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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현장-남기고 싶은 이야기]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12)

역사로 종결된 듯이 보여도 끝나지 않은 일이 있을 수 있다. 다 지난 과거의 일로 보이더라도 실상은 여전히 현실을 관통하는 큰 물줄기일 수도 있다. ‘제주의 물 문제’는 바로 그것이다.

 

 

1996년 한진그룹 고 조중훈 회장과의 만남 이후 상황이 급변했다. 그해 9월 말 조 회장과의 만남 직후 며칠 지나지 않아 제동흥산(현 한진그룹 계열 (주)한국공항의 전신) 측에선 공개적인 반응이 나왔다. 유상희 제동흥산 대표 등 임원이 공개기자회견을 통해 생수시판 의도가 전혀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제주도의회에도 출석, 그 내용을 공언하기도 했다.

 

제주지방개발공사의 생수공장은 1996년 11월26일 착공했다. 기공식이 있던 날 날씨는 매서웠다. 칼바람이 몰아쳤다. 하지만 현지주민을 포함해 1천여명의 하객의 몰려 ‘제주삼다수’의 앞날을 축하했다. 감개무량했다. 더욱이 공장이 세워지는 조천읍 교래리 산 70번지는 법정소송까지 갔던 한진그룹의 제동목장과 마주한 곳이다. 묘한 인연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개인적으론 입도선묘(入道先墓)가 있는 땅이기도 했다. 기공식 현장을 찾은 내 숙부는 “선조가 묻힌 땅에 대역사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조상의 은덕을 가슴 속에 깊이 새겨야 한다”고 나에게 말하며 기뻐했다. 기공식에는 마침 방한한 김창준 미국 연방하원의원도 참석, 축사까지 했다. 난 그에게 “말로만 축하하지 말고 앞으로 제품이 나오면 미주지역 제주생수 대리점을 맡아 달라”고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제주지방개발공사는 이 공장에서 나온 먹는샘물 제품의 시판시기를 1998년 2월로 잡았다. 한국능률협회와 ‘먹는샘물 판매·홍보전략 컨설팅’ 용역계약을 체결했고, 그 용역결과에 따라 판매제휴가 가능한 업체 선정에 나섰다. 마음 같아서는 제주도가 전국 곳곳에서 유통전면에 나서는 직판 시스템을 가동하고 싶었다. 하지만 여의치 못했다. 용역결과를 보면 공장 건립으로 220억원이 들어갔는데 직판 회사를 따로 설립하려면 또 160억원이 필요했다. 그 돈을 투자한다면 시장진입 여부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사업 초기부터 적자는 불 보듯이 뻔한 일이었다. 실제로 1998년 도지사 선거 때 우근민 후보는 이 용역결과만을 보고 삼다수 한 병을 팔아 17원씩 적자를 보고 있다고 허위사실을 주장하기도 했다. 삼다수의 시장진입이 우선 급한 일이었기에 직판 구상을 유보하고 대안을 찾아야 했다. 외부 기업과의 제휴로 활로를 찾기로 했다. 교섭대상 업체로는 한진, 롯데, 남양유업, 신동아, 대한통운, 세모, 농심 등의 이름이 거론됐다. 그 업체들을 대상으로 한 곳씩 의사타진을 해 봤다. 그러나 반응은 싸늘했다.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더 냉담했다. 대부분 기업들이 그런 입장이었는데 한 곳은 달랐다.

 

 

농심이었다. 제주도로선 솔직히 더 끌리는 기업이기도 했다. 자본이 탄탄한 안정된 기업이라는 것도 있지만 온 국민 모두가 사 먹는 라면을 전국 곳곳에 유통망으로 깔아 둔 기업이기에 우리로선 최적이라고 판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의 전국 유통망을 확인해 보니 무려 12만개의 점포가 그들의 거래선이었다. 아직 이름도 알리지 못한 ‘제주공기업 생산 먹는샘물’을 알리기에 농심보다 나을 곳은 없다고 판단했다.

 

직접 서울로 올라 가 농심그룹 본사를 찾아갔다. 신춘호 회장을 만나 그의 제의로 농심 본사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함께 하게 됐다. 그 자리에 이상윤 농심 부회장과 정종학 제주개발공사 이사가 배석했다. 나는 점심을 하면서 판매계약 내용에 관한 논의에 앞서 신춘호 회장에게 이렇게 물어봤다. “우리하고 손 잡으면 덤핑하고 있는 국내 생수시장에서 농심이 상당히 손해를 볼 텐데 우리와 계약하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그의 답은 이랬다. “그렇소. 기업을 해서 돈을 벌면 국민에게 좋은 일을 하고 싶어지는데 좋은 물을 국민에게 공급하는 것은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제주지하수는 수질면에서 최상입니다. 우리 농심에서도 프랑스 볼빅 제품을 수입해 팔아 봤는데, 제주생수는 볼빅 못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10년을 내다보고 장사할 것입니다. 앞으로 1년간 우리 농심은 제주개발공사와 계약한 조건대로 하면 40억원 이상 손해를 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린 1,2년 손해 보는 것 개의치 않습니다. 국내 경제상황이나 생수시장 규모로 볼 때 제주생수는 10년을 내다보고 해야 할 장사입니다. 최소한 계약기간을 10년은 해주어야 합니다.”

