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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 ... 중국역사에서 보는 중국인의 처세술(74)

상사에게 신임을 얻고 등용될 생각이 있다면 의심을 피해야 한다. 특히 본인의 능력과 영향력이 이미 상사를 뛰어넘었을 때에는 이 점이 가장 중요하다.

 

중국 역사상 억울하기로 가장 유명한 사건 중의 하나인 송(宋)나라 악비(岳飛)의 비극은 우리에게 비통한 교훈을 주고 있다.

 

악비는 천성적으로 배움을 즐겼다. 나중에 대장군이 됐어도 여전히 학문을 닦았고 조예가 깊었다. 『만강홍(萬江紅)』과 같은 작품은 천고에 전송되는 명편이다. 그러나 학문에 조예가 깊다고 좋은 것만은 아니다. 악비가 학문을 좋아하고 조예가 깊은 것 때문에 송 고종(高宗)은 의심하고 질투하였다.

 

그것도 완전히 고종이 마음이 좁은 때문만은 아니다. 조송왕조의 조상 유훈도 그렇게 되게 만들었다.

 

송나라 때에는 당나라 때 군벌할거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고 문무 분리 방법으로 밑의 세력을 제거하였다. 문신은 지식이 있으나 사병을 거느릴 수 없었고 무신은 전투에 능하나 지식이 없었다. 문신으로 백성을 다스리고 무신은 군대를 거느렸다. 문신이 무신을 관할, 통제하고 무신은 문신에게 협조하였다. 협업할 뿐 아니라 알맞게 써야 했다. 서로 견제하면서 문무 대신 모두 감히 반란을 일으킬 수 없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상황인지라 송나라의 무장들은 일반적으로 글을 몰랐다. 지식이 없으면 없을수록 조정의 신임을 받았다. 태조(조광윤趙匡胤, 927~976, 960~976년 재위) 때의 당진(黨進)과 같은 인물은 목불식정이었다. 말이나 거동도 우악스럽고 거칠기 그지없었다. 그럼에도 태조는 그를 관대하게 대했고 중용하였다. 이유는 무엇일까? 학문적 지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악비와 같은 무장이 문신처럼 지적었기에 문무 분리 방법이 효과를 잃게 된 것은 아닐까? 이처럼 문무를 다 갖춘 무장은 정권에 위협될 게 분명하다.

 

왕부지2는 악비가 사대부와 닮았기 때문에 죽임을 당하였다고 보았다. 이치에 맞지 않다고는 할 수 없다. 

 

이외에도 악비는 군심(軍心)을 넓게 얻고 있었다. 위로하고 포상할 때마다 악비는 자기 부하에게 공평하게 분배하고 개인 소유로 삼지 않았다. 악비는 군대를 관리하고 훈련하는 데에는 대단히 엄격했지만 일반 장병의 생활에 관심가지면서 몸소 병사에게 약제를 조제해 주기도 했다. 부하 장병이 원정할 때마다 악비는 자기 부인을 장병의 집까지 보내어 위문하였다. 부하 중에 전사자가 생기면 악비는 슬퍼하며 울음을 보이기도 하고 희생자 유족을 부양하기도 했다. 자기 자녀를 희생자의 자녀와 결혼시키기 까지 했다.

 

그런 까닭에 악비와 부하들은 한 집안 사람처럼 지냈다. 그가 거느리는 부대도 ‘악가군(岳家軍)’이라 불렀다. 전투가 시작되면 모든 사람이 한 마음 되어 공을 다투거나 자기 목숨만 보전하려 하지 않았다.

 

금(金)나라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한다.

 

“산을 뒤흔들기는 쉬워도 악가군을 뒤흔드는 건 어렵구나.”

 

그런데 ‘악가군’이라는 명칭을 송 고종은 듣기를 원했을까? 악비가 군심을 얻으면 얻을수록 송 고종의 의심은 커져갔다. 군대를 거느리는 장수의 성으로 명명한다면 장수 개인의 군대가 되는 것 아닌가? 그런 장수는 아무 때나 부하들에게 옹립될 수 있는 것이 아니던가?

 

최고 통치자인 송 고종이 그렇게 생각했다면 악비가 어떻게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겠는가?

 

이뿐 아니다. 악비는 송 고종을 좌불안석케 만드는 말을 하였다.

 

“황룡(적의 요충지)을 곧바로 공격해 2성(聖)〔정강지치3때 금나라에 잡혀간 휘종(徽宗)과 흠종(欽宗)〕을 영접해 돌아오겠다.”

 

적의 요충지로 곧바로 쳐들어가는 것은 됐다고 치자. 그런데 두 명의 황제를 데리고 오면 고종이란 황제는 어찌 하라는 말인가? 악비는 생각하지 못했다. 두 명의 황제를 영접해 오는 것은 조(趙) 씨 왕조의 집안일이었다. 악비는 관여해서도 안 됐고 말을 꺼내서도 안 됐다. 

 

이것으로 끝냈으면 그래도 괜찮았을지 모른다. 악비는 전쟁하면서 황위 계승자 문제에 관심을 두었다. 고종에게 빠른 시일 내에 태자를 옹립하라고 강권하였다. 또 한 번 고종의 약점을 찔렀다. 고종은 남송(南宋, 1127~1279)을 건립했기에 자신의 지위에 대한 합법성에 위협을 받고 있었다. 대신들을 걱정하고 의심을 품고 있었다. 자기 집안일에 끊임없이 간섭하는 악비를 더더욱 용납할 수 없었다. 

