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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현장-남기고 싶은 이야기]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17)

선거 얘기를 2회에 걸쳐 말씀드렸다. 1995년 첫 민선지방선거인 6·27 선거 전후의 얘기였다. 내 인생사에서 중요국면이 그것이었지만 오늘은 좀 다른, 특이했던 선거 얘기를 전하려 한다. 내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이 후보로 출마한 국제무대에서의 선거 경험이다. 물론 그 시절 외국 땅을 밟고 생활을 하던 사람의 형편도 곁들여 말하고 싶다. 그곳에서 만난 남북의 문제도 짚어보려 한다. 4년여 세월을 보냈던 이탈리아 로마에서의 얘기다. 내 조국의 현실을 돌아본 계기가 됐던 일이기에 이 자리에 기록으로 남겨두고자 한다.

 

농림부의 국장급인 농업교육원 교수부장이 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주(駐)이태리 대사관 농무관 발령을 받았다. 느닷없이 나온 외교관 발령이어서 경황이 없었다. 1984년 9월 말의 일이다. 그런 경험도 없었거니와 과거의 전례로 놓고 봐도 고달픈 생활일 것이란 짐작이 갔다. 더욱이 마침 그 때는 큰 아들이 대입을 목전에 둔 고3 시절이어서 마뜩치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것 저것 챙기고 이태리행 비행기에 몸을 실을 수 밖에 없었다. 대입 학력고사를 치를 큰 아이는 물론 옆에서 식사라도 챙겨야 했기에 아내를 두고 고1인 둘째와 중1인 막내를 데리고 떠났다.

 

 

로마에 도착한 첫날 막막했다. 하지만 멍하니 하늘만 쳐다볼 순 없었다. 대사관에 짐을 풀고 숙소를 배정받은 뒤 물어물어 아이들의 학교를 알아봤다. 로마에 도착한 이튿날 아이들을 학교로 내보냈다. 어메리칸 오버시즈 스쿨 오브 롬(American Oversea's School of Rome)이란 미국계 학교다. 간단히 저간의 사정만 듣고 우선 그 학교로 입학시킨 것이다. 모든 게 서툴렀다. 대사관 일도 힘들어 죽겠는데 말이 통하지 않는데다 관사로 가 보면 두 아들은 즐비한 숙제거리를 안고 낑낑대고 있었다. 부자가 함께 머리를 싸매고 숙제를 하는 꼴이 지금 생각해보니 우스꽝스런 풍경이다. 다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 때의 경험으로 아이들이 영어에는 자신감이 붙은 것 같다. 로마생활 6개월이 지난 어느 날 막내 녀석이 "아버지 쓰는 말 영어 맞아요?"하고 내게 물었다. 나는 대답해줬다. "그래, 아버지 영어는 UN English다. 이놈아!" 아이들의 영어구사능력이 하루하루 달라지고 있음을 확인하면서 나는 기뻤다.

 

아내는 큰 아이가 대입 학력고사를 치른 바로 다음날인 11월 말 로마로 왔다. 그제서야 좀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솔직히 아버지와 두 아들, 그렇게 남자 셋이서 보낸 두 달 가까운 세월 동안 집안은 난장판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때 쯤 골프를 배울 생각이 없던 내가 골프채를 구입한 사연이 있다. 하루는 이태리 주재 한국대사인 이남기 대사(한국해외개발공사 이사장, 수원대 법학과 교수 역임)가 나를 힐난했다. “외교관이 골프를 못 치면 되냐”고 나를 타박한 것이다. 돈도 없는 주제에 눈을 질끈 감고 골프채를 주문했다. 나와 같은 시기에 로마에 부임한 이진기 공보관과 함께 미국 뉴욕으로 골프클럽 한 세트를 주문했다. 외교관 신분이어서 면세로 물건을 살 수 있었지만 그래도 미화 400달러나 줬다. 84년에 구입한 밴 호간(Ben Hogan) 풀세트다. 하지만 그 골프 세트는 현재 포장도 뜯지 않은 상태로 내 집 창고에 고스란히 모셔져 있다. 얼마 전에 어느 지인에게 이 얘기를 했더니 그는 대뜸 "대단한 명품 골동품을 소장하고 있다"며 눈을 반짝였다. 하지만 나에겐 그저 과거 한 시절을 회상할 때 등장하는 소품에 불과하다.

