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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현장-남기고 싶은 이야기]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19)=1부 끝

오키나와를 만난 건 행운이었다. 제주도가 판을 벌인 섬관광정책(ITOP) 포럼에 오키나와를 끌어들이려는 게 내 목표였지만 오키나와를 만난 뒤 새로운 비전이 생겼다. 1996년 4월 비공식 일정으로 오키나와를 찾았던 나는 방문 첫날 오타 마사히데 지사와의 협의가 순조롭게 마무리되자 이튿날 오후 홀가분한 마음으로 아내와 관광길에 올랐다. 오키나와가 자랑하는 나하시의 수리성(首里城)과 이토만시의 평화공원, 옥천동굴 등을 둘러보았다. 그 중에서 난 수리성에 큰 충격을 받았다.

 

 

오키나와에 있었던 유구왕국(流球王國)은 14세기 초부터 중국·일본으로부터 동남아시아를 연결하는 광대한 교역로를 구축, 대외교역이 활발했던 곳이다. 오키나와의 본 섬인 수리를 근거지로 화려한 해양문화를 꽃피운 국가다. 그 본영인 수리성은 슈레이몬, 간카이몬, 벤자이텐도, 엔카쿠지 총문, 수리성 정전 등으로 구성돼 있다. 물론 수리성이 그중 가장 중요한 건축물이다. 유구왕국에서 국왕의 정무(政務)와 예식에 사용된 오키나와 최고의 목조건축물이 그곳이다. 우리가 본 건 1992년 중건된 건축물이었다. 내 충격은 바로 이 수리성 정전 안으로 들어서며 시작됐다. 유구왕국 왕의 연대표와 왕의 초상을 본 이유 때문이었다.

 

비록 왕국이 존속했던 시대는 다르지만 우리 제주 역시 탐라국(耽羅國이)란 옛 독립왕국이 있었다. 그런데 난 초등학교 시절 “태정태세(太正太世)···” 하면서 이(李)씨 조선왕의 이름은 외웠어도 탐라국 왕의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 뿐만 아니라 왕궁은 어디 있었는지, 왕의 무덤은 어디에 있었는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그런데 오키나와는 왕의 초상과 집권 연대표는 물론 유구왕국의 역사를 43권의 역사서로 집대성해 보존하고 있었다. 충격 이면에는 우리 제주의 무지와 그 동안의 소홀이 부끄러웠다. 오타 지사를 비롯해 오키나와 현민들이 본토에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자존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그 바탕엔 스스로가 자랑스럽게 간직하고 있는 유구왕국이 있었던 것이다. 그곳에서 오키나와의 자존을 지키고 있는 유구정신이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로마인 이야기’를 쓴 시오노 나나미는 그렇게 말했다. “지식에 있어서는 그리스인 만도 못하고, 기술에 있어서는 에투루리아인 만도 못하고, 용기에 있어서는 켈트인 만도 못하고, 경제에 있어서는 카르타고 만도 못한 로마가 세계를 제패할 수 있었던 것은 로마인의 주인정신, 바로 자존때문이었다”고 했다.

 

그것까지 생각이 미치다 보니 나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제주인의 자존은 어디에서 연연하는가? 지금 그 자존이 제주 발전의 엔진이 되고 있는가?” 나는 망연자실할 수 밖에 없었다.

 

 

오키나와를 다녀오자 마자 김봉옥 선생의 ‘제주통사’를 읽어보고, 제주MBC가 프로그램으로 내보냈던 ‘잃어버린 탐라 천년의 역사’ 영상물을 구해서 봤다. 곽지·금성·고산 등 유적지와 탐라시대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을 찾아다녀 보기도 했다. 그리곤 쉬지 않고 이런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우리 제주도민은 탐라국 왕족의 후손들인가? 우리 조상들이 왕이었던 시대, 그 시대의 정신은 무엇인가? 탐라국 삶에서 제주인의 자존은 어떻게 구현됐는가? 탐라왕국 없이 오늘날 제주인의 정체성 정립이 가능할까?”