 

악비의 희생은 악비의 비극이요, 봉건시대에 곧고 바른 삶을 살았던 군자의 비애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심도 있게 고찰해야할 점이 있다. 어떻게 하면 학비와 같은 비극을 피할 수 있는가?

 

상급자 중에서 자기보다 능력 있는 하급자를 만났을 때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존재한다. 그저 부하는 영원히 자기보다 뒤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인물이 사람을

 

기용하는 기본원칙은 ‘무대랑개점’4의 성취감이다. 항상 ‘구웅(狗熊)’을 쓰지 영웅을 쓰지 않는다. 용재(庸才)를 쓰지 인재(人才)는 쓰지 않는다. 자기보다 능력이 없는 부하를 발탁할 뿐이다. 그러다 일단 부하의 능력이 자신보다 월등하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에는 곧바로 좌불안석이 된다. 심지어 부하에게 압력을 가하기도 한다.

 

어떤가? 당신의 능력이 상사보다 월등하게 뛰어날 때 자신의 예기(銳氣)와 재주를 모두 드러내 보이지 않는 것은? 상사에게 의심을 사지 않도록 말이다.

 

「만강홍(滿江紅)·노발충관(怒髮衝冠)」 : 

 

노기충천할 제 난간에 기대서니 비바람만 소슬하구나. 눈을 쳐들고 멀리 바라보며 하늘 우러러 길게 포효하나니, 장사의 가슴에 피가 끓누나. 삼십 년 공명이 티끌 같은데 전선 팔천 리 길 구름과 달빛만 스칠 뿐이라. 등한시 하지 말라, 소년의 머리 백발이 되면 슬픔만 남으리. 정강의 피맺힌 치욕이여, 아직도 설욕하지 못했나니. 신하된 자의 애끓는 한은 언제면 없어지려나. 하란산의 허점을 돌파해 보리라. 굳센 이 맘, 주리면 오랑캐 살을 씹고 담소하다 목마르면 오랑캐 피를 마시리. 진두에 서서 빼앗긴 산하를 모두 수복하고 나면 천자에게 돌아가 조회하리라.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1) 조송(趙宋), 송(宋) 왕조(960~1279), 중국역사상 오대십국(五代十國)과 원(元)왕조를 이은 왕조, 북송(北宋)과 남송(南宋)으로 나뉜다. 18대 제왕이 319년을 누렸다.

 

2) 왕부지(王夫之, 1619~1692), 자는 이농(而農), 호는 강재(姜齋), 석당(夕堂), 호광(湖廣) 형주부(衡州府) 형양현(衡陽縣, 현 호남 형양) 사람이다. 고염무(顧炎武), 황종희(黄宗羲)와 더불어 명말청초 3대 사상가로 불린다. 저서로는 『주역외전(周易外傳)』, 『황서(黃書)』, 『상서인의(尙書引義)』, 『영력실록(永曆實錄)』, 『춘추세론(春秋世論)』, 『악몽(噩梦)』, 『독통감론(讀通鑑論)』, 『송론(宋論)』 등이 있다.

 

3) 정강지변(靖康之變)은 정강(靖康) 2년(1127) 금(金) 왕조가 남하하여 북송(北宋)의 수도 동경(東京)을 점령하여서 휘(徽), 흠(欽) 두 황제를 포로로 잡아간, 북송의 멸망을 초래한 역사적 사건이다. 정강의 란(靖康之亂), 정강의 난(靖康之難), 정강의 화(靖康之祸)라고하기도 한다.

 

북송(北宋) 선화(宣和) 7년(1125)에 금나라 군대는 동, 서 두 갈래로 남하하여 송나라를 공격하였다. 동로는 완안간리부(完顔干離不)가 군대를 이끌고 연경(燕京)을 공격하였다. 서로(西路)는 완안종한(完安宗翰, 1080~1137, 점한粘罕)이 군대를 지휘하고 직접 태원(太原)을 공격하였다. 동로의 금군이 연경(燕京)을 깨뜨리고 황하(黄河)를 넘어 변경(汴京, 현 하남 개봉開封)을 공격하였다. 휘종은 형세가 위급함을 보고 태자 조환(趙桓)에게 선위하는데 바로 흠종이다.

 

정강 원년(1126) 정월, 완안종한이 금군 동로군을 거느리고 변경성 아래에 도착하였다. 송나라에 화의하면 철군하겠다고 하면서 500만 량의 황금과 5000량 은폐와 중산(中山), 하간(河間), 태원(太原)을 할양하도록 요구하였다.

 

같은 해 8월, 금나라 군대는 두 갈래로 송을 공격하였다. 윤11월, 금나라의 양로군은 변경을 함락시켰다. 흠종은 화의를 청하러 금나라 군영에 친히 나아갔다가 구금되었다. 휘종, 흠종 황제 이외에 많은 조 씨 황족, 후궁 비빈과 귀경, 대신 등 3000여 명이 금나라로 끌려갔다. 정강지변은 북송의 멸망을 초래하였다.

 

4) ‘무대랑개점(武大郎開店)’은 자기보다 현명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시기 질투하여 자기보다 수준 높은 사람은 쓰지 않는다는 의미다. 자기보다 수준이 높은 사람이 자기 밥그릇을 채갈까 걱정한다는 말이다. 마음이 좁아 옹졸한 사람을 풍자한다. 노력하여 자기 능력을 높이려 하지 않으면서 옆에 있는 사람을 한꺼번에 질투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헐후어(歇后語)로 전체는 ‘武大郎开店-高我者不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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