 

골프를 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막상 아내가 로마로 오자 뒤죽박죽 돼 가고 있던 집안이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대사관 일도 손에 익혀가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막상 골프채는 구입했지만 라운딩을 하러 갈 수 있는 때는 당연히 주말일 수 밖에 없었다. 하루는 혼자 골똘히 생각해보니 “골프를 치러 나가면 아내는 일요 과부가 될 판이고, 아이들은 주말 고아가 될 수 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고국에서도 그리 가정에 잘하지도 못한 주제에 이곳까지 와서 가족을 내팽개칠 순 없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결국 그 골프채는 포장도 그대로인 채 집안 한 귀퉁이로 쳐박혔다. 그리고 난 주말 테니스로 여가를 보냈다. 두 아들과 아내가 섞이니 자연스레 복식 테니스조를 만들 수 있고, 체력도 다지니 훨씬 좋다고 생각이 들었다. 마침 이웃이 테니스장을 운영하는 프랑코란 친구였기에 비용도 그리 많이 들지 않았다.

 

아이들 학비문제도 어려움이었다. 이것저것 재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낼 상황이 아니어서 일단 학교를 집어 넣긴 했는데 나중 학비 고지서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학생 1인당 한 학기 등록금이 자그마치 1만 달러였던 것이다. 6개월에 2만 달러, 1년이면 4만 달러를 학비로 써야 하니 팍팍한 한국 공무원 월급으론 솔직히 충당이 어려웠다. 물론 그 당시 정부는 외교관 자녀에게 학생 1인당 월 300달러의 학비보조금을 줬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택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학교를 찾아갔다. 솔직히 지금 생각해보니 무슨 배짱이었는지 나도 모르겠다. 교장을 만나 여러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학비가 부담된다는 말을 꺼냈다. 그러자 그 교장은 “어떻게 해주면 좋겠느냐”고 나에게 되물었다. 여지없이 “학비를 좀 깎아달라”고 말했다. 그 교장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당신에게만 특별한 혜택을 드린다. 다른 곳엔 말하지 말라”며 흔쾌히 학비를 줄여줬다. 나로선 그 교장에게 미안한 감정이다. 그 비밀을 누설하는 바람에 나중 우리 한국대사관 직원들은 나의 사례를 들어 모두 학비할인을 받았다. 지금도 그분에게 송구스럽다.

 

 

그러나 그 로마생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바로 북한이다. 외국에서 만난 북한의 실상이었고, 국제무대에서의 우리와 북한과의 관계에 대한 내 인식의 재정립이 이뤄진 게 바로 그 4년여 로마생활 때문이었다.

 

로마의 한국대사관 생활이 어느 정도 익숙어 갈 무렵 나에겐 의문이 하나 떠올랐다. 내가 그곳 대사관에서 부여받은 직무는 유엔 산하 국제식량농업기구(FAO) 한국측 교체수석대표다. 덜렁 사무관 한명을 데리고 그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가만히 과거 역사를 훑다보니 우리가 1965년 그 FAO의 이사국이었는데 20년이 넘도록 이사국에 끼어보지도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정을 알아보니 바로 북한의 철저한 견제 때문에 우리가 국제사회에서 기를 펴지 못하고 있던 현실이 나타났다.

 

그때 북한은 이탈리아와 수교국이 아닌 터라 FAO 본부가 있는 로마에 대표부만 두고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7명의 직원이 상주하고 있었고, 그때 대표는 나중 남북 화해무드에 등장하는 송호경 아·태평화위원회 부위원장(2004년 사망)이 그 시절 대표부 대사였다. 북한의 경우 유럽활동의 거점이 바로 독일과 이태리였기에 로마는 그들의 국제무대 역량을 집중하는 중요 포인트였다.