 

서기 2세기부터 1천년 간 존속한 탐라왕국은 고려 숙종 10년인 1105년 종언을 고했다는 것이 통설이다. 그후 제주도는 고려의 지배, 몽고의 지배, 그리고 조선시대를 거쳐 일제시대에는 전라남도에 편입된 섬으로 남아 있다가 제주 내 요청을 받아들인 미 군정장관 러치에 의해 1946년 8월1일 도(道)로 승격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생각이 여기쯤 미치자 난 제주대에서 사학을 전공한 박찬식 박사(제주4·3연구소장 역임, 현 제주4·3추가진상조사단장)를 도지사비서실 정책보좌관으로 임명했다. 제주인이 주인이 되는 제주사(濟州史)를 조사·연구할 방안을 검토시킨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1997년 2월28일 국내·외 사학자와 향토사학자로 구성된 ‘제주사정립추진위원회’가 발족됐다. 서울대 사회학과 신용하 교수가 위원장 책임을 맡았다.

 

이 추진위원회는 기존 왕조사의 일부분으로 기록돼 온 제주사를 재조명하고, 제주인이 주인 되는 주체적인 역사조사 연구사업을 수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탐라국 시대사 정립 및 제주사 연표(年表) 작성 등 사업에 전념하기로 했다. 실제로 활동도 본격화, 사업 첫해인 1997년 ‘탐라사 연구에 대한 회고와 전망’을 통해 향후 연구방향을 설정하는 데 주력했고, 유적관련 사업도 벌여 애월읍 금성리 석축유적을 조사해 탐라시대 다른 지역과의 교류를 입증해주는 중국화폐 등 다수의 유물도 발굴했다. 또 그해 12월12일엔 도내 학자 8명, 국내학자 11명, 일본학자 3명 등 국내·외 학자들이 참가하는 학술세미나를 열어 어느 정도 제주사 정립의 기틀을 잡았다. 98년 8월에는 탐라국 역사를 규명하는 데 필수적인 고고학적 유적·유물자료를 총망라해 체계화 한 ‘탐라문화와 역사’란 책을 발간하기도 했다.

 

물론 그런 제주사 정립사업의 기틀 마련은 제주출신인 신용하 교수를 비롯해 이청규 교수 등 많은 학자들의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특히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에겐 각별한 고마움과 함께 큰 빚을 지고 있다. 97년 3월 말 제주시내 그랜드호텔에서 열린 대우 신차 발표회에 참석한 그는 지역 유지들과 환담하는 자리에서 제주사 정립 필요성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는 “나이가 들면 고향을 생각하게 된다”며 “사업에 필요한 돈으로 쓰라”고 1차로 10억원을 쾌척했다.

 

하지만 98년 선거에서 낙선, 내가 도지사직에서 퇴임한 후 제주사 정립사업은 흐지부지됐다. 김우중 회장도 구제금융(IMF) 사태 이후 대우그룹 해체와 더불어 당시 영어(囹圄)의 몸이 됐다.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이 없다.

 

 

그 시절 서울대 문화인류학과 전경수 교수는 1998년 1월호 ‘신동아’ 기고문을 통해 “대한민국이 제주도를 예인선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중국의 동중국해 벨트에 제주도를 참여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홍콩-상해-대만을 거쳐 오키나와에 이르는 거대한 벨트형의 다국적 자유무역 지대가 현성되고 있는 현장을 주목하라”는 것이었다. 그는 “과거의 변방이 미래의 중심으로 자리잡는 구조적 전환의 다가오고 있다”며 “그것이 제주도에 이르는 벨트가 돼 미래 아시아-태평양권의 실질적 기둥이자 유라시아 대륙의 관문 역할을 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시공은 달라도 같은 생각과 동일한 비전을 공유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건 행운이다. 난 이미 제주사 정립사업을 구상하면서 만나야 할 사람 중 하나로 전 교수를 꼽고 있었다. 제주학회 회장을 맡기도 했던 그는 외가가 제주라는 인연이 아니라 하더라도 인류학자의 입장에서 제주의 미래와 역할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있는 학자이기 때문이다.

