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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현장-남기고 싶은 이야기]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25)

선거에서 지고 민선 1기 도지사 퇴임식을 치른 다음날인 1998년 7월 1일. 나와 아내는 이른 새벽부터 짐을 챙겼다. 그리고 오전 8시20분 완도행 카페리에 몸을 실었다. 한 열흘간 푹 쉬다 돌아올 생각이었다. 자동차를 손수 몰아 곧바로 남해안을 내달려 김해~경주~영덕~울진~동해~강릉을 거쳐 동해안을 따라 올라갔다. 12시간이 넘게 운전한 끝에 다음날 새벽 2시에 숙소인 속초의 일성콘도에 도착했다. 오랜 시간 운전하며 많은 생각을 했다. 만감이 교차했다. 정치현실을 몰랐고, 타협하지 않는 삶을 택했던 내 방식에 대해서도 반성이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편안함이 밀려왔다. 어디에 묶이지 않은 것 같은 자유 덕인지 이상야릇한 기쁨도 마음에 자리잡았다. 마침 큰 아이 부부와 첫 손자도 속초에서 만나 오랜만에 가족애를 느낄 수도 있었다. 손자의 재롱을 보며 하루가 시작되고 저무는 나날이 행복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세상은 내 생각대로만 돌아가 주는 게 아니었다. 그저 잊어버리려 마음을 비우고 있는 지 사흘째 되던 7월3일 며느리가 놀란 표정으로 허겁지겁 달려왔다. 온천을 다녀오고 나서 아들 녀석과 한 시간 쯤 탁구게임을 하던 때였다. 중앙일보 사회면 톱기사에 내가 이름을 올렸다는 것이다. 공직비리에 대한 사정차원의 수사가 진행되고 있는데 그 대상자에 내가 끼었다는 것이다. 당일 낮엔 KBS와 MBC 양 방송에서도 정오뉴스 때부터 같은 내용을 보도하기 시작했다. 내 비리는 제주국제컨벤션센터로부터 선거자금 5000만원을 받았다는 혐의였다.

 

 

기가 찼다. 퍼뜩 떠올랐다. 한창 선거전을 치를 무렵 상대후보가 선거일을 이틀 앞두고 이런 유언비어를 퍼뜨렸고, 고발까지 했던 사안이다. 우리 캠프에선 사실관계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헛소리였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사안이다. 고발에 따른 수사가 끝나면 무고로 맞설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마치 확인된 사안인 양 나를 지목, 수사선상에 이름을 올린 것이다. 그 시절 지사 당선자의 계략에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그보단 기대했던 DJ정부에 대한 실망감이 컸다. 정정당당한 정치가 가능하리라 예상했는데 이런 식으로 사람을 몰아부친다는 게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돈을 받은 사실이 없는 나로선 꺼리낄 이유도 없었다. 그 시절 난 허투루 돈을 주는 것조차 개혁차원에서 많은 재고(再考)를 하고 있었기에 그렇지 않아도 허점이 잡힐 뇌물수수는 생각하기도 어려웠다. 예컨대 관선 지사로 내려온 93년 말 확인해 보니 가관인 일이 있었다. 전임지사 시절 관행적으로 도지사가 제주경찰청장에게 매달 300만원을 주고 있었던 것이다. 정보지원비 명목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엄연히 제주도의 대표자인 도지사가 하급기관 대표에게 금전을 주고 도움을 얻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걸 중단하자 당시 제주경찰청 정보과장이 찾아와 난감한 얼굴로 사정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 내 설명을 듣고 그도 수긍하고 돌아간 터였지만 그만큼 나로선 책 잡힐 일은 하지 않아야 할 처지였다. 서둘러 제주로 돌아오라”는 우리 캠프인사들의 종용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안심시키고 며칠을 더 보내고 7월8일 제주로 내려왔다.