 

대충 사정을 알게 되자 나로선 어찌됐건 나의 임무 범위 내에서 북한 대표부와의 관계 재정립을 통해 민족문제에 접근해보리라 마음 먹었다. 우리가 FAO 이사국에 진출해야만 풀릴 일이 많았고, 그러기 위해선 우선 북한을 잘 설득할 필요가 있다고 본 것이다. 수차례 그쪽 대표부 직원들과 개인적 접촉을 시도해 봤다. 그러나 “식사나 함께 하자”고 말을 건네면 돌아오는 답은 “통일된 다음에 합시다”란 소리 뿐이었다. 언제나 그들은 2인1조로 움직였고, 식사도 함께 기거하는 숙소에서만 해결하고 있었다. 도무지 만남 자체가 어려웠다.

 

그래도 어쩌다 마주치면 그 시절 그들이 걸어오는 말이 있었다. 1987년 민주화운동이 한창이던 대한민국 격변의 시기였다. 북한 친구들은 “대학생들과 인민들이 왜 그러는가?”라며 떠보는 말을 잘했다. 난 그렇게 되받았다. “전두환 대통령이 군부독재를 하니 물러가라는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도 장기집권하며 독재하다 말을 안 듣더니 결국 총에 맞아 죽었다”고 답했다. 그 친구들은 좋아했다. 그 말로 끝내려는 게 내 본심이 아니었다. 말문이 닫힐 새라 놓치지 않고 “그런데 40년 동안 독재한 김일성은 어찌 그리 건재한가”라고 물었다. 한술 더 떠 옷에 단 김일성 뱃지를 보며 “괜찮아 보이는데 나도 하나만 얻을 수 없겠냐”고 들이댔다. “불경스럽게 당신 무엇하는 짓인가”라며 그들이 나를 노려봤다. “신 선생! 당신 농림부에서 온 거 아니죠?” 그들은 그런 대화가 오가자 나를 흡사 한국의 국가안전기획부(지금의 국가정보원) 소속 요원으로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래도 난 집요하게 그들을 물고 늘어졌다. 그 친구들의 기라도 죽일 여러 꾀를 부렸다. 우선 한 일이 이태리에 가자 마자 구입한 독일제 BMW518 시리즈 자동차를 한국산 스텔라로 바꾸는 것이었다. 외제차라고 해서 호화 사치품일 것이란 오해는 없었으면 한다. 그저 미화 1만 달러를 주고 산 사실 값 싼 모델이다. 그 차를 아내에게 타라고 주고 한국산 차를 수입했다. 그 당시엔 한국자동차가 유럽시장에 없었기에 주문 후 수입하는 절차를 거쳤다. 그리곤 차량 앞에 깃대를 매달아 태극기를 걸었다. 한국산 자동차의 우수성도 알리고, 북한 친구들에게 한국산업의 발전상을 보여주려는 의도였다.

 

 

어쨌든 우리나라를 FAO 이사국에 진출시키려는 내 계획은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FAO의 경우 아시아에 배정된 이사국 숫자는 9개국인 반면 그 이사국에 진출하기 위해선 제3세계권인 비동맹그룹, 즉 인도와 필리핀·인도네시아 등의 내락을 얻어야 했다. 그런데 그 나라들은 하나 같이 우리보단 북한과 가까웠다. 한국이 비집고 들어가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해내리라 마음 먹었다.

