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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지천 피해 없길 바라는 선인 간절한 마음 ... 개발로 문화재 훼손·실종 안타까워

 

바야흐로 태풍의 계절이다.

 

7∼10월에 집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태풍 탓에 우리나라에선 인명·재산피해가 해마다 반복되고 있다.

 

과학기술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피해가 막심한 상황인데 과거에는 어떠했을까.

 

태풍의 길목 제주는 오래전부터 제주성(濟州城)을 흐르는 산지천의 잦은 범람으로 인해 큰 곤욕을 치렀다.

 

◇ 조천석 실종 사건

 

1997∼1998년 제주의 젖줄 '산지천'을 시궁창으로 만들었던 복개 구조물이 철거됐다.

 

도심을 가로질러 흐르는 하천인 산지천을 덮었던 구조물 위에 3∼4층짜리 건물이 들어서면서 30년 가까이 이곳에서 배출된 각종 오물이 하천을 오염시켰기 때문이다.

 

당시 철거 과정에서 복개 구조물 아래 잠들어 있던 커다란 바위가 모습을 드러냈다.

 

바위의 이름은 '경천암'(擎天巖).

 

하늘을 떠받쳐 재앙을 막는 바위라는 뜻으로, 경천암은 기원후 1∼3세기 탐라국 형성 초기를 전후한 시기부터 선인들이 매우 신성시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경천암 윗부분이 인위적으로 훼손돼 있었다.

 

 

바위 위에 세워져 있던 '조천석'(朝天石)이 잘려져 나간 것이다.

 

조천석은 제주에 홍수를 막아달라는 기원을 담아 조선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졌다.

 

어찌된 일일까.

 

전 제주도문화재위원인 김찬흡 선생이 과거 언론에 기고한 글 '朝天石의 문화적 의미'와 제주대 박물관 기록, 마을 역사문화지 등을 통해 그간의 사정을 엿볼 수 있다.

 

복개 구조물 철거 공사가 있기 20년 전인 1979년 7월 고(故) 현용준 제주대 교수가 제주대 박물관장을 역임할 당시 제주시 남문로터리의 한 골동품점에서 우연히 '조천석'을 발견했다.

 

산지천이 구조물로 덮이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분명히 원래 자리인 경천암 위에 세워져 있던 조천석이었다.

 

깜짝 놀란 현 교수가 골동품점 주인에게 연유를 묻자 인근 칠성로의 한 민가에 있던 것을 당시 돈으로 1000원에 사들였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단순 비교는 어렵지만 1979년 당시 라면값이 60원, 오늘날 800원가량 한다고 치면 단돈 1만3300원으로 터무니없는 헐값이었다.

 

 

현 교수는 부랴부랴 500원을 더 얹어 1500원을 주고 조천석을 구매해 학교 박물관에 전시토록 했다.

 

하마터면 문화재가 다른 곳으로 팔려나갈 뻔한 위기의 순간이었다.

 

조천석이 누구에 의해 잘려져 개인 간 거래까지 이어졌는지 더 알려지진 않았다.

 

추정해본다면 산지천에 복개 구조물을 덮는 과정에서 바위 위로 튀어나온 조천석이 걸려 잘라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개발 과정에서 문화재가 속절없이 훼손된 대표적인 사례다.

 

산지천 상류에 바닷물이 밀려 들어오는 그 경계를 표시한 것으로 보이는 '퇴조석'(退潮石)의 경우 현재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과거 산지천은 만조 때 밀물이 오현단 인근 '남수각' 바로 아래 퇴조석까지 밀려 들어왔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안타깝게도 그 경계를 표시한 퇴조석의 모습을 후손들이 볼 기회가 없어진 것이다.

 

 

◇ 생명의 젖줄이자 공포의 대상 '산지천'
    산지천 광제교 밑 경천암 바위 위에 세워진 조천석.