 

제주로 내려온 첫날 한 지방지에선 한술 더 떴다. 당일 ‘신 지사 뇌물비리, 은혜재단으로 수사 확대’란 기사가 선명하게 1면 톱 자리를 차지했다. 정말 어이가 없었다. 고발사안은 컨벤션센터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였는데 고발사안도 아닌 은혜재단으로 검찰이 수사를 확대한 것이다. 은혜재단은 노년이 들어 처지가 어려운 재일동포들이 고향 제주에 터잡고 살기 위한 고향차원의 보은이자 순수한 마음의 출연자들에 의해 양로원을 짓기 위해 설립한 사회복지재단이다. 그런데 그 재단 출연금을 뇌물로 몰아가기 시작했다는 데 대해 솔직히 크게 분노했다. 민선 도지사로서의 자존과 명예가 있는 나에게, 31년 간의 공직생활을 마감한 이에게 이런 식으로 ‘표적수사’에 나선 사실이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가슴에서 울분이 터져 나왔다. 더욱이 순수한 마음으로 은혜재단을 설립하는 데 도운 출연자들의 본 뜻을 이런 식으로 왜곡·매도하려는 횡포에 무너진다는 건 안될 말이었다.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분연히 맞서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음날인 7월9일 오전 10시. 아내와 기거하는 제주시 정진아파트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내용은 이랬다. “고발사건의 범위를 넘어선 수사 확대에 유감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떠한 의혹을 살만한 일을 한 적이 없다. 사정(司正)은 객관적이고 엄정해야 한다. 하려면 제대로 하라. 도지사 당선자의 불법 금권선거에 대해서도 철저히 수사해라.”

 

기자회견 뒤 힘이 없는 나로서는 초강수를 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자회견 직후 곧바로 무기한 단식에 돌입했다. 마음 속으로 많은 후회를 했다. “이 정부도 별 수 없구나···”란 생각을 했다. 50년만의 정권교체를 기다린 내 환상이 무참히 깨진 것이다. 이 정권 역시 양심과 정의를 지켜내는 데 있어 내재적 한계는 역대 다른 정권과 다를 바 없다고 판단했다. 국민의 정부에 대한 마지막 환상을 걷어내기로 했다. 국민의 정부 역시 ‘정권욕의 화신’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앙일보 사회면 톱 기사에 이름을 올렸지만 그 무렵 바로 그 중앙일보의 대검 출입기자에게서 연락을 받았다. 과거 중앙언론에 몸 담았던 일가의 어른에게서 넘겨 들었다. 그 중앙일보 기자에 따르면 이번 정부의 사정대상에 분야 별로 본보기를 고르고 있는데 광역단체장엔 2명이 이름을 올렸다는 것이다. 그 2명은 충북의 주병덕 지사와 나라는 것이다. 그런데 김종필과 연대, DJP연합으로 정권을 구성한 마당에 충북은 김종필 총재가 이끄는 자민련의 연고지인데다 충북의 여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어 도세(道勢)도 약하고 무소속인 당신을 지목했다는 것이다. 말문이 막혔다. 그 때문에 ‘표적수사’가 시작됐고 대검의 보도자료도 밤늦게 부랴부랴 배포됐다는 것이다.

 

단식 사흘째 되던 날 많은 사람들의 권유로 장소를 제주시 영락교회 사회교육관 4층으로 옮겼다. 그 때 누군가 벽에 ‘양심과 정의를 지켜주는 사회’란 구호를 써 놓았다. 지금도 그 말을 되새긴다. 과연 우린 양심과 정의를 지켜주는 사회에 살고 있을까? 우리가 걸어가는 길은 양심과 정의의 길인가? 양심과 정의가 승리하기 위해 지금 걸어가야 할 길은 어디인가?

 

그 시절 내 단식에 충격을 받은 재야의 김상근 목사와 안성화 교수를 중심으로 ‘6·4 부정선거 공정수사 실현 비상대책위원회’가 7월11일 꾸려져 활동에 들어갔다. 그러나 회의적 시각도 있었다. 김학준 이어도정보문화센터 이사장은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사회적 문제에 대한 생각을 하나로 모을 수 있어 이른바 행동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게다가 제주대학교의 모 교수는 “신 지사의 재기를 두려워하는 자들의 요청에 의해 정권의 사정대상에 신 지사를 교묘히 끼워넣은 것으로 보인다. 부정선거에 대한 편파수사는 당연히 시정돼야 하겠지만 가능하다고 볼 수 없는 분위기여서 안타깝다.”

 

단식 6일째인 7월14일엔 불교, 원불교, 기독교, 카톨릭 등 제주종교인협의회 대표자들이 기자회견을 마치고 단식장소를 찾아왔다. 그들은 기자회견에서 “신 지사에 대한 검찰수사가 제주사회를 갈등의 소용돌이로 몰아넣고 있다. 사태를 이렇게 진전시킨 책임은 공정한 수사를 하지 못해 의혹을 불러 일으킨 검찰에 있다. 국민회의 경선 불복 후 출마에 따른 보복성 사정이라는 의혹이 있다”며 정부 여당을 압박했다. 그런 그들은 나에게 단식중단을 요구했다. 선거후유증과 갈등을 치유하는 차원에서 그렇게 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자리를 뜨며 나에 대한 검찰수사와 관련해 제주지검을 방문했는데 그 때 한광수 검사장이 했다는 말을 전해주었다. “이 사건은 당선자와 신구범이 하기 나름입니다.” ‘표적수사’임을 검찰 스스로 인정했다는 말이었다.

