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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뉴얼 사회’ 허와 실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3)
김상회 정치학 박사  |  sahngwhekim535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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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1.06.11  16:5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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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카데미상’이라는 것은 ‘딴 세상’ 일처럼 그저 그런가 보다 했다. 그런데 ‘기생충’과 ‘미나리’가 연거푸 아카데미상을 받는 걸 보니 이제는 제법 ‘이 세상’ 일처럼 여겨진다. 아울러 아카데미상을 받았다는 외국영화의 수준과 배우들의 연기를 우리네의 그것들과 비교평가해 보기도 한다. 다른 것은 잘 모르겠지만 잭 니콜슨의 연기만은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의 무게를 되레 가볍게 느껴지게 만든다. 

   
▲ 루틴을 중시하는 이들은 변화의 이유를 궁금해하고, 질문을 통해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지독하리만치 인간 자체를 혐오하고 강박증에 사로잡혀 있으며 괴팍스럽기 짝이 없는 유달이 로맨스 소설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설정이 자못 흥미롭다. 이토록 인간을 혐오하고 사람들과 소통이 절벽인 인물이 독자들과 공감하고 소통해야 하는 소설 작가라는 사실도 의문이지만, 그것도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설정이 다소 황당하게 느껴진다.

유달은 매일 아침 정확히 똑같은 시각에 일어나 똑같은 동네 식당에서 반드시 똑같은 테이블에 앉아 아침식사를 한다. 식사 주문을 하고 서빙을 하는 웨이트리스는 반드시 똑같은 사람(캐롤)이어야만 한다. 포크와 나이프도 집에서 쓰던 것으로 싸 온다. ‘루틴’에 대한 강박증이다. 한가지 루틴이라도 어긋나면 ‘멘붕’이 오고 차라리 식사를 포기한다. 참으로 ‘진상’ 손님이다. 이런 인물이 과연 다양한 경험과 자유로운 상상력을 요구받는 소설가, 그것도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일까.

그러나 실제로 유달 못지않게 ‘루틴’에 집착하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있으니 흥미로운 일이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인 무라카미 하루키 역시 유달을 찜쪄먹을 만한 강박증을 지닌 작가로 유명하다. 하루키는 매일 정확히 새벽 4시에 기상해 정확히 12시까지 글을 쓰고, 반드시 정해진 시간에 음악을 듣고, 정해진 시간에만 책을 읽고, 정확히 밤 10시에 잠자리에 드는 루틴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이런 인물은 또 있다. 루틴 강박증으로 역사상 최고봉인 독일 철학자 칸트다. 독일의 영토였던 쾨니히스베르크(현 러시아)에서 태어나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만 생활한 칸트는 매일 어김없이 같은 시간에 같은 코스를 산책했다. 시계라는 것이 일부 부자나 귀족의 전유물이었던 당시, 마을 사람들은 칸트의 산책하는 모습으로 시간을 가늠할 수 있었다고 한다. 칸트의 루틴 강박증은 마을 사람들에겐 믿을 만한 시계 역할을 했던 모양이다.

   
▲ 루틴 강박증은 변화를 쉽게 느끼게 만을지만 단정도 있다. [사진=더스쿠프 포토]

흔히 루틴 강박증은 변화를 두려워하는 심리에서 나온다고 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정해진 루틴을 철저히 지킬수록 변화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다. 다른 모든 조건을 똑같이 유지하면 ‘변화’가 쉽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도 루틴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빨리 알아차릴 수 있다. 

어쩌면 이는 쉬운 이치다. 생활이 자주 바뀌면 자기 몸이나 생각의 작은 변화를 인식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고, 마주치는 타인이나 환경과 자연의 변화도 느끼지 못할 때가 많다.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행위를 해야 작은 변화도 눈치채기 쉽다는 거다. 아무 때나 아무 길이나 다니는 사람들이 경험할 수 없는 특별한 경험들이다. 

그래서 루틴을 중시하는 이들은 그 변화의 이유를 궁금해하고, 그 질문을 통해 수많은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변화를 억제함으로써 오히려 변화를 예민하게 느낄 수 있어서다. 그리고 그 미묘한 변화를 감지함으로써 수많은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도 한다. 유달이나 하루키 같은 소설가들에게 필요한 덕목이겠다. 보통 사람들은 ‘문제’로 생각하지도 않는 문제를 문제로 제기하는 것이 본업이라 할 수 있는 칸트와 같은 철학자에게도 ‘루틴 지키기’는 썩 유용한 생활방식이다.

   
▲ 무라카미 하루키는 영화 속 유달처럼 루틴에 집착했다. [사진=뉴시스]

세계적인 코로나 팬데믹(사회적 대유행) 속에서 세계 3대 경제대국이자 수많은 노벨과학상 수상자를 배출한 과학선진국이며 철저한 ‘안전사회’로 알려진 일본이 보여주는 부실한 코로나 대응과 저조한 성적표에 세간의 관심이 쏠린다. 코로나 대응 실패의 원인으로 일본 특유의 ‘매뉴얼’대로 움직이는 사회 시스템이 도마에 오르는 모양이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정해진 매뉴얼대로 움직이는 일본의 습성은 유달이나 하루키와 같은 루틴 강박증과 닮았다. 

변화를 더 쉽게 느끼고, 혁신에 발 빠르게 다가갈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코로나 사태 하나만 보고 절차와 루틴을 강조하는 ‘매뉴얼 사회’ 자체를 매도하는 건 온당치 못하다. 다만 하루키가 밤 10시에 집에 불이 났는데도 반드시 10시 취침을 고집한다거나, 칸트가 매일 다니는 산책길이 홍수에 끊겼는데도 그 코스를 고집한다면 그게 문제일 뿐이다.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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