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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 ... 중국역사에서 보는 중국인의 처세술(17)

다른 환경에 따라 정세도 달라진다. 사람의 행동도 그것에 따라 달라져야한다. 판이하게 달라져야 할 경우도 있다. 그렇다고 때에 따라 장소에 따라 미혹되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특정한 환경에 따라 자신의 언동을 택하라는 말이다. 개인의 품성을 판정할 수 있기에 그렇다.

 

인상여(藺相如)는 일찍이 환관의 우두머리 무현(繆賢) 문하의 식객으로 있었다. 무현이 한번은 사고가 생겨 인상여를 찾아가 상의하였다. 사건의 전후는 이렇다.

 

어느 날, 멀리에서 손님이 무현의 저택으로 찾아왔다. 옥벽(玉璧)을 팔기 위해서였다. 완전무결하고 아름다운 빛을 발하는 옥벽을 보고는 무현이 500금을 주고 매입하였다. 나중에 옥장(玉匠)을 불러 옥을 감정했는데 옥장이 보고 놀랐다. 화씨지벽(和氏之璧)이었다. 무현은 대단히 기뻐 급히 옥을 숨겼다. 그런데 이미 그 일은 혜문왕(惠文王, BC356~BC311)에게 보고되었다. 왕이 무현에게 내놓으라고 독촉했으나 무현이 너무나도 화씨지벽을 좋아해 곧바로 왕에게 바치지 않았다. 왕은 대노해 사냥을 나간 틈을 타 무현의 가택을 수색하고 화씨지벽을 가지고 가 버렸다.

 

무현은 화가 돌아올까 너무 두려워 연(燕)나라로 도망갈 준비를 하였다. 인상여가 물었다. “어찌 연나라 왕이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무현이 말했다. “일찍이 조나라 왕과 연나라 왕이 변경에서 회견한 적이 있소. 그때 연나라 왕이 내 손을 잡으면서 말했었소. ‘나는 그대와 친구를 맺고 싶소.’ 그래서 내가 연나라로 가려고 하는 것이오.”

 

인상여가 무현에게 권했다. “그때는 조나라는 강했고 연나라는 약했소. 당시에 조나라 왕이 당신을 중용하고 있었기에 연나라 왕이 총애를 받으려고 당신과 우의를 맺으려고 하였던 것이오. 지금 당신이 조나라를 떠나 연나라로 간다면 위험하오. 연나라는 줄곧 조나라를 두려워하고 있기에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고 조나라로 압송할 게 분명하오. 당신이 웃옷을 벗고 도끼를 짊어진 채로 조나라 왕에게 찾아가 죄를 청하는 것보다 못하오. 조나라 왕에게 죄를 청해야 요행이나마 죽음을 모면할 수 있소.” 무현은 인상여의 계책대로 행하여 조나라 왕의 용서를 받았다. 이것을 보면 인상여는 겉으로 그리 드러나 있지 않는 사람의 정을 세밀하게 통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유사한 이야기는 춘추시대(春秋時代, BC770~BC476) 말기에 진(晉)나라의 순인(荀寅)에게도 있었다. 당시에 순인은 국군(國君)에게 죄를 지어 유랑하고 있었다. 어느 날, 작은 읍성을 지나가고 있었는데 그의 시종이 주위를 환기시키며 말했다. “주공, 여기 관리는 주공의 친한 친구인데 어찌해서 여기에서 조금 쉬고 가지 않으십니까? 쉬면서 뒤따라오는 수레를 기다리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순인이 말했다. “그렇지. 이전에 그 사람은 내게 잘해줬지. 내가 예전에 음악을 좋아한 적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나에게 좋은 거문고를 보내왔지. 나중에 내가 장식물을 좋아하자 그는 또 나에게 옥환을 선물하기도 하였고. 그것은 나에게 부탁할 것이 있어서 그런 거지. 그때에는 그를 받아줄 수 있는 능력이 내게 있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네. 내가 걱정하는 것은, 그가 적에게 환심을 사려고 나를 팔 수도 있다는 거네. 우리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하네.” 과연 그의 생각과 다르지 않았다. 그 관리는 사람을 보내 뒤따라오는 순인의 수레를 압수해 진나라 왕에게 헌납하였다.

 

다음 이야기는 우리를 깊은 사색에 빠지게 한다.