 

1997년 7월 민선도지사 취임 2주년 기자회견은 사실 그런 비전을 담고 있었다. 내용은 이랬다. “···첫째, 21세기 제주비전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법적, 제도적 장치를 확보하겠습니다. 현재 시행 중인 제주도개발특별법은 중앙정부의 관점에서 제주개발을 위한 개발시대의 체계와 내용을 담고 있으며, 2001년까지 한시법이기 때문에 제주개발특별법의 전면 개정을 추진해 세계화, 지방화 시대에 걸맞은 지역 종합발전 및 지원법의 체계와 내용으로 전환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에는 21세기 제주도의 위상과 역할, 지방행정체제의 실효성 확보와 시범자치지역 개념의 도입, 자율적인 조례제정권의 확보, 제반 경제규제 입법에 대한 특례의 설치, 교육·대학·경찰 등 국가 권한의 시범적 재배분 등이 포함될 수 있으며···.”

 

표현이 조심스럽고, 열거적이어서 당시 언론은 그 본뜻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 하지만 내용은 한마디로 “중앙정부는 외교·국방·사법권만 갖고 나머지 권한은 모두 제주도 지방정부로 이양시키라”는 요구이자 홍콩과 유사한 특별행정자치구의 구상을 천명한 것이다. 때가 대선을 앞둔 시기여서 당시 대통령 후보 중 이회창 후보와 김종필 후보는 수용의사를 표명했다. 그러나 김대중 후보는 수용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본인이 대통령에 당선될 경우 전면적 지방자치를 실시할 것이기 때문이라는게 이유였다.

 

어쨌건 이 기자회견 이후 난 세계섬문화축제에 대한 정부 차원의 관심과 협력을 얻어내기 위해 중앙부처를 돌았다. 그 가운데 권영해 국가안전기획부장을 찾아갔을 때 그는 이 기자회견을 빗대 이렇게 말했다. “신지사! 제주도 독립운동 한다며?”

 

사실 제주도의 국제화, 세계화 구상은 멀리 199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93년 말 내가 제주도지사로 부임했을 때 제주의 비전은 ‘동북아 문명권의 중심축’이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 말의 구체적인 의미와 행동계획은 없었다. 도지사 축사와 기념사 곳곳에서 이 말이 인용되고 있었지만 정작 그게 무슨 의미냐고 물어보면 추상적인 답 이상은 없었다. 그때 난 제주대 동아시아연구소(소장 고성준 교수)와 협의해 ‘환태평양 시대 제주도의 국제화 전략에 관한 연구’란 긴 이름의 연구용역을 의뢰했다.

 

그 연구엔 소장인 고성준 교수를 비롯해 고충석·김경택·김부찬·유철인·장성수·장원석 교수 등이 참여했다. 김세택 대사와 좌승희 한국경제연구원장, 문정인 연세대 교수 등도 협력한 것으로 안다. 그 연구는 싱가폴과 일본 삿포로 현지 조사를 통해 제주도의 국제화 전략으로서 ▶국제화의 법·제도적 기반 조성 ▶도민의식의 국제화 ▶지방산업의 국제화 전략 ▶동북아 해역권 구상 ▶해양화 전략의 수립 ▶‘제주국제교류재단’(가칭)의 설립 등을 제시했다. 이 가운데서도 동북아 해역권 구상은 오늘날 시범자치지역, 경제특별자치구, 국제자유도시, 특별자치도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고 있는 제주도 세계화 전략의 기조가 되고 있다.

 

 

난 1997년 9월부터 경제특별자치 실현을 위한 시범자치지역 추진 준비에 착수했다. 우선 제주도개발특별법 개정 실무위원회를 구성했고, 후일 제주대 총장을 역임한 부만근 교수가 위원장으로 수고해 주었다. 위원회는 이후 도민의식조사도 했다. 그때 도민 15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시범자치에 대한 찬성반응이 61.1%가 나왔다.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런 준비가 있었던 터라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새 정부와 시범자치 문제를 본격적으로 협의할 방안을 찾기 시작했다. 비서실에서 정책을 담당하는 송재호 박사를 중심으로 기본구상을 검토하는 한편 전 국토연구원(KDI) 원장 송희연 박사 등과 새정치국민회의(민주당의 전신) 관계자들을 만나 대통령께 보고 준비를 했다.