 

그 시절 안기부(현 국가정보원)의 한 정보관도 나를 찾아왔다. 그는 “이번 일은 청와대보다 당선자와 가까운 김태정 검찰총장이 당선자의 부탁을 들어 시작된 일이다. 고발사건인 컨벤션센터 비리혐의가 안 밝혀지고, 은혜재단 문제에서도 혐의가 밝혀지지 않으면 수사가 장기화될 것이다. 그러니 장기전에 대비해 단식도 요령껏 하시는 게 좋겠다.“ 전적으로 믿을 순 없었지만 심증은 갔다. 그 이전에도 그와 비슷한 말을 지속적으로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반신반의하고 있던 터에 둘째 용규가 단식하는 아버지를 위로한답시고 제주로 내려왔다. 외무고시에 합격, 외교통상부에 근무 중이던 아들은 분개하고 있었다. 가깝게 지내는 청와대 인사를 통해 들어보니 제주에서 지속적으로 ”신구범은 도태돼야 될 구시대 인물이다“란 보고를 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낙선한 상대방을 이렇게 음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7월16일 이승택·이군보 전 지사와 김형옥 전 제주대 총장, 김황수 전 교육감, 장시영 삼화석유 회장 등이 단식 중인 나를 찾아왔다. 그들은 “이제 진정성이 도민에게 알려졌다. 이제 그만 단식을 풀라”고 말했다. “단식을 풀고 의연하게 대응하라”고 조언을 주셨다. 몸둘 바를 몰랐다. 그분들에게 심려를 끼쳐 드려 죄송한 마음이었다. 그날 밤 단식을 풀기로 하고 지역일간지에 ‘도민에게 드리는 글’을 게재하기로 한 뒤 7월17일 오전 9시30분 기자회견을 통해 단식중단을 알렸다. 재임시절 그토록 공들였던 기획인지라 7월18일 개막 예정인 ‘제1회 제주세계섬문화축제’에 자원봉사자 신분으로라도 돕고 싶었다. 단식중단을 알린 날은 축제의 전야제 이기도 했다. 그러나 9일 동안의 단식으로 몸도, 마음도 피폐해졌는지 기운을 낼 수 없었다. 결국 난 제주의료원으로 실려갔다. 입원하자마자 내 고교동창인 이영길 정무부지사에 이어 당선된 후임 도지사가 병실로 찾아왔다. 그는 “둘이서만 만나 잘 풀어나가자”는 알듯 모를 듯한 말만 남기고 병실을 떠났다.

 

그러나 검찰의 수사는 집요하고도 모질었다. 장기간에 걸쳐 내 주변을 샅샅히 훌고 있었다. 나에 대한 수사를 벌이면서 컨벤션센터 김경원 사장, 임직원, 기본설계를 맡았던 한규봉 사장, 은혜재단의 은혜마을 공사를 맡았던 삼오종합건설의 임제호 사장과 임직원, 이 두 사건에 관련된 공무원, 하청업자, 심지어 현장에서 노임을 받은 노무자에 이르기까지 확대됐다. 10차례가 넘는 친·인척의 예금계좌 추적은 물론이다. 그러나 검찰은 컨벤션센터로부터 뇌물수수는 물론 자금유용 혐의까지 들춰봤지만 아무 것도 건진 게 없었다. 그러자 검찰은 은혜마을 출연자인 대유실업 관계자와 공사를 맡았던 삼오종합건설 관계자들을 물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제주지검 내부에선 “막상 나오는 게 없어 당황하고 있다. 제주지검은 하명사항이라는 지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고생만 하고 있다”는 말이 내게 들려왔다.