 

길이 90㎝, 너비 31㎝ 크기의 현무암 석상 앞면에는 '朝天石'(조천석)이라는 글씨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조천'이라는 말은 '하늘을 우러러 뵙는다'는 의미로, 산지천의 잦은 범람을 막고 마을의 안녕과 액운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세워졌다.

 

석상 뒷면에 '경자춘'(庚子春, 경자년 봄)에 건립됐다고 새겨져 있는데, 1780년(정조 4년)이다.

 

제주에 부임한 김영수 목사가 물난리를 막기 위해 산지천 물줄기 서쪽 변을 따라 간성(間城, 성곽 사이에 쌓은 성)을 축조할 당시 세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경천암은 조천석보다 훨씬 이전부터 산지천에 존재했던 바위로 표면에 '경천암'(擎天巖), '지주암'(砥柱岩)이라 새겨져 있다.

 

 '경천'이라는 말도 '하늘을 받쳐 하늘에서 쏟아지는 재앙을 막는다'는 뜻이 있다.

 

 

누가 경천암이라 이름을 붙였는지는 문헌으로 나와 있지 않다.

 

숙종때인 1689년 제주에 유배된 송시열이 산지천 인근에서 생활했는데, 아침에 일어나면 맨 먼저 이 경천암을 찾아 하늘에 인사를 드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불려온 이름인 것으로 보인다.

 

지주암이란 이름은 1736년(영조 12년) 제주 목사로 부임한 김정이 붙인 것으로 알려졌다.

 

'지주'란 황하강 가운데 있는 산으로, 어떤 홍수가 나더라도 움직이지 않는다는 고사에서 따온 것이다.

 

경천암, 지주암, 조천석 등 모두 산지천의 범람을 막아 인명이나 재산피해가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는 옛 선인들의 간절한 마음을 담고 있다.

 

경천암은 현재 산지천에 그대로 남아있다.

 

조천석은 제주대 박물관에 소장돼 있으며, 지금 경천암 위에 있는 것은 복원품이다.

 

제주의 역사와 함께 흐른 산지천은 옛사람들에게 식수를 제공한 소중한 존재지만, 공포의 대상이기도 했다.

 

 

태풍이 불어닥치거나 큰비가 쏟아질 때면 제주성 안의 사람과 가축, 곡식, 집 등 모든 것을 쓸어가 버렸기 때문이다.

 

과거 극심했던 수해 기록을 보면 1713년(숙종 39년) 태풍이 연거푸 두 차례 내습하고 큰 해일까지 겹치면서 피해가 심각했다.

 

숙종실록은 당시 '제주·대정·정의에 큰바람이 불고 비가 와서 바다와 산을 뒤흔들어 나무가 부러지고 집이 무너졌는데, 무너진 인가가 2000여 호나 되도록 많고 사람이 또한 많이 압사하고, 우마 400여 필이 죽었다'고 기록돼 있다.

 

일제시대인 1927년 8월 대홍수는 산지천의 물길조차 바꿔버렸다.

 

대홍수는 아치형의 돌다리인 홍예교(虹霓橋) 등을 쓸어버리고, 산지천 하류 곡선을 이루던 물줄기를 직선인 정북 방향으로 뚫어버렸다.

 

오늘날에도 하천 범람으로 인한 피해는 이어지고 있다.

 

역대 제주에 가장 큰 피해를 남긴 2007년 태풍 '나리'(NARI) 당시 물난리로 13명이 목숨을 잃고 1000억원대의 재산피해가 났다.

 

2∼3시간 사이에 한라산 정상부터 제주시 해안 저지대까지 시간당 100㎜ 안팎의 '물폭탄'이 퍼부으며 제주시가지를 지나는 산지천, 병문천, 한천, 독사천 등 모든 하천이 범람했다.

 

 

[※ 이 기사는 '제주거욱대'(강정효 저), '일도1동 역사문화지'(제주특별자치도), '제주문화 제6호_산지천의 문화'(홍순만), '학교가 펴낸 우리고장 이야기'(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등 책자를 참고해 조천석과 경천암을 소개한 것입니다. [연합뉴스=변지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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