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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현장-남기고 싶은 이야기]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21)

세계자연보전총회(WCC)가 막을 내렸다. 서귀포 중문관광단지 제주국제컨벤션센터에서 열린 그 행사를 지켜보며 나름 감회가 새로웠다. “이런 어엿한 시설이 있어 매머드급 세계환경총회를 열 수 있었다”는 주변에서의 얘기에 솔직히 내심 흐뭇하다. 하지만 내 업적이라고 일각에서 추켜 세울땐 미안함이 아니라 단호히 ‘아니다’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 제주도민들이 합심해 이룩한 금자탑’이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웬만한 도민들이 알다시피 제주국제컨벤션센터(ICC JEJU)는 아시아-유럽 정상회의(ASEM) 유치실패를 극복한 도민들의 도전의 결과다.

 

 

1996년 2월 태국 방콕에서 열린 제1차 ASEM 폐막 후 차기 개최지로 대한민국이 결정되자 난 묘한 흥분에 사로잡혔다. 30개국 내외 정상들이 참여하는 ASEM을 우리 제주도로 유치할 수만 있다면 그 기회를 활용, 제주도종합개발계획 추진을 촉진하고, 제주도를 세계수준의 관광지로 발돋움시킬 수 있을 것은 물론 21세기를 향한 제주도민의 자존을 높이고 도민통합을 이뤄내는 효과도 가져올 것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그 유치전은 서울과의 경쟁에서 실패로 끝났다. 저간의 사정을 일일이 얘기하긴 그렇지만 1996년 6월3일 ASEM 개최지는 서울로 결판이 났다. 3개월 가까이 총력전을 펼쳤지만 결과는 그렇게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그러나 나로선 어렵게 만들어진 도민통합의 기운을 그쯤에서 멈출 수 없었다. 오히려 기회로 활용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 다짐은 1996년 8월1일 제주도 도제(道制)실시 50주년 기념사에서 밝혔다. ASEM 유치에 실패한 것은 컨벤션센터를 보유하지 못한 이유였고, 그 기념사에서 ‘제주국제컨벤션센터 건립’을 제주도 내외 100만 도민에게 제안한 것이다. 물론 곧바로 한국관광연구원(원장 김철용)에 건립 타당성 용역을 의뢰했다. 단순한 관광인프라 확보가 아닌 ‘도민자존’과 ‘경영수익’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아야 했기 때문이다.

 

난 그해 9월 25일 일본 오사카로 갔다. 도민주에 의한 컨벤션센터 건립을 구상하고 있는 당시로선 무엇보다 제주출신 재일동포들의 역할이 필수적이라고 본 것이다. 오사카 공항엔 관서도민협회 오진성 회장 일행이 나를 마중나왔다. 오사카 시내로 들어가는 차 안에서 오 회장은 조심스레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제주사람들은 기부를 잘 안합니다. 예를 들어 이곳 교포학교에 학생들을 제일 많이 보내면서 학교 일에는 늘 외면하는 편이죠.” 일본경제가 어려운 시기에 왜 고향 도지사가 투자문제를 갖고 오는가란 불만과 짜증이 섞인 것으로 들렸다.

 

 

오사카 시내로 가자마자 관서흥은(關西興銀) 이희건 회장을 찾아갔다. 이 회장은 경북 출신으로 1960년대에 일본으로 건너가 교포출자를 바탕으로 금융업을 일으킨 분이다. 우리나라 신한은행 설립을 추진하기도 했으며, 특히 제주출신 교포와의 관계가 돈독한 명예제주도민이기도 하다. 그는 지원과 협력을 요청하는 내게 “제주사람들은 큰 돈을 갖고 있으면서도 여러 사람이 힘을 모아 투자하려고 하지 않는다”며 컨벤션센터 건립에 대한 협력을 기대하지 않는게 좋을 것이라고 충고했다. 그의 말에 난 이렇게 답했다. “두고 보십시오. 우리 제주인들은 이번에 확실히 힘을 모을 것입니다.”

