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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현장-남기고 싶은 이야기]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23)

대선열기가 한창이다. 박근혜·안철수·문재인 3인의 치열한 경합이 마무리 되면 연말 대한민국을 이끌어 갈 새로운 그룹의 등장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 선거전에서 여·야당의 후보를 정하는 경선과정을 지켜보며 나 역시 상념에 잠긴다. “그동안 참 많이 변했구나”를 실감한다. 지역 순회경선은 물론이고 당원과 수만명의 일반인이 참가하고 모바일투표가 위력을 발휘하는 걸 보며 먼 과거를 떠올린다. 그저 허허로운 웃음으로 되새겨보는 지난날이다. 1998년 민선 2기 도지사 선거에 도전하던 난 고작 99명의 대의원만 참가한 경선에서 꼬꾸라졌다. 그 한방으로 도지사 재선의 꿈은 무너져갔고, 그 때부터 내 정치인생 역정은 무한대로 꼬여갔다. 이제 그 시절의 얘기를 시작한다.

 

구좌읍 이장단 여행경비 지원 사건은 1995년 6월 민선 1기 제주도지사로 당선된 이후에도 줄곧 나를 괴롭혔다. 초대 민선지사 임기 3년 중 2년이 지난 97년 6월20일 제주지방법원에서 당선무효형인 벌금 100만원보다 적은 벌금 70만원 선고를 받고 마무리될 때까지 난 법률투쟁을 벌였다. 적용법조가 위헌소지가 있다는 우리의 주장을 받아들여 법원이 헌법재판소에 위헌법률심판 제청을 하는 등 법리싸움도 치열했다. 하지만 거꾸로 바로 이 선거법위반 재판을 겪으면서 나에겐 ‘김대중’과의 인연이 깊어졌다.

 

 

95년 6월 민선지사 선거 때 야당의 거두인 김대중 총재는 애초 제주도를 도지사후보 무공천지역으로 결정했다. 이기택계의 반발로 훗날 강보성 전 농림부 장관을 후보로 공천하지만 그의 아쉬움이 컸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제주도지사로 당선된 나를 민주당으로 영입하고 싶어했던 것이다. 고마운 마음이었다. 1987년 이탈리아에서 농무관으로 일하던 때 내 큰 아이(신용인-현 제주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수도 없이 ‘김대중’이란 인물에 대해 나에게 늘어놓은 터라 나름 그를 존경하고 있기도 했다. 그러던 차 민선 1기 도지사로 재직중이던 1995년 9월8일 김대중 총재가 연휴기간 중 정국구상을 위해 제주에 내려온다는 보고를 받았다. 도내 정보기관장이 극구 만류했지만 공항으로 영접을 나갔다. 참모들도 말렸지만 “나는 제주도민의 대표자인 도지사다. 그럼 여당총재가 오면 공항영접을 해야 하고, 야당총재는 하지 말란 말인가”라고 면박을 주고 공항으로 갔다.

 

김대중 총재는 며칠 뒤 제주를 떠나면서 제주공항 기자실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신구범 지사에 대한 부당한 정치적 박해를 묵과하지 않을 것”이라며 “신 지사에 대한 선거법 위반 수사는 정치보복 또는 표적수사로서 부당한 박해라고 생각하기에 당에서 곧 조사반을 보내 실태를 파악하고 난 뒤 대응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그가 나에 대해 두둔하는 발언을 하자 내가 김대중 총재가 이끄는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한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내가 따로 제주도청 기자실을 찾아 해명했지만 소문은 더 번져갔다. 95년 6월 선거를 앞둔 마지막 유세장에서 난 “‘제주도민당’의 후보로서 무소속을 고수, 임기 중엔 절대 특정 당에 입당하지 않겠다”고 공언한 터였다. 나로서도 난처한 입장이었다.