 

1987년 6월17일 정부에 훈령을 요청했다. 이곳에서 이사국 진출을 위해 뛸 터이니 그 계획을 승인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때 아시아그룹 의장은 필리핀의 카란당(Carandang)이었다. 우선 만나서 협력을 요청했다. 일단 운이라도 떼야겠다는 생각이었다. 7월 들어 정부에서 대답이 왔다. 그 업무는 외교부 국제기구조약국이 담당이다. 그 때 국장이 제주출신이자 내 고교선배인 김세택 대사(싱가폴, 덴마크, 본부대사 역임)다. 전화가 왔다. 그는 대뜸 물었다. “너 자신 있냐?” 내 대답은 “한번 해보겠습니다” 였다. “계속 이대로 눌려 지낼 순 없지 않냐?”고 말하자 그는 “알았다. 해봐라”고 나를 격려했다. 그는 “우리 우방들에게 협력을 요청하겠다”고 말했다. 이후 우리 정부는 우호협력국에 이사국 진출 지원을 요청하는 ‘Note Verbal'(통지문)을 보냈다.

 

그리고 그해 10월15일 아시아그룹 회의에서 대한민국의 이사국 진출을 위한 출마방침을 공식 선언했다. 곧바로 파키스탄과 버마·태국이 우릴 지지하고 나섰다. 그러자 이종혁 북한 부대표가 들고 일어섰다. “남한이 출마하면 우리도 출마한다”고 으름장을 놨다. “남한이 출마하지 않으면 우리도 하지 않는다”는 친절한 부대조건도 내밀었다. 인도는 이를 이용하고 있었다. 자신들과 특수관계인 스리랑카의 이사국 진출을 원하던 인도는 이사국 진출을 위한 남·북한의 경쟁을 은근히 즐기고 있었다. 북한을 꼬드겨 한국을 제압한 뒤 자신들이 선호하는 스리랑카가 어부지리를 챙기도록 하겠다는 전략이었던 것이다.

 

상관 없었다. 어차피 상황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우리 쪽 입장에서 북한의 이사국 진출 경쟁과 맞물린다 하더라도 일단 도전해야 할 일이었다. 지나치다 만난 북한 대표부 인사들에게 난 “출마해라. 총회에서 한번 겨뤄보자”고 호기를 부렸다. 87년 11월7~13일 제24차 FAO총회가 열렸다. 우리의 이사국 진출은 여기서 결정되는 것이었다. 선거전이 시작된 것이다. 우린 주로 사이프러스, 니카라과, 몽골, 아이보리 코스트, 콩고, 리비아, 헝가리 등과 접촉했다. 사회주의권 국가들이었지만 그나마 우리와 말이 통하는 국가들이었다. 북한의 집요한 방해공작이 있었지만 분위기는 좋았다. 게다가 다음해 개막예정인 88올림픽 영향도 컸다. 그래도 좀 건넬만한 넥타이 등 88서울올림픽 기념품이 수두룩했고, 우린 그 기념품을 썼다. 식사라도 대접하면서 말을 풀어가야 했지만 예산도 없는 마당에 식당에서 돈을 펑펑 쓸 수는 없었다. 내가 거처하는 관사로 그들을 모셨다. 그 시절 별 달리 표현을 못했지만 정말 아내가 많이 고생했다. 아내가 혼자서 손님 치를 음식을 모두 준비했고, 그때 부르튼 입술의 상처가 지금도 남아 있다. 손님들이 돌아가고 나면 설거지는 나와 아이들의 몫이었다.

 

 

이사국 출마신청 마감일이 되자 접수창구에 가 보니 아니나 다를까 북한도 왔다. 그런데 북한은 우리가 이사국 진출 신청서를 접수했는데도 서류를 내밀지 않았다. 자신이 없었는지 모르지만 그들은 그저 내가 내미는 서류를 그냥 지켜봤다. 하지만 난 이미 그들의 패색이 짙어가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총회가 개막하기 며칠 전이었다. FAO 북한대표부의 정운형 참사관이 날 불렀다. “커피나 한잔 하자”는 것이다. 난 “통일 되면 먹자고 했던 너희들이 왜 그러냐”고 짐짓 모르는체 했다. 그는 커피를 마시는 자리에서 단도직입적으로 나에게 말했다. “신 선생! 한번만 봐주그래. 우리 다 죽게 생겼어.” 그는 정색을 하며 나에게 고개를 떨궜다. 딱한 얼굴로 그를 쳐다 봤지만 나로선 이 말 밖에 할 수가 없었다. “개인적으로 그러고 싶지만 이건 국제사회에서 정정당당한 페어플레이 아닌가. 한민족이라면 도와주진 못할 망정 재나 뿌리지 말았으면 좋겠다.”