 

당일 저녁 6시부터 강충남 전 회장을 비롯해 관서도민협회 임원들과 만찬을 하면서 컨벤션센터 건립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물론 참여는 기증이 아니라 투자임을 분명히 했다. 하지만 대부분 참석자들은 “또 돈을 받으러 도지사가 온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갖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튿날 도쿄로 간 난 도쿄국제컨벤션센터를 찾았다. 당시 개관하진 않았지만 옛 동경도청 자리에 건립한 컨벤션센터의 건립비용은 무려 일화 1650억엔이었다. 5000명 수용규모의 컨벤션센터로 현장을 돌아보며 많은 시사점을 얻었다. 어쨌든 일본 현지를 돌아본 이유는 어찌 보면 탐색적 방문의 성격이었다. 그 방문을 통해 재일동포들은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 컨벤션센터 같은 기념비적 사업엔 공감하고 있다는 걸 확인했다. 과거처럼 기증방식이 아니라 투자의 형식이라면 참여가 가능할 것이라 봤다.

 

 

그해 10월30일 한국관광연구원은 ‘제주도 컨벤션센터 건립 타당성 조사’ 용역 중간보고회를 열었다. 연구원의 김철용 원장은 교통부의 관광·항공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분인데다 70년대 초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청와대 제주도관광개발기획단에서 함께 일한 경험이 있다. 현재 경기대 교수로 재직 중인 연구책임자 한범수 박사 역시 적극적으로 이 연구용역을 실행했다. 연구용역의 결과는 긍정적이었다. 도민주 공모과정에서 논란의 대상이 됐던 수익성 부분은 굴지 회계법인인 산동회계법인이 연구참여기관 자격으로 검토했고, 수익성이 높다는 분석도 나왔다. 당연한 게 지금의 컨벤션센터와 달리 용역의뢰 조건은 수익성 위주의 경영을 할 수 있도록 면세점, 카지노, I-Max, 제주농산물 판매장 등 수익사업개발을 조건으로 제시했기 때문이다.

 

11월6일 용역결과를 보완, 도의회와 비공개 간담회를 가졌다. 일일이 열거하긴 곤란하지만 상당히 유감스런 부분이 있었다. “아직 정확한 결론이 나오지 않은 상태여서 의견수렴을 하는 처지이기에 비공개로 하는 점을 이해해달라”고 언론에 사전 양해를 구했지만 일부 기자들의 감정적 보도가 지속됐다. 당시 제주의 한 경제단체 회장은 여러 기자들을 만나 도민주 공모와 출자에 대해 의도적으로 부정적 입장을 여론화하고자 애썼다. 서울·부산·오사카 등지 컨벤션센터 투자설명회 현장에 그는 꼬박꼬박 나타나 “투자해서는 안된다”고 훼방을 놓았다. 그 시절 짐작은 가지만 한진 조종훈 회장과 삼다수 문제로 나에게 가졌던 감정으로 그는 훼방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어이가 없었다.

 

컨벤션센터 건립 타당성 조사용역의 결과는 예정대로 11월8일 나왔다. 기자회견을 통해 낱낱이 도민들에게 설명을 드렸다. 반응을 보니 도민들도 컨벤션센터 건립 필요성에 대해 공감하고 있고, 도민주를 공모하기로 한 것에 대해서도 큰 반대나 의문이 크지 않았다. 다만 용역결과인 수요추정과 수익성에 대해선 의문을 제기했다. 특히 컨벤션센터는 공익시설로서 수익시설은 안된다면서 도민주가 아닌 국고지원방식이어야 한다는 주장도 만만찮았다. 시간을 가지고 검토해야 하는데 밀어붙이기라는 비난도 있었다.

 

