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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처량...제주향교 교수로 흥학의 기틀을 세워

고처량(高處亮:1688~1762)

 

세인들은 성안 동쪽 가락천변 언덕 위(현 제주기상청 남쪽)에 있던 삼천서당(三泉書堂)을 언급할 때면 으레 화북포의 축항공사를 진두지휘하며 스스로 등짐을 지어 날랐던 일화로 유명한 김정(1670~1737) 목사만을 기억한다.

 

‘김정 목사가 삼천재(三泉齋)를 세웠다.’

 

물론 그렇다. 김정이 남긴 시와 글, 삼천서당 주변 곳곳에 새겼던 마애명 등에서 삼천서당에 대한 그의 애정을 역력히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역사는 제주의 역사가 아니다. 제주인의 손길과 숨결을 느낄 수 없다. 그 이면, 김정의 삼천서당 창건과 관련한 제주의 이야기, 그 역사와 관련된 제주의 인물이 어딘가에 숨어있을 것이다. 이원진 『탐라지』의 숨은 주인공 고홍진처럼.

제주 사학의 명문이었던 삼천서당과 관련된 제주의 인물, 그 단서를 다음 심재의 「탐라인물고」의 짤막한 기사에서 찾을 수 있다.

 

‘고처량(高處亮:1688~1762)은 자가 명숙(明叔)이며 숙종 무진년(1688)에 태어났다. 병신년(1716)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이조좌랑에 이르렀고, 구례(求禮)와 진해(鎭海)의 관장(현감)을 역임했다. 일찍이 고을 학교의 교육을 맡아 靑衿生(士族으로써 향교에서 과거공부를 하는 사람. 서얼이나 평민의 자제 중에서 향교에 入校한 校生과 구별하여 부르는 말)을 둘 것을 의론하고, 또 목사 김정과 더불어 삼천재(三泉齋)를 세워 후진을 권장했다. 나이 75세에 죽었다.’

과거 제주에는 조선의 건국과 동시에 제주향교가 생기고, 1416년(태종 16) 제주가 제주 정의 대정의 3읍 체제로 정비되어 정의향교와 대정향교가 생기게 되면서 조선건국의 이념인 유학이 제주 전역에 뿌리를 내리게 된다. 하지만 향교 출입은 신분에 제한이 있었고 각 향교마다 정원이 있어 누구나 쉽게 교육의 기회를 얻을 수 없었다. 또한 1660년(현종 1) 김진용의 건의로 고득종의 옛 집터에 장수당(藏修堂)이 설립되었지만 여전히 배움의 기회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에 제주향교의 교수 고처량이 1736년(영조 12)에 당시 제주목사 김정에게 건의하여 삼천서당을 세워 제주흥학의 기틀을 새롭게 다졌으니, 삼천서당은 후에 장한철(張漢喆) 오점(吳霑) 신상흠(愼尙欽) 오태직(吳泰稷) 안영수(安永綏) 김량수(金亮洙) 이한진(李漢震) 등 굵직굵직한 인사들을 배출하는 사학의 명문으로 자리 잡게 된다.

 

삼천서당이 세워진 해는 고처량이 제주향교 교수(敎授)로 있으면서 청금록(靑衿錄)을 처음으로 성안(成案)한 해이기도 하다. 향교의 교수가 목사로 하여금 서당을 짓도록 하였다는 것은, 고처량이 턱없이 부족한 제주의 교육시설의 여건에 대해 당시 선비들의 입장을 대변하여 서당을 세워줄 것을 요구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에 김정은 흔쾌히 이를 수락하여 삼천서당을 짓고 서당을 운영할 수 있는 재원을 마련해 주었던 것이다.

 

한편, 삼천서당이라는 이름은 경내에 산저천(山底泉)ㆍ급고천(汲古泉)ㆍ감액천(甘液泉) 등 세 샘이 있음으로 해서 목사 김정이 지은 것으로, 당시 재생(齋生)의 품료를 설치하여 평민 가운데 뛰어난 자를 택하여 가르치고 따로 존현당(尊賢堂)을 세워서 숙사(塾師)의 처소로 삼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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