 

그랬다. 신 회장은 상당히 먼 미래까지 내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기업관과 장사안목에 믿음이 갔다. 그러나 언젠가 직판을 해야 할 제주생수를 농심에 10년 동안 맡겨둘 수는 없다고 판단하고 시장진입에 성공하는 경우 5년 후인 2002년 우리의 직판체제를 염두에 두었다. 그리고 계약기간 5년을 제시하고 성사시켰다. 그는 매우 서운한 표정이었다. 지금도 ‘제주삼다수’는 농심과 국내 유통계약을 체결하고 있고, 최근엔 계약연장 문제로 법적 송사까지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물론 그 시절 우린 그 쪽에서 내건 ‘10년 계약’을 ‘5년 계약’조건으로 바꿔놨다. 그 정도면 국내 시장에서 튼실히 이름을 알릴 것이고, 그리 되면 제주도 스스로 직판회사를 설립, 국내 시장에서 유통을 책임질 수도 있을 것이란 예상 때문이다. 그런 준비가 있었지만 최초 5년 계약이 경과되고 난 뒤 아무런 고려 없이 2002년 새로운 5년 계약을 체결하기에 이른다. 당초 농심 신 회장의 요청대로 10년 계약을 해줘버린 셈이다. 오늘 날 제주도·제주지방개발공사와 농심간 법적 다툼의 단초를 우리가 만든 셈이다. 재계약의 내용을 검토해 보면 지금의 법적 분쟁이 벌어지게 된 단초가 포착된다. 답답하다.

 

 

생수공장을 준공하고, 시험가동기간을 거쳐 첫 제품을 선적한 날이 1998년 2월24일이다. 비가 오는 데도 제주항에는 많은 하역업체 대표와 부도노조 노조원들이 자리를 지켰다. 한 노조원은 나에게 다가와 이렇게 말했다. “참 좋습니다. 감귤 끝날 때쯤 생수하역을 시작하게 되니 생수 때문에 항만하역 비수기가 없어질 것 같습니다.”

 

제품명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는 중요한 문제였다. 한라산수, 딥씨(DEEP-SEA) 등이 거론됐다. 그러나 최종명칭은 ‘제주삼다수’로 확정됐다. 개인적으로 ‘한라산수’도 마음에 들었지만 “한라산이라는 이름이 소비자들이 너무 많이 들어온 것인데다 보통명사화 됐다”는 의견이 강해 채택에서 밀려났다. ‘제주삼다수’는 그렇게 선적돼 1998년 3월2일 국내 시장에 등장했다.

 

목표는 98년 시장진입 1차 연도에 ‘페트(PET)병 시장 탑(Top) 3’에 진입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제주삼다수는 시장출하 3개월만에 페트시장에서 1위로 올라섰다. 외환위기에 따른 구제금융(IMF) 여파로 모든 소비가 위축되던 시기에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제주도의 이미지와 삼다수 제품의 우수성, 농심의 뛰어난 홍보전략과 유통시스템이 어우러져 ‘제주삼다수’ 돌풍을 일으킨 것으로 생각한다.

 

더욱이 개인적으론 ‘제주삼다수’와 같은 제주산 제품이 국내 광고시장에 등장하는 것을 보며 자부심도 느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서울의 잠실 야구경기장에서, 서울시내 지하철 안에서 제주산 제품광고는 아예 볼 수도 없었고, 상상하지도 않았던 시절이었다. 그저 먼 도회지 대기업과 중앙정부 부처나 할 수 있는 일로만 생각하던 때였다. 그렇지만 우린 꿈을 꾸었고 그게 차근차근 현실이 됐던 것이다.

 

이 시점에서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지금 제주도와 농심이 벌이고 있는 법적 분쟁을 보면 하나는 분명하다. 먼 미래를 본 농심의 투자는 옳았다는 것이고, 제주도의 이익을 관철시켜야 할 우리 제주도지방개발공사가 맺은 5년 단위 계약은 언제부턴가 꼬여 이를 개선하는데 진땀을 흘릴 수 밖에 없도록 흘러갔다는 점이다. 되짚어 보면 문제의 근원은 파악이 가능하다.

