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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242)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셋째, 장자를 죽여 신에게 제사지내는 풍습이 있었다.

 

고대에 새 벼가 익은 후 사람들은 아무리 배가 고파도 감히 먼저 먹지 못했다. 반드시 ‘첫 벼’로 농사의 신에게 헌제를 올렸다. 이런 풍습이 퍼져나가 장자를 죽여 신령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확산됐다고 본다. 옛 서적에는 그런 잔인하면서 괴이한 풍습을 “장자를 죽임으로써 동생들을 많이 낳게 한다”고 하였다.

 

원시시대 부녀자의 사유 방식은 다음과 같다. “장자를 죽여 신에게 제사를 지내어 신령이 즐거워해야 만이 그녀에게 더 많은 자녀를 하사해준다.” ‘첫 벼’로 신령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처럼 첫 아이를 신에게 제사를 지내면 더 많은 자녀를 낳게 해준다는 관념이다.

 

이는 “신(神)이 먼저 향유하여야 한다”는 몽매한 의식의 연장인 셈이다. 이것은 현재에도 남방의 소수민족에게 남아있는 처녀의 동정을 깨뜨리는 것을 가장 금기시하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숫처녀하고 사랑을 나눌 수 있을 뿐 숫처녀와는 결혼을 해서는 안 된다.” 기이한 관념의 풍습이 아닌가? 숫처녀의 신성함을 깨뜨릴 수 있는 사명은 무당(무격〔巫覡〕)이나 토사왕(土司王)만이 행사할 수 있다고.

 

다시 말하면 중국 원시사회 말기에 괴이한 학대, 바로 장자를 죽이는 현상이 존재했었다. 현재 관점으로 보면 불가사의하고 우매하며 야만적인 일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상고시대에는 존재했었던 일상적 일이었다.

 

그럼 중국의 기록을 한번 뒤져보자. 물론 황당하기 그지없는 신화들이 뒤섞여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당시 실재한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도 부정할 수만은 없다.

 

『장자莊子·도척盗拓』에 ‘요살장자(堯殺長子)’의 기록을 볼 수 있다. 요임금이 맏아들을 죽였다는 말이다. 『사기史記·오제본기五帝本紀』에는 순임금의 부모가 아들 순을 죽이려 한 기록도 있다. 『묵자墨子·상현중尚賢中』에는 곤(鲧)이 장자였는데 우산(羽山)에서 피살됐다는 기록이 있고. 『사기史記·하본기夏本紀』에는 우(禹)가 도산(涂山)의 여자를 처로 맞이했는데 결혼 후 이틀 만에 치수하기 위하여 집을 떠났다가 집으로 돌아온 후 첫아들 계(啓)가 자신의 자식이 아니라고 했다고 기록돼있다. 『초사楚辭·천문天問』에는 제곡(帝嚳)은 맏아들 직(稷)을 사지에 몰아넣었다고 돼있다. 이런 기록에 따른 여러 의혹들을 아직까지도 여전히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사기史記·관채세가管蔡世家』에는 주문왕(周文王)이 장자 백읍고(伯邑考)를 버려두고 둘째인 발(發, 주무왕〔周武王〕)을 태자로 삼았다는 기록이 보인다.

 

 

속담에 “호랑이도 자기 새끼는 잡아먹지는 않는다”고 하지 않던가. 아무리 흉포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제 새끼는 사랑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렇다면 중국 상고시대에는 위대한 임금이라 칭송받는 제왕들이 어찌하여 몰인정하며 극악무도한 일을 자행했을까?

 

공유영(龔維英)은 「상고시대 맏아들을 학대하고 살해한 풍습의 원인 고찰」(『절강학간浙江學刊』1985년 제2기)에서 이런 이해하기 힘든 괴이한 현상에 대해 해석을 내렸다. 그가 보기에는 모계 씨족사회에서 첫째 아들을 죽여 신에게 제사지내는 원시사회에서 자행되었던 종교의식과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농경을 위주로 하였던 중국의 선민은 자연을 숭배하였다. 더욱이 만물의 생장에 대하여 민감하였다. 농업 생산을 포함한 대자연의 생산 능력이 그들을 이 세상에 생존할 수 있는 근본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생산 능력’을 중시하였고 ‘첫 수확’으로 신에게 제사를 드리며 풍성한 수확을 희망하였다. 위대한 토지의 신에게 제사를 드리면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첫 번째로 태어난 아들을 죽여 토지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면 더 많은 자식을 하사해 줄 것이 아닌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인류의 천성이다. 아니 모든 생명이 다 그렇다. 상고시대 중국의 선민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모친이 된 자가 사랑을 버리고 고통을 감내하며 아들을 제물로 삼은 이유는 뭘까? 인도사상과 유사한 ‘환생’을 믿었던 것이라 본다. 맏아들이 죽지만 그는 분명 환생할 것이라고. 그저 잠시 생을 뒤로 할 뿐이라고. 장자가 죽으면 모친이 낳은 자식들은 더 많아질 것이라고. 더 건강하고. 그렇게 되면 모든 부족이 창성해질 것이고.

 

그러나 모계 씨족사회에서 부계 씨족사회로 발전하면서 일부일처제가 ‘복혼(複婚) 가정’을 대체하였다. 그렇게 되자 장자를 죽이는 까닭이 신령에게 제사를 지내거나 토지의 신에게 제를 올리는 종교의식을 벗어나게 되었다. 세속 방면의 재산과 권력을 승계하는 쪽으로 전환된 것이다. 이 시기에는 사유재산이 있었고 그것은 남성 가장이 소유하거나 지배하였다. 그리고 남성 가장은 자신의 직계 혈육이 재산을 계승하는 것을 확보할 수 있도록 처를 엄격하게 통제할 수밖에 없었다. 더불어 부녀자들은 반드시 남편을 위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정조를 유지해야만 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는 일부일처제가 비로소 건립(이전에는 다부다처의 혼인 관계에 있었다)되었기 때문에 적지 않은 부녀자들은 그런 ‘반 유폐’의 혼인 상태에 익숙하지 못하였으며 여전히 “과거 성의 실천을 회상하며 회복하기를” 바랐다. 이런 상황에서 남편은 자신의 처가 첫 출산한 아들이 확실히 자신의 혈통인지 애매해지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였다. 즉 자신의 혈통으로 첫째를 순산하는 것이 그리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다른 씨를 받아들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조그마한 의심이 생기면 맏아들을 버리거나 학대하며 죽이기까지 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재산, 권력, 지위를 다른 남자의 씨가 차지하지 못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대우(大禹)는 아들 계(啓)가 자신의 혈통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왕위를 계에게 물려주려고 하지도 않았다. 바로 그가 혼인한 후 이틀 만에 치수를 위하여 집을 떠났기 때문이다. 자신과 함께 한 날이 이틀 밖에 안 됐는데 첫 번째 태어난 아들이 자신의 혈통이라 믿지 않았다.

 

제곡(帝嚳)은 온갖 방법을 동원해 그의 맏아들 직(稷)을 사지로 몰아넣었다. 어쩌면 그의 처 강원(姜源)이 외출했는데 거인의 족적을 밟아 직을 회임했다는 전설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상고시대 사람들이 맏아들을 학대하고 살해한 이유가 위에서 말한 것 때문일까? 이에 관심 있는 연구자들의 연구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견해를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심도 있는 연구야 말로 인류의 발전과정에서 나타난 괴이한 현상을 바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미래의 인류 족적이 올바를 수 있는 것이고.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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