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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달한...조선조 제주 최고의 충효인

효자 홍달한(洪達漢:1666-1749)

 

심재의 [탐라인물고]는 제주사에 있어 각 방면의 중요한 역사적 인물들을 다루고 있다. 여기에 효자로는 영조 때 정려(旌閭)된 홍달한(洪達漢:1666-1749)이 처음 등장한다.

‘홍달한은 본관이 남양(南陽)이며, 정의 고성촌(현 성산읍 고성리)에 살았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봉양하는데 효성이 지극했다.

 

어머니가 병이 나자 일찍이 변을 맛보며 증상을 진단하였고, 손가락의 피로 효험을 얻었다. 모친상을 당하니 3년상을 마치고 나서는 부친을 추모하여 3년 상을 지냈다[爲父追服:아버지가 어렸을 때 돌아가 삼년복을 입지 못하였기 때문에 상기가 지났지만 추모하여 복을 입었다는 뜻]. 숙종이 승하하니 초하루와 보름에 단을 설치하고 북쪽을 향하여 향을 피워 돌아가신 부모처럼 통곡하니 많은 사람들이 감화되었다. 이 일이 알려져 충효(忠孝)라고 정려(旌閭)하였다.’

 

기록상 조선시대 효자로 정려된 이는 구좌읍 김녕리의 김칭(金秤)이 성종 18년(1487)에 정려된 것이 최초다. 그런데 심재는 김칭에 대한 언급은 생략하고 효자로서 영조 20년(1744)에 정려된 홍달한을 먼저 거론하고 있다. 효와 더불어 충을 행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리라.

 

 

서귀포시 성산읍 수산 1리, 수산초등학교 후문에서 동북쪽 300m 지점 구한길 도로변에 그의 정려가 자리하고 있는데, ‘충효인(忠孝人)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제주향교도훈장(濟州鄕校都訓長) 유향좌수(留鄕座首) 홍공지려(洪公之閭)’라는 긴 직함이 정려의 전면에 새겨져 있다.

 

심재의 글에서처럼 홍효자는 고성리에서 태어나 성품이 소박하고 충성스런 마음과 효행이 뛰어나 많은 일화를 남겼다고 전한다. 그중 “숙종대왕이 승하하였을 때 스스로 백랍(白蠟)을 채취하여 초를 만들어 바쳤으나 나라에서 받아주지 않았다. 그러자 홍효자는 다랑쉬오름에 올라가 단을 쌓고 그 초에 불을 밝혀 북쪽을 바라보며 통곡하였다”는 일화는 아직까지도 이 동네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정도로 유명하다. 이러한 사실은 결국 당시 목사였던 김윤(金潤)을 통해서 조정에 알려졌고 드러난 충성스러운 행적이 없었지만 돈독한 마음 때문에 홍달한은 충효로 정려되어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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