사실 그 당시 나로선 용역결과를 세세히 훑어보면서 계획추진이나 경영수익에 관해서는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무조건 밀어붙이기’라는 비난은 참으로 감내하기 힘들었다. 일이라는 것은 때가 있는 법이기 때문이다. 나는 서울이나 타지 나들이를 하면서 공항에 있는 JDC 면세점을 볼 때마다 면세점이 애초부터 공항이 아니라 당초 나의 계획대로 처음부터 컨벤션센터에 개점했다면 컨벤션센터는 지금보다 먼저 면세점 경영수익을 확보할 수 있고 공항보다는 이곳을 이용하는 관광객들의 체류시간 연장으로 서귀포 경제에도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몇 년 전 제주관광공사의 면세점이라도 입점한게 그나마 다행이다. 그 시절 컨벤션센터 건립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나에게 어느 교수가 해준 말이 생각난다. “컨벤션센터 건립은 제주도민의 의식 수준으로 볼 때는 아직 빠르다. 그러나 서울사람 기준으로 보면 지금 해야 한다. 세계적 기준으로 보면 너무 늦었다.”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 우리 도민들이 이루고자 했던 컨벤션센터 건립은 단순하게 수익성과 관광인프라의 측면에서만 추진될 일이 아니었다. 4·3과 개발독재시대를 거치면서 제주정신에 덧씌워진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사고, 책임과 희생을 가치의 준거로 하려는 일상에서 떠나버린 제주사회가 미래의 비전을 꿈처럼 실현시켜 가는 자존과 번영의 성숙한 사회로 진입할 수 있는 전환과 결단의 상징으로서 도민주에 의한 컨벤션센터 건립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걸 실현하는게 도지사로서 당연한 책무였다.

 

 

어쨌든 주사위는 던져졌다. 11월27일 서울 힐튼호텔 설명회를 시작으로 12월19일까지 부산, 일본 도쿄, 오사카에 이르는 대장정에 돌입했다. 설명회에는 도의회에서 한공익 관광건설위원장, 김황수 전 제주도교육감, 김여만 대기금고 이사장, 양두헌 전 서귀포시의회 의장, 윤태현 전 경영자협회 회장이 동행했다. 의회에선 논란에도 불구하고 12월13일 컨벤션센터 건립을 위한 제주도의 출자액 80억원의 예산을 의결했다.

 

우리 일행은 지금은 고인이 됐지만 일본 고베의 송순종씨도 찾아갔다. 그는 우리를 극진히 대접하며 부인 명의의 출자를 약속했다. 서귀포 출신인 그는 일생을 조총련 소속으로 북한의 교육발전에 기여했으나 어느 날 북한체제에 실망, 64년만에 고향을 찾아오기도 했던 분이다. 이어 12월17일 재일동포 김화남 사장이 경영하는 도쿄 파크호텔에서 열린 도쿄 설명회 때의 일이다. 오사카 설명회에서 한껏 분위기를 띄웠으나 도쿄에 와 보니 “도지사가 돈 뜯으러 온 것이다”란 소문이 돌고 있었다. 부정적인 생각을 바꾸는 게 급선무였다. 몇일 동안 물밑작업을 벌였는데 막상 설명회에는 많은 재일동포들이 참석했다. 대성황이었다. 오후 6시에 시작한 설명회는 밤 10시가 지나도 계속됐다. 남원읍 위미 출신인 재일본 동경도민회 현공수 고문은 출자에 비판적이었던 분이었다. 그러나 그는 설명회를 마무리하는 자리에서 건배를 제의하며 이렇게 말했다. “오늘처럼 감격스러운 날은 없었습니다. 오래 산 것에 감사를 드립니다. 일본 1세대인 입장에서 이제 죽어서 조상께 보고할 수 있게 됐습니다. 후손들에게 영광을 물려주기 위해 이 장한 사업을 추진해 나갑시다. 열심히 노력한다면 목적지인 희망봉에 도착할 것입니다.”

 

난 설명회를 통해 제주관광산업의 재도약을 위해 경제적 파급효과가 지대한 컨벤션센터를 구체적인 수익성에 바탕을 둬 도민주로 건립함으로써 도민기업화로 도민주체개발을 실현하고, 21세기를 향한 기념비적인 도민자존사업으로 추진할 것임을 약속했다. 도쿄지역에선 한경면 두모 출신의 이시향 고문을, 오사카 지역에서는 한림읍 금릉 출신인 양두경 상임 부회장을 앞으로 구성될 컨벤션센터 건립추진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하기로 내정하는 등 적극적인 참여의사를 밝혔다.

 

12월27일 강지순 정무부지사를 본부장으로 하는 컨벤션센터 건립추진본부를 발족, 지역별 추진위원회 구성과 도민주 공모계획 수립 등 본격적인 추진작업에 들어갔다. 컨벤션센터 건립추진위원장은 지역별로 서울은 정종화 서울제주도민회장, 부산은 이봉택 부산제주도민회장, 일본 도쿄는 이시향 재일동경도민회 고문, 오사카는 양두경 관서도민협회 부회장, 그리고 제주도는 장정언 전 제주도의회 의장(전 국회의원)이 각각 맡았다. 그리고 1997년 3월 17일 제주칼호텔에서 서울·부산·도쿄·오사카 등지에서 참석한 200여명의 발기인을 중심으로 주식회사 제주국제컨벤션센터 발기인 총회가 열렸다. 그후 발기인 공동대표 모임과 지역별 추진위원회를 통해 주식공모 활동이 시작됐다.