 

1998년 4월6일 국회에서 새정치국민회의·자민련 8인 공동협의회 산하 민생안정대책위원회(위원장 송희연)에 ‘IMF 위기 극복과 민생안정을 위한 제주도의 국가전략적 비전’을 보고했다. 거기에서 시범자치지역을 좀 더 경제적으로 특화한 ‘제주도 경제특별자치구’ 구상을 제안했다. 그 구상은 쾌적한 환경, 안락한 주거와 함께 관광·휴양·금융·정보·지식산업 등이 국제적으로 집적되고 거점화되는 ‘세계자유시간도시’를 건설하려는 것이었다. 관광자유화, 외국인 투자 자유지역화, 평화의 섬 지정 등으로 구체화되는 개념이다.
그런 제주의 경제특별자치구 구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특별법 체계가 필요했다. 새로운 법을 제정하는 방안도 있지만 이미 제정된 제주도개발특별법을 전면 개정해 지방행정의 자율성 보장, 독자적 조례제정권의 확보, 교육·경찰 등 국가권한의 지방이양 등을 포함하는 ‘특별자치’적 요소를 중점적으로 확보하는게 바람직할 것으로 보았다.

 

이런 경제특별자치구 구상은 중앙정부 주도가 아니라 제주도가 제안하고, 주체적으로 정부의 협력을 얻어 추진하려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구상은 98년 4월30일 새정치국민회의 제주도지사 후보 경선에서 패배함으로써 중단됐다. 물론 그런 구상의 일부분을 이어 받아 제주도 국제자유도시 추진이 이뤄지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지금의 국제자유도시 추진이 과거와 같은 오류가 반복되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정부가 제주도민의 의견을 제대로 수렴하지 않고 1991년 제주도개발특별법을 제정해 10년간 우롱하던 때의 양상이 곳곳에서 보이기 때문이다. 제주개발특별법을 대체한 ‘제주특별자치도 설치 및 국제자유도시 조성을 위한 특별법’은 “제주국제자유도시를 효율적으로 조성하기 위해 특별자치도를 설치한다”고 명시돼 있다. ‘국제자유도시’가 목표고, ‘특별자치도’가 수단이자 도구란 말이다. 본말이 전도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꿈과 도전-1부·끝>

 

알립니다=여러분의 열띤 성원으로 연재중인 <격동의 현장-남기고 싶은 이야기: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가 이제 1부를 마무리합니다. 19편에 걸쳐 매주 화요일 오전 선보인 5개월간의 연재물에서 제이누리는 신 전지사의 <꿈과 도전>을 보여드렸습니다. 8월27일과 9월4일 게재될 20, 21편에서 제이누리는 1부를 정리하는 신 전지사의 육성강연 초록을 선보입니다. 그의 이상과 비전을 일목요연하게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이어 9월11일부터는 <신 전지사의 남기고 싶은 이야기 2부-새로운 도전, 그리고 좌절과 시련>을 보여드립니다. 지금처럼 여러분의 아낌없는 성원과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
=1942년생. 오현고를 나와 육군사관학교 4년을 중퇴, 1967년 5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직자로 입문했다. 제주도 기획관, 주이탈리아 한국대사관 농무관, FAO(국제식량농업기구) 한국교체수석대표, 농림수산부 축산국장, 농업구조조정정책국장, 기획관리실장을 거쳐 YS정부 시절인 1993년 12월 제29대 제주도지사로 취임했다.

 

이어 첫 민선 지방선거인 95년 6·27선거에선 무소속으로 출마, 당선돼 31대 지사를 역임했다. 그러나 98년, 2002년 두 번의 제주지사 선거에선 연거푸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그후 축협중앙회장을 거쳐 친환경 농업회사법인인 (주)삼무와 전시판매장인 삼무힐랜드를 운영했지만 지사 재직시절 뇌물수수사건에 휘말려 2년여 수감된 뒤 풀려났다. 삼무힐랜드는 수감기간 중 문을 닫았다.

 

제주삼다수와 관광복권, 제주국제컨벤션센터, 제주세계섬문화축제 등이 그의 지사 재직시절 작품이다. 현재 제주생태도시연구소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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