 

동진(東晉, 317~420)의 대장군 왕돈(王敦)이 세상을 뜨자 그의 형 왕함(王含)은 일시에 의지할 곳을 잃게 되었다. 위험이 임박해오자 왕서(王舒)에게 찾아가 의탁하려고 하였다. 왕함의 아들 왕응(王應)은 곁에서 부친에게 왕빈(王彬)에게 의탁하여야 한다고 권했다. 왕함은 아들을 훈계하며 말했다. “대장군 생전에 왕빈과 무슨 교류가 있었느냐? 어린 네가 무엇을 안다는 말이냐. 왕빈에게 가면 무슨 이익이 있다는 말이냐?”

 

왕응은 받아들이지 않고 말했다. “이것이 아들인 제가 아버지에게 권하는 까닭입니다. 강천(江川) 왕빈은 강자들이 도처에서 군림할 때 자신의 능력으로 한 지역을 일궜던 인물입니다. 권세 있는 자에게 나아가 아부하며 빌붙지 않았습니다. 일반인의 능력으로는 이루지 못하는 장거입니다. 지금 쇠망하는 우리를 보면 틀림없이 불쌍히 여겨 연민의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반면에 형주(荊州)에 있는 왕서는 이제까지 명철보신만 했습니다. 그런 인물이 어떻게 예외적으로 은혜를 베풀어 우리를 받아들이겠습니까?”

 

왕함은 아들의 권하는 말을 듣지 않고 곧장 왕서에게 몸을 의탁하였다. 어떻게 됐을까? 왕서는 왕함의 부자를 마대에 넣어 강물에 던져버렸다. 왕빈은 당초 왕응이 아버지와 함께 자신에게 온다는 말을 듣고 몰래 선박을 준비해 강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왕함의 부자가 왕서에게 몸을 의탁하러 간 후 액운을 맞았다는 말을 듣고는 깊이 탄식했다고 한다.

 

사람을 보는 눈, 나이에 따른 것이 아닐진저.

 

[인물]

 

○ 인상여(藺相如), 생졸 미상, 현 보정(保定)시 곡양(曲陽)현 상여(相如)촌 사람이다. 전국시대 조(趙)나라 상경(上卿)이다. 『사기·염파인상여열전廉頗藺相如列傳』은 “인상여가 화씨지벽을 완전무결하게 진(秦)나라에서 조(趙)로 귀환시킨 일〔완벽귀조(完璧歸趙)〕, 인상여가 민지(渑池)에서서 진나라의 소왕(昭王)과 대결해 승리한 일〔민지지회(澠池之會)〕, 조나라 장군 임파(廉颇)와 화해하고 친분을 두텁게 한 일〔부형청죄(負荆請罪)〕, 이 세 가지 일은 줄거리로 엮어졌다. 인상여의 기지와 용감한 성격, 국익을 중요시 하고 사적인 원한을 염두에 두지 않는 고귀한 성품을 돋보이게 하는 내용이다.

 

※ 민지(澠池, 혹 면지) :

 

전국시대 조(趙)나라의 혜문왕(惠文王)과 진(秦)나라의 소왕(昭王)이 회담을 열었던 장소다. 진나라가 소국인 조나라를 얕보고 혜문왕에게 모욕을 주었는데 조나라의 재상 인상여(藺相如)가 그 자리에서 소왕에게 모욕을 되돌려주어 진나라의 기세를 꺾었다.

 

※ 부형청죄(負荆請罪) :

 

이 말을 전해들은 염파는 웃옷을 벗고 가시나무 회초리를 등에 지고 인상여의 집 문 앞에 이르러 사죄하였다. “비천한 사람이 장군께서 이토록 관대한 줄을 알지 못했소.” 두 사람은 마침내 화해를 하고 문경지교를 맺었다.(廉頗聞之,肉袒負荊,因賓客至藺相如門謝罪.曰,鄙賤之人,不知將軍寬之至此也.卒相與驩,爲刎頸之交.)(「염파인상여열전廉頗藺相如列傳」) 염파가 웃통을 벗고 가시나무를 등에 져 인상여를 찾아갔다는 말에서 ‘부형청죄’가 유래하였다. ‘육단부형(肉袒負荊)’이라고도 한다.