 

주식회사 제주국제컨벤션센터의 수권자본금은 1200억원, 설립자본금은 528억원으로 도민주 공모 목표는 609원이었다. 주식공모 기간 중 어려움도 많았다. 일부 정치인들의 몰이해와 비협조, 일부 경제단체의 노골적인 훼방, 일부 언론의 편견 등 때문이었다. 너무도 답답했던 나는 이렇게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부산 영도다리 들어 올리는 장면을 본 사람하고 보지 않은 사람이 싸우면 보지 않은 사람이 이깁니다.” 물론 부산과 도쿄 지역의 열기가 높았고, 사실상 도민주 공모를 주도했다.

 

6월30일 주식공모를 마감한 결과 2개월도 안되는 짧은 기간에 3만3800여명의 내외 제주도민이 적금청약을 포함해 1088억원의 주식을 청약했다. 목표액 609억원의 2배에 이르는 금액이다. 이는 노인회 어르신, 장애인, 농어민, 자영업자, 중·소상공인 등 제주를 사랑하는 보통사람들이 중심이 돼 이뤄낸 한편의 감동드라마였다.

 

주식청약이 끝나자 마침내 도제실시 51주년이 되는 1997년 8월1일 한라체육관에서 발기인을 포함한 1000여명의 주주와 도민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한 ‘주식회사 제주국제컨벤션센터 창립총회’를 열었다. 감격과 감사 이외의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우리 도민이 일을 저지른 것이다. 창립총회가 있던 날 나는 비망록에 이렇게 기록했다. “실로 감격스럽다. 도제실시 50주년이 되던 지난해 8월 ‘도민주에 의한 컨벤션센터 건립’을 도민에게 제안한 이래 꼭 1년만인 오늘 도민주로 건립될 주식회사 제주국제컨벤션센터 창립총회를 갖는다. 주식청약 및 예비청약자가 무려 3만3800명! 앞으로 동북아시아 최고의 리조트형 컨벤션센터를 건립, 새로운 천년이 시작되는 2000년에 개관할 것이다. 도민들의 자존을 바탕으로 섬의 연대를 통한 해양시대의 주역이 되고자 하는 우리 제주인이 도민주에 의한 컨벤션센터 건립사업 추진을 통해 드디어 하나로 통합된 것이다.”

 

컨벤션센터 건립예정지는 서귀포 중문관광단지 2차 지구 내 한국관광공사 소유 호텔부지 3만2680평 가운데 1만6000평으로 결정, 소유자인 한국관광공사가 현물출자하기로 합의가 됐다. 나머지 부지는 연계호텔 부지로 매각하기로 합의했다. 지금의 앵커호텔 부지다. 내가 이 부지를 선택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내가 제주도지사로 부임했을 때 제주도 종합개발계획안이 도의회에서 심의 중이었다. 그런데 이 호텔부지가 주상절리층인 지삿개바위 지적경계선 30m 까지로 되어 있었다. 이렇게 되면 주상절리가 호텔의 바다정원이 되고 공사 중 무너질 우려가 있었다. 내가 교통부, 관광공사와 갈등을 빚으면서 30m를 80m로 밀어냈던 사연이 있는 땅이다. 그리고 관광공사가 이 부지를 출자하도록 함으로써 중문관광단지를 조성할 때 수용 당했던 제주도민들의 땅을 일부 되찾는다는 뜻도 있었다.