 

그런 인연이 있던 선거법 위반 사건이 97년 6월 재판으로 마무리되고 난 뒤 그해 8월 난 이듬해인 98년 6월에 치러질 민선2기 도지사 선거 준비에 착수했다. 특별한 준비라기 보단 오랜 인연을 둔 교수와 언론인 등을 중심으로 ‘5인 기획회의’를 구성, 기획에 들어간 것이다. 세 가지 골자를 정했다. 첫째는 독선 이미지를 압도하는 도정성과를 부각시킨다. 둘째는 약속을 확실하게 지키기 위해 무소속으로 출마한다. 셋째는 ‘돈 안드는 선거’로 새로운 정치실험에 나선다.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나의 재선 준비와 별개로 그 시절은 지금처럼 대선열기가 더 뜨거웠다. 97년 12월 선거는 이회창 후보와 김대중 후보 간 초접전 양상으로 치닫는 분위기였다. 그러다  9월에 들어서면서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이 급락했다. 아들의 병역면제 의혹이 폭로된 이후였다. 그 때에 맞춰 내 큰 아이와 둘째가 특혜로 병역면제를 받았다는 내용의 괴문서가 ‘민주호국청년연합’의 이름으로 나돌기 시작했다. 95년 말에도 구좌읍 이장단 사건이 정체불명의 발신인으로부터 도내 각종 기관에 투서로 나돌더니만 이번에도 같은 수법이었다.

 

내 큰 아이는 어린 시절 심장판막증을 앓았다. 돈이 없어 치료를 미루다 어렵사리 돈을 마련해 천신만고의 대수술을 거쳐 겨우 새 생명을 얻었다. 둘째는 팔의 기형적인 탈골현상으로 그 팔로는 자신의 몸을 지탱하기 어려운 처지다. 내 주변의 가까운 사람들은 익히 알고 있는 얘기다. 내 가슴속에도 응어리이자 안타까움이다. 그런데 그것을 이용해 선거를 앞두고 비열한 흑색선전으로 현혹하는 일들을 지켜보자니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정도만이 아니었다.

 

그 시절 나의 유력 경쟁후보는 총무처 차관으로 재직 중이었다. 어느 날 외무고시에 합격하고 외무부에서 근무하던 둘째 용규가 고향에 내려왔다. 흥분해 있었다. “아버지! 총무처 차관이 이럴 수 있습니까?” 내용을 들어보니 총무처 차관실에서 외무부 인사부서로 내 아들의 병역관계를 샅샅이 뒤지더라는 것이다. 그런 사실을 인사담당 사무관으로부터 내 아들이 들었다는 것이다. “정말 해도 너무 한다. 꼭 이렇게 비열한 방법 외에는 동원할 방법이 그리도 없더란 말인가?” 착잡했다. 선거를 앞두고 비방과 흑색선전에만 혈안인 그들이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어찌됐건 뜨거운 대선 열기는 서서히 나에게도 여파를 미치기 시작했다. 김대중 후보의 지지세가 상승하고 있던 10월7일 여당인 신한국당의 강삼재 의원은 “DJ가 비자금 670억원을 편법으로 관리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대선판도가 또 한번 소용돌이 쳤다. 그리고 그 다음날 이종찬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DJ정부 초대 국정원장)가 제주에 내려와 함께 오찬을 했다. 그는 육사 선배이기도 하지만 ‘6공의 황태자’ 박철언과 마사회 문제로 내가 맞붙을 무렵 국회에서 여러 방법으로 나를 도왔다. 그는 내가 익히 아는 이도 대동했다. 93년 우루과이라운드 협상 때 제네바의 GATT 본부 앞에서 항의할복까지 했던 이경희 농어민후계자 중앙회 회장이다. 이 부총재는 나와 만난 자리에서 조만간 다른 야당인 자유민주연합의 김종필 총재와 손을 잡는 이른바 ‘DJP 연대’가 성사될 것이기에 파급효과를 위해 그 이전에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해주기를 요청했다.

 

정치적 계산을 할 줄 몰랐다. 오직 도민과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만 했다. 너무도 순진했고 그때의 오판은 결국 두고두고 나를 옥죄고 말았다. 난 이 부총재에게 “95년 6월 선거에서 도민들에게 당선되면 무소속으로 남아 있겠다고 한 약속이 무엇보다 소중하다”고 설명했다. 다만 “DJ는 이번에 반드시 당선된다. 만약 지금보다 더 어려운 상황이 오면 난 도민과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하겠다”고 말하고 더 이상의 입당제의를 완곡히 거절했다. 물론 지금 하는 얘기지만 이 부총재와의 약속도 중요했다. 신한국당의 비자금 폭로로 DJ는 실제로 궁지에 몰렸다.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가자 난 비서진에게 국민회의 입당성명서를 준비하도록 했다. “아무래도 도와야 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러나 며칠 시간이 지나자 대통령인 YS가 비자금 문제를 덮었다. 더 이상의 폭로와 공격은 정치발전에 저해된다는 논리로 매듭을 지어버린 것이다. 그러니 나로선 이젠 입당할 명분을 찾을 길이 없었다. “더 지켜보자”고 참모에게 말하고 입당수순은 없던 일이 됐다.