 

 

※ 완벽귀조(完璧歸趙) :

 

왕은 인상여를 불러 물었다. “진왕이 열다섯 성을 가지고 과인의 벽옥과 바꾸자고 하는데 주어야 하는가 주지 말아야 하는가?” “진나라는 강하고 조나라는 약합니다. 허락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벽옥만 받아 넣고 성을 주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진나라가 성을 주는 조건으로 벽옥을 청하였는데 조나라가 듣지 않으면 잘못은 조나라에 있게 됩니다. 조나라가 벽옥을 주었는데도 진나라가 성을 주지 않으면 잘못은 진나라에 있게 됩니다. 두 가지를 놓고 비교할 때 저쪽 말을 들어 진나라에 책임을 지우는 편이 나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누가 사신으로 적당한가?” “만약 적임자가 없다면 신이 벽옥을 받들고 사신으로 가겠습니다. 성이 조나라에 들어오면 벽옥을 진나라에 두고 오겠지만, 성이 들어오지 않으면 벽옥을 반드시 조나라로 온전히 가지고 오겠습니다.” 조왕은 인상여에게 벽옥을 들려 서쪽 진나라로 보냈다. “벽옥이 온전히 조나라로 돌아가다”는 말이다. 물건을 조금도 상하게 하지 않고 원래의 주인에게 온전하게 돌려준다는 뜻이다.

 

○ 무현(繆賢), 생졸 미상, 전국시대 조(趙)나라 환관의 수장, 인상여를 천거해 역사적으로 뛰어난 환관이라 평가한다.

 

○ 순인(荀寅), 생졸 미상, 춘추시대 진나라의 경(卿, 대부大夫 위의 서열)으로 중행문자(中行文子), 중행인(中行寅)이라고도 한다. 순오(荀吳)의 아들로 진나라 육경(六卿) 중 한 명이다.

 

○ 화씨지벽(和氏之璧) :

 

(춘추시대에) 초(楚)나라 사람 변화(卞和)가 산에서 박(璞, 옥을 싸고 있는 돌덩어리, 옥의 원석)을 얻어 초여왕(楚厲王)에게 바쳤다. 여왕은 옥장(玉匠)에게 돌을 감정하게 하였다. 옥장은 돌이라고 말했다. 왕은 변화가 속였다고 왼쪽 다리를 잘랐다. 여왕이 죽고 초무왕(武王)이 즉위하였다. 변화는 다시 박을 가져다 무왕에게 바쳤다. 무왕도 옥장에게 감정을 시켰다. 옥장이 또 돌이라고 하였다. 왕은 변화가 속였다고 오른다리를 잘랐다. 무왕이 죽고 문왕(文王)이 즉위하였다. 변화는 박을 안고 초산 아래에서 사흘 밤낮을 대성통곡하였다. 눈물이 다하니 피가 그 뒤를 이었다. 문왕이 이를 듣고 사람을 보내어 물었다. “천하에 다리 잘린 사람이 많은데 당신은 왜 이렇게 슬프게 우는가?” 변화가 말했다. “다리가 잘린 것이 슬퍼서 우는 것은 아닙니다. 보옥인데 돌이라고 해서 슬픈 것이고 충정이 있는 사람이 사기꾼이라 하니 내가 슬픈 것입니다.” 왕이 옥장에게 박을 가공하도록 해 보옥을 얻고 ‘화씨지벽’이라 명명하였다.(『한비자(韓非子)·화씨(和氏)』) ‘화씨지벽’은 ‘화씨벽’이라고도 한다. 화씨(和氏)의 벽옥이라는 말로 전설상의 보물을 비유하거나 사람을 깨우쳐 주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비유한다.

 

○ 동진(東晉) : 진(晉)나라 후반에 해당하는 왕조(317∼419)다. ‘팔왕의 난(300∼306)’으로 국정이 혼란에 빠졌을 때 진 왕조는 북중국의 호족(胡族)이 침입해 316년에 멸망한 후 일족 중 사마예(司馬睿, 동진의 원제元帝, 재위 318∼322)가 장강이남 땅을 영토로 317년 건업(建業, 현 남경南京)을 국도로 진 왕조를 재건하였다. 이를 동진이라 한다. 419년 공제(恭帝) 때 군벌 유유(劉裕, 남조南朝의 송宋 무제武帝, 재위 420∼422)에게 빼앗겨 멸망하였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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