도 우리가 키워내야 할 우리의 미래세대가 있고 그들이 꿈을 펼칠 수 있는 삶터가 필요하다. 선지자 요엘(Joel)은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꿀 것이며 너희 젊은이는 비전을 볼 것"이라고 예언한 바 있다. 제주의 젊은이들이 장래 일을 말하며 이상을 품고 도전하며 성장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내 꿈이 아직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철부지 하르방의 욕심일까? <29편으로 이어집니다>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

 

=1942년생. 오현고를 나와 육군사관학교 4년을 중퇴, 1967년 5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직자로 입문했다. 제주도 기획관, 주이탈리아 한국대사관 농무관, FAO(국제식량농업기구) 한국교체수석대표, 농림수산부 축산국장, 농업구조조정정책국장, 기획관리실장을 거쳐 YS정부 시절인 1993년 12월 제29대 제주도지사로 취임했다.

 

이어 첫 민선 지방선거인 95년 6·27선거에선 무소속으로 출마, 당선돼 31대 지사를 역임했다. 그러나 98년, 2002년 두 번의 제주지사 선거에선 연거푸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그후 축협중앙회장을 거쳐 친환경 농업회사법인인 (주)삼무와 전시판매장인 삼무힐랜드를 운영했지만 지사 재직시절 뇌물수수사건에 휘말려 2년여 수감된 뒤 풀려났다. 삼무힐랜드는 수감기간 중 문을 닫았다.

 

제주삼다수와 관광복권, 제주국제컨벤션센터, 제주교역, 제주세계섬문화축제 등이 그의 지사 재직시절 작품이다. 현재 제주생태도시연구소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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