 

12월 15대 대선에서 예상대로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40.3%의 득표율로 이회창 후보보다 39만표를 더 얻어 당선됐다. 당선이 확정된 12월18일 내 일기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40년간 스스로를 계발해온 김대중 후보의 대통령 당선을 축하하고, 갈라진 동서의 갈등을 하나로 어우르면서 시급히 경제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노력에 바로 착수해주기 바란다. 또한 문민정부 5년 동안 무너져 내린 나라와 사회의 중심이 정당한 권위와 강력한 리더십에 의해 복원되기를 기원한다. 우리 제주도는 이제 호기를 맞고 있다. IMF 구제금융 등 경제위기와 함께 정권교체가 이뤄졌다는 것은 제주사회가 변화를 위한 시동을 걸 에너지와 모티브를 확보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행정→경제→정치사회 순으로 개혁프로그램을 추진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김대중 정부와 제주미래 만세!”

 

새로 출범하는 김대중 정부에 대한 나의 신뢰와 기대는 이토록 컸다. 내 개혁구상이 춤추듯 날개를 달았다고 생각했다.

 

1998년 새해가 밝았다. 이제 여론은 새정치국민회의 후보가 되지 않고선 도지사 선거에 승산이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1월19일 난 이수성 전 국무총리를 서울에서 만났다. 정치적 멘토라고 생각했던 분이다. 그에게 앞으로의 정치적 진로에 관해 충고와 조언을 들었다. 그는 “지방자치단체장은 무소속이 바람직하는 생각을 갖고 있지만 현실적인 판단으로 놓고 볼 때 정당의 후보가 돼야 한다면 그쪽(국민회의)의 의중을 확인하고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그 때쯤 제주대 고창훈 교수는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의 최측근인 이문영 고려대 명예교수를 초청, 제주도청 강당에서 ‘15대 대통령 당선의 문명사적 의미’를 주제로 강연하도록 주선했다. 고 교수는 이 교수의 제자이기도 했다. 그 와중에 이문영 교수는 제자인 고 교수를 통해 OK사인을 보내왔다. 그의 말인 즉슨 내 얘기를 하자 김 대통령 당선자가 “좋습니다. 고맙습니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튿날엔 이수성 전 총리도 연락이 왔다. “누구 경쟁자가 있기는 한 것 같은데 이 문제에 대해 결정할 수 있는 사람(DJ)과 이야기 했는데 호감을 갖고 있고, 얘기도 잘 됐다. 선거준비나 잘 하라”는 것이었다. 그 사이 국민회의 박상규 부총재에게 그런 사실을 물어보자 그 역시도 같은 답을 했다.

 

제주에서는 지구당 김재호 고문과 만나 입당을 타진했다. 순수하게 지구당에 평당원으로 입당하기로 결심했다. 그게 당당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무렵 서울에서 지인의 소개로 한광옥(DJ정부 대통령 비서실장) 부총재도 만났다. 그는 “DJ가 95년 6월 선거 때 무공천 지역 결정을 했지만 이기택 계의 반발로 무산된 것과 관련, 약속을 못 지켜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 공천문제는 중앙에서 협력하겠으니 바로 입당하는 게 좋겠다”고 권유했다. 그 때부터 내 잘못이 시작되고 있었다. 난 그걸 까맣게 몰랐다.

 

그해 2월21일 난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했다. DJ가 대통령에 취임하기 며칠 전이다. 그날 입당발표 기자회견을 마치고 난 밤 박상규 부총재의 전화가 걸려왔다. “왜 아무런 사전협의가 없이 덜컥 지구당에 입당했느냐”는 것이다. 그는 곤혹스러운 듯 몇 마디 말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알고보니 내 도지사 공천문제는 박상규 부총재 라인에서 맡고 있는데 한광옥 부총재의 말만 믿고 당연한 일인 줄 알고 박 부총재와 상의 없이 입당해 버린 게 화근이 된 것이다. 그 때는 그 후의 결과를 예측할 수 없었다.