 

그러나 두가지 문제가 있었다. 컨벤션센터의 수익사업 보장을 위해 구상한 게 카지노와 면세점이었다. 결국 함께 건설될 호텔에서는 카지노와 면세점 등 부대사업을 포기해야만 했다. 또 하나는 호텔에만 한정된 카지노 사업을 컨벤션센터에서도 가능하도록 관광진흥법을 개정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난 그 시절 대우그룹을 생각했다. 김우중 회장의 부인인 정희자 힐튼호텔 회장을 만났다. 정 회장은 경희대 건축학과 출신으로 호텔과 컨벤션 업무에 정통할 뿐만 아니라 박정희 대통령 시절 중문에 호텔을 세울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걸 아쉬워하는 사람이었다. 특급호텔을 지으면서 카지노와 면세점 같은 부대사업을 못하게 한다면 호텔을 지을 업체가 대우 말고는 없다고 봤다. 대우는 예상대로 참여의사를 밝혔다.

 

그런데 또 문제가 생겼다. 컨벤션센터와 호텔을 동일구역에 짓게 될 것이므로 컨셉 디자인을 대우와 공동으로 공모했다. 접수된 작품 가운데 미국 솜(SOM)사와 일본의 니혼세케이(日本設計)사 작품이 뛰어났다. 정 회장은 솜사의 작품을, 난 니혼세케이사 작품을 선호했다. 솜사의 작품은 호텔 위주였지만 니혼세케이사 작품은 컨벤션센터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심사위원회에서도 솜사의 작품을 추천했다. 그러나 나는 이를 무시하고 니혼세케이사 작품을 최종결정했다. 제주도민의 자존덩어리인 컨벤션센터가 재벌의 호텔에 눌려서는 안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98년 3월30일 중문단지 2차 지구 1만6000평의 부지 위에 세워질 연건축면적 1만6600평 규모의 컨벤션센터 기공식을 가졌다. 그 자리에서 나는 “제주국제컨벤션센터 건립이야 말로 잃어버린 탐라 천년 자존의 복원이며, 제주인의 잠재력을 확인한 도전이자, 21세기를 향한 제주인의 미래”라고 역설했다. 그날 인접한 바다는 거울 같이 맑았고, 바람 한 점 없는 청명하고 화창한 봄 날씨였다.

 

그리고 그 컨벤션센터는 2003년 3월22일 위용을 드러냈다. 그러나 제주도민의 금자탑이 위용을 드러내기까진 우여곡절도 많았다. 당초 5000석 규모의 매머드홀로 설계된 컨벤션센터는 그후 3500석 규모로 규모가 줄었다. ‘한국컨벤션산업의 선두주자’가 되고자 국내 전역에서 우수인력을 뽑아 간판인력으로 키우고 싶었지만 설립 초기 공채 임직원은 지금 온데 간데 없이 사라졌다. 컨벤션센터 건립이 중요한 게 아니라 수익성을 담보하기 위한 후속조치가 필수적이었는데 최근에서야 내국인 면세점이 겨우 입점했다. 주식청약과 적금청약을 했던 내외 제주도민들 다수도 결국 투자의지를 거뒀다. 연계시설로 기획한 앵커호텔은 이제야 골조를 마무리했지만 아직도 개관은 더 기다려야 한다.

 

왜 이러는지 답답한 마음이다. 한 두해 전도 아닌 16년 전 우리 도민이 합심한 기획은 도대체 언제 완성될 수 있을까? 기다리는 마음이 몹시 우울하다. <22편으로 이어집니다>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

 

=1942년생. 오현고를 나와 육군사관학교 4년을 중퇴, 1967년 5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직자로 입문했다. 제주도 기획관, 주이탈리아 한국대사관 농무관, FAO(국제식량농업기구) 한국교체수석대표, 농림수산부 축산국장, 농업구조조정정책국장, 기획관리실장을 거쳐 YS정부 시절인 1993년 12월 제29대 제주도지사로 취임했다.

 

이어 첫 민선 지방선거인 95년 6·27선거에선 무소속으로 출마, 당선돼 31대 지사를 역임했다. 그러나 98년, 2002년 두 번의 제주지사 선거에선 연거푸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그후 축협중앙회장을 거쳐 친환경 농업회사법인인 (주)삼무와 전시판매장인 삼무힐랜드를 운영했지만 지사 재직시절 뇌물수수사건에 휘말려 2년여 수감된 뒤 풀려났다. 삼무힐랜드는 수감기간 중 문을 닫았다.

 

제주삼다수와 관광복권, 제주국제컨벤션센터, 제주교역, 제주세계섬문화축제 등이 그의 지사 재직시절 작품이다. 현재 제주생태도시연구소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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