 

수사를 맡았던 주임검사는 대유실업 관계자들에게 “은혜재단 출연자인 회사 대표 한상훈만 미국에서 귀국시켜 달라. 그러면 신구범을 포괄적 뇌물죄로 실형을 선고받게 할 수 있다”고 윽박 질렀다. 삼오종합건설에겐 정용진 전무를 붙잡고 하지 못할 짓을 다했다. 사실 삼오종건은 그 시절 제주도내 도급순위 2위인 회사로 정 전무는 과점주주이자 실질적인 경영자다. 사회에서 경륜 있는 분이나 존경 받는 분을 대표로 모시고, 자신은 ‘전무’직함으로 만족하는 사람이다. 항상 점퍼 차림이었고 그 흔한 자가용 한대도 없던 사람이다. 내가 그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95년 6·27 지방선거 직전이었다. 95년 3월28일 출마를 위해 도지사를 사퇴하고 당장 갈 곳이 없었던 때 내 친구인 양세훈 사장이 소개해 준 아파트가 제주시 일도2동 정진아파트였고, 그 소유주가 정 전무였다. 8천만원을 주고 전세계약을 하고 입주한 곳이다.

 

그는 내 사건과 관련해 내가 단식에 돌입하기 전날인 7월8일부터 조사를 받았다. 나에게 돈을 줬다는 자백을 받아내려는 게 검찰의 조사목적이었다. 그 시절 그의 변호사가 낸 보석허가 청구서를 보면 정 전무는 소환조사를 받으며 40여 시간에 걸친 밤샘수사를 받았다. 그 과정에서 목 디스크로 인한 왼팔 기능장애, 신경성 두통까지 생겼다. 그로선 도대체 자신이 신구범 사건의 참고인인지 아니면 본인 자신이 피의자인지 분간도 안되는 상태에서 밤샘수사 등 불법·부당한 수사를 받은 것이다. 그는 당시 숨진 친구의 상가에 조문을 갔다가 영문도 모르고 검찰에 연행됐고, 이틀 동안 밤샘수사를 받아 심신의 피로와 불안, 분노가 겹쳐 새벽에 귀가하던 중 자신이 사는 곳인 정진아파트 계단에서 실신하기도 했다. 그에게 주임검사는 “신 지사에게 돈을 줬다고 자백해라. 그렇지 않으면 회사를 날려버리겠다”고 겁박까지 했다는 것이다. 주임인 우모 검사는 지금 알만한 인물이다.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퇴임 후 서거 직전까지 수사를 맡은 적도 있다.

 

정용진 전무에 대한 수사는 개인의 고통만을 준 게 아니었다. 검찰의 장기 집중수사로 인해 삼오종합건설은 자금융통과 결재에 막대한 지장을 받게 돼 협력업체와 함께 나중엔 결국 부도 처리되고 말았다. 임직원 105명, 제주도내 도급순위 2위 업체가 그렇게 어이없이 무너진 것이다. 그와 그의 회사가 겪는 어려움을 무기력하게 지켜볼 수 밖에 없었던 나로선 고문보다 더한 고통이었다.

 

 

더 이상 감내할 수 없었다. 7월27일 서울로 갔다. 신승남 법무부 검찰국장(전 검찰총장)을 만나 볼 요량이었다. 그는 내가 1967년 행정고시에 합격, 제주도에 근무하고 있을 무렵 내무부 장관을 지낸 최인기와 함께 서울법대 출신 가운데 특채로 청와대 행정관으로 일했던 인물이다. 청와대 행정관으로 재직하며 민정시찰 차 제주도에 오는 일이 잦았고, 소수인 거창 신씨(愼氏) 씨족인지라 서로 터놓고 각별히 지내던 사이다. 그는 청와대 행정관으로 근무하던 중 사법고시 수석으로 법조계에 입문, 검사 생할을 하다 그 시절 법무부 검찰국장으로 재직중이었다. 다음날인 7월28일 그를 신순범 국회의원과 함께 만났다.

 

그에게 얘기했다. 잘못된 일을 봐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내 사건과 관련한 수사권의 남용으로 한 개인과 기업이 부당하게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수사의 공정을 기하는 것은 물론 정부의 경제회생 노력 차원에서도 배려를 부탁했다. 서울에서 아침을 함께 하면서 “나에 대한 검찰의 수사가 고발의 범위를 넘어 28명이란 수사인력을 대거 투입하고 있는 표적수사라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고, 기업인과 기업활동을 부당하게 위축하고 있다. 그런 일이 없도록 해달라”고 그의 이해와 협력을 구했다. 그는 대답했다. “최근에는 보고가 없어서 잘 마무리된 것으로 알았는데···. 확인해 보겠습니다. 검찰총장이 휴가 중인데 휴가가 끝나는 대로 총장을 만나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총장은 그럴 사람 아닙니다. 좋은 사람입니다.”