 

어쨌든 입당발표 이튿날 난 서울로 올라가 조세형 총재권한대행을 비롯한 당료들에게 인사를 했다. 당사를 나와선 서울 삼성병원에 입원중이던 권노갑 전 의원을 찾아갔다. 가족처럼 반겨주던 그는 한광옥 부총재 얘기를 꺼내며 환영했고, 특히 제주신문(현 제주일보) 김대성 회장이 자신에게 내 얘기를 많이 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3월7일 유력경쟁후보가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했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부위원장이자 총무처 차관으로 재직하던 그는 DJ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난 뒤 그의 아들인 김홍일 의원이 제주에 휴양차 내려오자 한걸음에 제주로 가 그를 알현했다. 제주도지사로 재직하던 난 김홍일 의원을 찾아가지 않았다. 그때 내 생각은 “아무리 대통령 당선자의 아들이라 하더라도 사적인 여행인데 도지사가 인사를 가는 것은 경우에 어긋난 일이자 도지사 직무를 벗어난 행동”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가 묵던 신라호텔을 찾아가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일을 망칠 일만 골라 한 것 같은 느낌도 든다.

 

 

3월 중순부터 내 공천문제와 관련해 당료들이 현지여론을 들먹이며 부정적인 말을 하기 시작했다. 한광옥 부총재가 제주에서 조직국 쪽으로 여론보고를 잘하도록 하라는 주문을 할 정도였다. 하지만 난 염려하지 않았다. 구태의 공천장난이 새 정부에선 벌어지지 않을 것으로 봤다. 더욱이 내 경쟁후보는 이미 지금의 새누리당의 전신인 민주자유당의 후보로 지사 선거에 나섰던 인물이기에 ‘철새’논란에 휩쓸릴 것으로 봤다. 내가 더 당당하고 떳떳하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3월24일엔 내 정치적 멘토인 이수성 전 총리가 장관급인 민주평통 상임부의장으로 임명돼 내가 국민회의 후보가 돼 도지사 선거에 나서는 건 기정사실화 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막판엔 문희상(노무현 정부 비서실장 역임) 청와대 정무수석이 “대통령께서 말씀이 계셨다. 제주시 등 4개 시군의 시장·군수 후보는 누가 좋겠냐"고 상의까지 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황은 점점 우려할 분위기로 흘러갔다. 당료들의 분위기는 점점 비우호적으로 변해가고 있었고, 4월20일 서울로 권노갑 의원을 찾아갔지만 분위기는 싸늘했다. 목욕을 마치고 오는 그를 오랫동안 기다리다 만난 나는 “이제 도지사 후보 경선 등록을 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이미 나는 그의 마음속에서 사라진 것이다. 그런데도 김상현 의원계의 지원을 받던 우리 경선대책 캠프의 보고는 언제나 “문제 없다”는 OK사인만 나왔다.

 

4월29일 98년 6·4 도지사 선거를 앞둔 경선이 치러지기 전날 난 중문관광단지 신라호텔에 묶여 있었다. 지금 중국의 국가주석인 후진타오는 그 시절 부주석이었다. 그는 중국정부가 제주도를 중국관광객의 여행자유지역으로 지정하기 위한 여러 조치와 관련해 제주도를 찾았다. 우리로선 매우 중요한 방문이었고, 난 도지사로서 그를 만찬까지 초대해 성대히 응접해야 했다. 그에게 만찬 도중 내일 경선이 있는데도 지금 이러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자 그는 호방하게 웃으며 “당신이 선출되는 건 문제가 없다”고 장담했다.

 

 

만찬을 끝내고 제주시 경선대책 상황실 사무실에 도착하자 시계바늘은 밤 10시를 막 넘어섰다. 이미 수일 전 경선을 앞두고 99명의 대의원을 일일이 만났다. 오미자차 선물세트를 들고 만나 제주의 미래와 비전, 새로운 제주의 구현 방안 등을 열심히 설명하고 지지를 호소했다. 결과적으로 내가 대의원들에게 한 노력은 그게 다가 돼 버렸다. 밤 10시가 넘어 내일의 경선을 걱정하던 나로선 그 대의원들에게 전화 한 통이라도 하고 다시 한번 지지를 호소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정작 전화를 받는 대의원은 한명도 없었다. 뒤통수를 얻어 맞은 기분이었다. 서둘러 차를 몰아 몇 명의 대의원들 집을 찾아가 봤다. 만나는 것은 고사하고 가족들도 “남편이 도대체 어디 갔는지 연락도 안된다”는 말만 되돌아왔다.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우리 경선캠프는 단 한명의 대의원도 만날 수 없었고,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조차 없었다. 그 때서야 떠올랐다. 설마 했는데 사실이 된 것이다. 제주경찰청장이 내게 며칠 전 “신 지사님! 상대 쪽이 대의원들을 호텔 같은 데서 합숙을 시킬려는 것 같습니다. 대책을 잘 세워야 합니다”라고 말했던 걸 후진타오의 제주체류 일정에 맞춰 도지사 역할을 다하다 보니 간과했던 것이다.