 

총회 투표로 갔다. 9개 이사국을 선출하는 자리에서 1차 투표를 통과한 나라는 말레이시아, 일본, 중국, 인도네시아 등의 나라였다. 출마한 후보 국가 중 한국은 91표로 꼴찌였다. 하지만 FAO의 선출방식 상 특정기준 표를 획득하지 못한 태국과 방글라데시, 한국은 다시 결선투표로 넘겨졌다. 총회장에서 정말 손과 발이 닳도록 뛰어다니고 사정했다. 그리고 결선투표가 끝나자 난 환호했다. 9개국 중 8개국이 확정되고 난 뒤 이제 이사국이 될 티켓은 고작 하나가 남았는데 그 티켓을 한국이 거머쥐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막판 뒤집기가 성공한 것이다. 열심히 뛴 결과이기도 하지만 지금 생각해봐도 88올림픽이란 명분과 타이밍은 적중한 것으로 보인다. 나로선 세상에 태어나 치러본 첫 선거운동 경험이다.

 

그 총회 기간중 에피소드도 있다. 그 때쯤 정부에서 은밀한 훈령이 내게로 왔다. 1992년 우리가 중국과 수교하지만 이미 그 시절부터 정부는 은밀히 중국과의 외교관계 수립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나에게 떨어진 정부의 특명은 한국으로서도 골치 아픈 벼멸구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중국과 우리나라 양국 농림부 장관이 논의할 자리를 만들어내라는 것이었다. 중국의 산동반도에서 날아오는 벼멸구 문제에 착안한 외교전략인 것이다. 말이 벼멸구 문제이지 이를 통해 양 국간 외교관계의 물꼬를 트겠다는 우리 정부의 속내가 있었다. 마(馬)씨 성을 가진 사람으로만 기억한다. FAO 총회기간 중 그곳을 방문한 중국 농업부의 대외협력과장을 비공식적으로 만났다. 사정을 이야기했지만 “양국 장관의 공식적 미팅은 어렵다”란 말만 들었다. 나름 친밀도를 구축해 놓은 FAO의 사우마 사무총장을 찾아갔다. 두 나라 장관의 만남을 주선해 달라고 부탁했다. 사우마 총장은 그런 나에게 “리셉션장에서 자연스레 조우하는 건 어떻냐”고 귀띔했다. 좋은 방안이라고 생각하고 총회에 참석한 황인성 농림부 장관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중국측에서도 이미 해강(海江) 농업부 장관이 총회 현장에 왔다. 리셉션장에서 두 장관이 인사를 나누고 다음 미팅을 약속하면 우리의 계획은 성사되는 것이다. 대사관 식구들과 난 계획대로 착착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북한이 그걸 눈치챈 것이다. 총회 리셉션장에서 일은 벌어졌다. 북한 대표부 대사가 기사까지 대동, 리셉션장으로 들어서면서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나에게 “한번 봐 달라”고 했던 정운형 참사관은 우리 황 장관 곁을 맴도는 것이었다. 더욱이 그는 중국 농업부 장관과 우리 황 장관이 서로 인사나 나누며 칵테일 잔이라도 댈라 치면 그 사이로 툭 막아섰다. 두 사람의 대화도중 끼어 들거나 아예 중국측 장관에게 붙들고 늘어지는 식이었다. 심각한 외교의전상 결례였다. 그들은 아랑곳없이 두 나라의 조우(遭遇)를 방해했다. 다된 밥에 재를 뿌리는 격이었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 보다 못해 내가 “야! 정운형” 그렇게 불러 세웠다. 영문도 모르고 나를 쳐다보는 그에게 주먹을 날렸다. 그의 어깨를 감싸 쥐고 리셉션장 벽으로 밀어 붙여 힘껏 주먹으로 그의 복부를 때렸다. 순간 “욱”하는 소리를 그는 내질렀지만 그로선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는 하얗게 얼굴이 질렸다. 아무 소리도 못하고 기가 꺾인 듯 그는 그 자리에서 물러섰다. 양국 장관의 우연한 만남은 예상대로 성사됐고, 이후 추가적인 협의의 길을 틀 수 있었다. 솔직히 지금 생각하면 내 경험으론 한 동포였지만 그 시절 북한이 너무 야속하기도 하고, 또 안타깝기도 했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들은 강자에게 약했고, 약자에겐 강했다. 비열한 것이다. 우리가 약하면 그들은 한없이 우리를 강하게 몰아붙일 것이고, 우리가 강하면 그들은 우리의 뜻에 맞추고자 애를 쓸 것이다. 현재의 남북관계가 그런 그들의 속성을 이해하고 있는지 나로선 의심스럽다.