 

제주로 내려오자마 정 전무를 찾았다. 그는 다시 검찰에 불려가 있었다. 계속되는 검찰수사에 시달리던 정 전무는 다시 사무실에서 실신, 제주의료원으로 실려갔다. 그가 입원한 병실로 찾아간 난 그를 보는 순간 분노가 치밀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지향하는 국민의 정부, 인권대통령을 자칭하는 김대중 정부의 인권보장의 현 주소를 그의 병실에서 바라보고 있자니 가슴이 먹먹했다. 난 어깨를 못쓰는 정 전무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자네가 은혜재단 공사를 하지 말았던지, 아니면 내가 자네 아파트에서 전세를 살지 말았던지 했어야 하는 건데···자네나 나나 다 팔자 소관일세.” 그는 그동안의 고충을 눈물을 흘리며 털어 놓았다. “돈을 준 사실이 없는데 막무가내로 돈을 줬다고 쓰기만 하라고 강요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리곤 그는 내게 말했다. “형님은 서울에 빽도 어수과?”

 

8월로 들어서자 심각한 징후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8월3일 은혜재단 설립을 위해 출연한 대유실업 한상훈 사장의 막내동생과 윤모 상무가 나를 찾아왔다. “표적수사가 분명하기에 한사장이 미국에서 귀국해 검찰수사에 협력하기가 어렵다”며 그들은 한사장의 뜻을 나에게 전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한마디를 했다. “하지만 엊그제까지 지사를 지낸 분을 검찰이 이렇게 잡고 있는데 제주사람은 분개할 줄도 모릅니까?” 그들은 한탄을 했다. 무어라 내가 말할 수 없었다. 다음날엔 내가 퇴임 직전 제주도 내무국장이었던 고상윤 전 국장이 몇 사람과 나를 찾아왔다. 내무국장이던 그는 당선자가 취임한 후 도 문예진흥원 과장으로 좌천된 뒤 다시 북제주군청으로 대기발령된 상태였다. 취임 후 한달여만에 전광석화 처럼 어이없는 인사피해를 당한 인물이다. 입술을 깨물었지만 그에게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가 나의 재임시절 국장을 지낸 게 무슨 죄인지 기가 찼다. 국장급 공무원을 사업소의 과장급으로 내려보낸 것도 모자라 아예 군청으로 내려보내고 보직도 주지 않는다는 것은 인사의 기본은 커녕 독재시대에나 있을 법한 전횡인 것이다.

 

8월 중순으로 접어들자 검찰이 안달하고 있다는 소리가 들렸다. 한달이 넘게 이 잡듯 뒤졌는데 도무지 엮을 걸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시절 한 목사 부부가 우리 부부를 초청, 저녁식사를 하게 됐다. 그 목사는 당선자의 불법 전세버스 동원 사건과 관련해 선고법정을 다녀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판사가 판결문을 읽어내려 가면서 황당한 말을 하더라고 나에게 말했다. 그가 말하길 “판사가 판결문에서 밝히길 검찰수사가 대단히 미흡하다. 피고인 이모씨는 사실을 은폐하고 있다. 그러나 검찰이 기소한 범위 안에서 재판해야 하기에 구형대로 실형을 선고한다”고 밝혔다는 것이다. 그 시절 어느 언론도 보도하지 않은 사안이다. ‘정치수사의 전형’이란 걸 법정이 지적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나의 결백을 고집한 정 전무는 8월26일 병실에서 긴급체포돼 구인됐다. 그리고 그 이튿날 그는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 위반(횡령)으로 제주교도소에 구속수감된 후 9월11일 기소됐다. “500만원이라도 받았다고 하면 풀려난다”는 회유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돈을 줬다는 자백을 받아내지 못한 검찰은 그를 1993년 이후 노임포탈 40여 억원, 이에 따른 세금추징 9억원이라는 죄를 저지른 죄인으로 감옥에 가둔 것이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 9월8일 내가 재임하던 시절 정무부지사를 지낸 김승석 변호사를 통해 검찰에서 연락이 왔다. 수사종결 절차를 밟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김 변호사를 통해 나에게 자필 진술서를 요청했다. 그걸로 수사를 마무리했다. 검찰의 출석요구서를 받아 본 적도 없고, 소환장을 받아본 적도 없다. 물론 내가 검찰에 가 본 적도 없다. 28명을 투입, 두달여 간 이잡듯 뒤지고 난 결과였다. 애꿎은 내 주변인물들만 그리도 가혹한 일을 겪었을 뿐이다.