 

그보다 이 참에 한가지를 더 거론하고자 한다. 지사 재임시절 한진그룹과 ‘물전쟁’이라고 부를 정도의 분쟁을 거쳤다. 소송과정까지 가며 나는 도지사로서 제주도의 공익과 지하수의 보전을 위해, 한진그룹은 기업으로서 미래 예상수익의 확보를 위해 대립했다. 그로부터 15년여가 흘렀다. 한진그룹의 경우 고 조중훈 선대회장은 타계하셨고, 나 역시 ‘현직’ 도지사가 아니다. 하지만 제주도 땅에서 한진그룹이 물문제로 분쟁하고, 제주도를 힐난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기업으로서 국민들이 생수가 무엇인지도, 물을 돈 주고 사 먹을 줄도 몰랐던 시절인 1984년 생수사업 착상이라는 기가 막힌 기업전략의 깊은 뜻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지금은 시대도, 환경도, 역할도 달라졌다. 이제 물이 아니라 한진그룹과 제주도가 공동의 이익을 향유할 수 있는 기회를 상호모색하고 상생함으로써 지나간 일을 잊어 버리고 제주의 미래를 위한 지방정부와 기업의 새로운 연대를 실현하는 모습을 기대하고 싶다. 제주도와 한진그룹은 서로 힐난하고 분쟁할 것이 아니라 손을 맞잡고 원대한 미래를 향해 새출발해야 할 파트너다. 농심이 ‘제주삼다수’의 국내 유통판권에 대해 소송으로 맞설 정도라면 그 이상의 충분한 이익이 있다는 걸 암시한다. 전 세계 항공노선을 운항하는 대한항공의 날개를 갖춘 한진그룹이 ‘제주삼다수’의 든든한 해외유통·수출 파트너가 돼 준다면 나로선 한없는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과거의 앙금보다 협력을 통한 미래의 결실에 더 관심을 기울였으면 하는 게 제주도와 한진에 거는 기대다.

 

 

더불어 한마디만 더 짚고 넘어가려 한다.

 

지난 회 연재에서 십 수년여 가슴 속에 담아두었던 일을 거론했다. 많은 찬사도 받았지만 일부 오해의 소리도 들었다. 오해는 특정 정파적 시각이 주류였다. 2014년 지방선거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는 의심의 의견도 있고, 오랜 시간 제주에서 벌어졌던 특정세력간의 갈등을 반영한 의견도 들었다. 솔직히 말한다. 참으로 한심하다. 대선후보 누구의 말처럼 “진영 논리에 빠져서 정파적 이익에 급급해” 도무지 제주도와 도민의 공동이익이 보이지 않는 그들의 ’갇힌 논리‘가 안타깝다. 그런 논리에 휘둘려 무지의 장막속에 갇힐 지도 모르는 우리 도민들을 생각할 때 마음이 무척 아프다. 누군가가 말한 대로 “말해야 할 때 말하지 않는 것은 도망가는 것이요. 행동해야 할 때 행동하지 않는 것은 도망가는 것이다”라는 생각 뿐이다.

 

달을 보라는 데 굳이 손가락만 보시겠다는 분들에게 사실을 제대로 알릴 방법은 없다고 하지만 나는 그분들도 진실을 무턱대고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누구도 무한갈등과 분열을 바라지는 않기 때문이다. 모두가 상식을 바탕으로 통합과 비전을 추구하는데 예외가 되기를 원하지는 않으리라 본다.<13편으로 이어집니다>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
=1942년생. 오현고를 나와 육군사관학교 4년을 중퇴, 1967년 5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직자로 입문했다. 제주도 기획관, 주이탈리아 한국대사관 농무관, FAO(국제식량농업기구) 한국교체수석대표, 농림수산부 축산국장, 농업구조조정정책국장, 기획관리실장을 거쳐 YS정부 시절인 1993년 12월 제29대 제주도지사로 취임했다.

 

이어 첫 민선 지방선거인 95년 6·27선거에선 무소속으로 출마, 당선돼 31대 지사를 역임했다. 그러나 98년, 2002년 두 번의 제주지사 선거에선 연거푸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그후 축협중앙회장을 거쳐 친환경 농업회사법인인 (주)삼무와 전시판매장인 삼무힐랜드를 운영했지만 지사 재직시절 뇌물수수사건에 휘말려 2년여 수감된 뒤 풀려났다. 삼무힐랜드는 수감기간 중 문을 닫았다.

 

제주삼다수와 관광복권, 제주국제컨벤션센터, 제주세계섬문화축제 등이 그의 지사 재직시절 작품이다. 현재 제주생태도시연구소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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