 

이틑날인 4월30일. 제주시민회관에서 새정치국민회의 제주도지사 후보 경선이 열렸다. 경선을 위한 정견발표와 경선관리위원장의 인사 등 본 행사가 열리기 전 그에 앞서 30분 전에 난 미리 시민회관에 입장했다. 그런데 뒤이어 대의원들이 나타났다. 그렇게도 찾을 수 없었던 그들은 여러 대의 검은 색 세단 승용차에서 한 무더기로 내렸다. 40~50명의 대의원이 동시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선의 투표권을 가진 그 99명의 대의원들은 핸드폰도 반납한 채 그렇게 한 곳에서 하룻 밤을 지새고 경선장에 도착한 것이다. 얼마 전까지 제주도의회 의장을 지냈던 그가 바로 상대후보의 경선대책을 총괄지휘했다. 제주에서 학생운동을 했고, 국회의원 보좌관을 지냈던 그의 역량이 기가 막힐 정도로 돋보였다.

 

암운은 이미 드리워져 있었다. 그렇다고 내친 일을 포기할 순 없었다. 대의원들에게 성실히 새로운 제주시대의 비전을 추진하게 해달라고 간곡하게 호소했다. 그러나 정작 중앙당을 대표해 온 유재건 총재비서실장은 “요즘 서울의 구청장들은 행정고시 합격했다고 목에 힘깨나 주고 까부는데 그러면 안돼요”는 말을 해댔다. 공정경선을 위한 치사를 하는 자리에서 그는 그렇게 말했다. 고시출신인 나를 염두에 둔 발언처럼 들렸다. 가관도 있었다. 상대후보는 정견발표를 하며 “위대한 김영삼 대통령을 모시고 제주도정을 펴 나가겠다”고 목청을 높였다. 물론 실수일 것이다. 하지만 난 속으로 솔직히 많이 웃었다. “저렇게 헷갈리는 정도로 진실한 마음도 없으면서 그저 권력만 잡을 심산이란 말인가”를 곱씹었다.

 

그러나 99명의 선택은 간단했다. 난 1명의 무효표를 제외, 34대 64로 완패했다. 솔직히 그런 와중에도 날 지지해준 그 34명에 대한 고마움은 지금도 마음 속에 깊이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난 그렇게 어이없게 경선에서 패배자가 됐다. 제주도민의 대표로서 다시 한번 역량을 불사르고 싶었지만 99명의 선택으로 난 그 기회를 잃어버렸다.

 

기뻐서 껑충껑충 뛰는 상대후보를 바라보며 난 혼잣말을 했다. “선거프로를 몰라보고···아마추어 정신의 빛나는 패배야.” 너무도 기가 막혀 말을 잇지 못하는 내 참모들, 말문이 막혀 결국 울음을 터뜨리는 내 지지자들에게 난 손을 내밀었다. 그들의 어깨를 두드리며 이를 깨물었다. “언젠가 기회는 또 오겠지요.”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24편으로 이어집니다>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

 

=1942년생. 오현고를 나와 육군사관학교 4년을 중퇴, 1967년 5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직자로 입문했다. 제주도 기획관, 주이탈리아 한국대사관 농무관, FAO(국제식량농업기구) 한국교체수석대표, 농림수산부 축산국장, 농업구조조정정책국장, 기획관리실장을 거쳐 YS정부 시절인 1993년 12월 제29대 제주도지사로 취임했다.

 

이어 첫 민선 지방선거인 95년 6·27선거에선 무소속으로 출마, 당선돼 31대 지사를 역임했다. 그러나 98년, 2002년 두 번의 제주지사 선거에선 연거푸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그후 축협중앙회장을 거쳐 친환경 농업회사법인인 (주)삼무와 전시판매장인 삼무힐랜드를 운영했지만 지사 재직시절 뇌물수수사건에 휘말려 2년여 수감된 뒤 풀려났다. 삼무힐랜드는 수감기간 중 문을 닫았다.

 

제주삼다수와 관광복권, 제주국제컨벤션센터, 제주교역, 제주세계섬문화축제 등이 그의 지사 재직시절 작품이다. 현재 제주생태도시연구소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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