 

 

그 시절 짚고 갈 얘기도 있다. 87년 2월2일로 기억한다. 대한민국 총리가 이태리를 방문했다. 4일간의 공식일정이었다. 그 시절 대한민국엔 정권을 뒤엎을 희대의 사건이 터졌다. 서울대생 박종철군이 서울 남영동의 대공분실로 끌려가 고문을 받다 숨진 것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총리는 그 시절 한가로웠다. 그의 안내를 도맡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대신 누르던 나는 그의 풍모를 의심했다. 이태리의 공산당 출신인 요티 국회부의장을 만나 “남북관계 개선에 힘 써 달라”는 정도 단 하룻 동안의 공식일정을 소화하고 난 그가 남은 3일간 한 일은 밀라노에서 외유성 관광을 즐긴 게 고작이다. 솔직히 한심했다. 난 그를 보며 내가 로마에서 열심히 뛰며 지키려고 한 대한민국의 국익이 이런 사람들에 의해 도륙되고 있다는 판단을 했다. 어이가 없었다.

 

그 때 난 생각했다. “대한민국은 썩었다. 이 정권은 오래 갈 수가 없다. 불길처럼 타오르는 민주화의 열망이 이제 도도한 대한민국 역사의 흐름으로 뒤바뀔 것이다.” 서울대생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이 나중 조작으로 밝혀졌고, 그해 6월엔 연세대에서 이한열군이 최루탄에 맞아 스러져 갔다. 정권의 운명은 이제 시간문제인 것으로 여겨졌다.

 

국민들은 그후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끌어냈다. 체육관에서 소수 선거인단이 모여 간접선거로 대통령을 선출하던 방식을 국민이 직접 투표로 뽑는 것으로 바꾼 것이다. 난 멀리 로마에서 아이들과 함께 조국 대한민국의 국민들을 향해 힘껏 응원의 박수를 보냈다. <18편으로 이어집니다>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
=1942년생. 오현고를 나와 육군사관학교 4년을 중퇴, 1967년 5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직자로 입문했다. 제주도 기획관, 주이탈리아 한국대사관 농무관, FAO(국제식량농업기구) 한국교체수석대표, 농림수산부 축산국장, 농업구조조정정책국장, 기획관리실장을 거쳐 YS정부 시절인 1993년 12월 제29대 제주도지사로 취임했다.

 

이어 첫 민선 지방선거인 95년 6·27선거에선 무소속으로 출마, 당선돼 31대 지사를 역임했다. 그러나 98년, 2002년 두 번의 제주지사 선거에선 연거푸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그후 축협중앙회장을 거쳐 친환경 농업회사법인인 (주)삼무와 전시판매장인 삼무힐랜드를 운영했지만 지사 재직시절 뇌물수수사건에 휘말려 2년여 수감된 뒤 풀려났다. 삼무힐랜드는 수감기간 중 문을 닫았다.

 

제주삼다수와 관광복권, 제주국제컨벤션센터, 제주세계섬문화축제 등이 그의 지사 재직시절 작품이다. 현재 제주생태도시연구소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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