 

분노하고 있던 그 시절 기억나는 일화가 있다. 지사직에서 퇴임, 공직생활을 마무리하던 때 아내가 “공부를 더 하고 싶다”고 조심스레 나에게 말을 꺼냈다. 기꺼이 그러라고 했다. 아내는 서울농대를 다니다가 못난 나를 만나 2학년도 마치지 못하고 나와 고향으로 내려온 사람이다. 그러다가 내가 도지사로 재임중이던 때 방송통신대로 편입, 영문과를 졸업했다. 검찰수사가 종반전으로 치달을 무렵인 8월18일 아내가 이화여대 사회복지대학원에 등록하기 위해 서울로 갔다. 그리고 9월3일부터는 목요일과 금요일로 나눠 서울의 이대 캠퍼스에서 수강을 받아야 할 처지였다. 일주일에 이틀간 서울에 머물러야 하는 것이다. 그 첫 수업이 시작되기 전날인 9월2일 내 일기엔 이렇게 적혀 있다.

“내일부터 아내의 대학원 수업이 시작된다. 아내를 데리고 나가서 옷가지 몇벌과 책이라도 넣고 다닐 가방 등을 사줬다. 학부모가 된 심정이다. 이 순전하고 사랑 밖에 모르고 세상계산을 도통 할 줄 모르는 여자. 이 여자에 대해 제주도의 일부 여성들이 그동안 어떻게 대했던가. 가슴이 아프다. 도지사 남편 때문에 3년간 집사람의 고생이 많았으리라. 표가 도대체 뭔데? 이제 표 걱정 안해도 되니 당신 이제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해라. 당분간 우리 제주도는 잊자.”

 

 

그리고 다음날인 9월3일의 일기엔 이렇게 적었다. “아내는 새벽 무렵 서울행 비행기를 탔다. 아내를 제주공항으로 배웅해 줬다. 이제 철저하게 보통사람으로 돌아가는 삶에서 아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다시 시작한다. 참 대견하다. 그 나이에 전철 타고 길거리에서 부대낄 일을 생각하니 안타깝기도 하다. 그러나 죽을 때까지 성과에 상관없이 공부를 하려는 그 여자. 그 여자가 내 아내다. 자랑스럽다.“

 

보통사람으로 돌아갔기에 이제 소소한 행복을 누리고 싶었다. 검찰의 수사가 종료됐기에 더 이상 의혹의 시선에 맞대응하고 싶지 않았다. 제주도민의 한 사람으로 돌아가 이제 도지사가 아닌 다른 직분으로 우리 고향 제주도의 발전을 염원하고 다시 한번 남은 인생으로 봉사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때 난 몰랐다.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 그 이후의 내 인생에 놓여져 있었다. 아내와 단란한 가정을 꾸리며 손주의 재롱이나 보고 싶었던 삶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마무리된 줄 알았던 그때의 검찰수사로 촉발된 사건은 결국 10년이 가까운 세월이 지나 나를 영어(囹圄)의 몸이 되게 만들었다. 혹독한 시련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26편으로 이어집니다>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

 

=1942년생. 오현고를 나와 육군사관학교 4년을 중퇴, 1967년 5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직자로 입문했다. 제주도 기획관, 주이탈리아 한국대사관 농무관, FAO(국제식량농업기구) 한국교체수석대표, 농림수산부 축산국장, 농업구조조정정책국장, 기획관리실장을 거쳐 YS정부 시절인 1993년 12월 제29대 제주도지사로 취임했다.

 

이어 첫 민선 지방선거인 95년 6·27선거에선 무소속으로 출마, 당선돼 31대 지사를 역임했다. 그러나 98년, 2002년 두 번의 제주지사 선거에선 연거푸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그후 축협중앙회장을 거쳐 친환경 농업회사법인인 (주)삼무와 전시판매장인 삼무힐랜드를 운영했지만 지사 재직시절 뇌물수수사건에 휘말려 2년여 수감된 뒤 풀려났다. 삼무힐랜드는 수감기간 중 문을 닫았다.

 

제주삼다수와 관광복권, 제주국제컨벤션센터, 제주교역, 제주세계섬문화축제 등이 그의 지사 재직시절 작품이다. 현재 제주생태도시연구소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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