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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교 이후부터 근대학교 태동 이전의 제주교육 ... 목민관.유배인의 직.간접 교육

 

1392년 조선 태조로 즉위한 이성계는 제주에 향교부터 세우도록 했다. 이것은 지방향교로서는 가장 일찍 설립된 예이다. 1394년에 향교에 교수관을 두고 10세 이상의 토관자제들을 교육시키기 시작했고, 그들로 하여금 과거에 응시케 하여, 때로는 중앙인재로 기용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는 한성판윤을 지낸 고득종이 유명하다.

 

여말선초(麗末鮮初)에도 고려왕조 유신들이 제주에 유배와서 제주교육에 기여한 바, 대표적으로는 제주의 4현이라 부르는 고려 예문관 대제학인 한천(가시리, 청주 한씨 입도조), 고려 공양왕 때 도첨의좌정승을 지낸 김만희(곽지, 김해 김씨 입도조), 고려 조정의 교리이자 대학자 이제현 증손인 이미(외도, 경주 이씨 입도조), 태조 이성계의 계비인 선덕왕후의 4촌동생인 강영(함덕, 신천 강씨 입도조) 등이 있다.

 

이외에도 양천 허씨 입도조인 허손, 경주 김씨 입도조인 김검룡 등 적지 않은 유민들이 이때를 전후하여 입도, 지역주민을 훈학하며 제주교육의 초석을 다지기도 했다.

 

제주향교가 설치되어 50여 년이 지난 1450년을 전후하여 월계정사(한림 명월)와 김녕정사(구좌 김녕)가 세워졌다. 제주목사는 월계정사를 서재로 김녕정사를 동재를 삼아, 향교의 유생들과 지방 토호 세력의 자제들을 사는 곳에서 가까운 정사에 나아가 글을 읽게 하였다. 또한 지방인사 중에서 학식과 덕망이 있는 자를 택하여 학장으로 삼았다.

 

제주는 말 사육의 최적지였다. 그러나 고려 말 원 지배기 이후에는 말 사육이 조선조정의 강한 단속으로 금지되자, 제주경제는 더욱 위축되어 제주선인들은 대규모 출륙유량의 길로 나서야 했다.

 

이에 조선정부는 1629년(인조 7년)부터 1823년(순조 23년)까지 약 2백 년 동안 출륙금지령을 발동했고, 제주선인들은 출륙이 원천봉쇄 당했다.

 

세계사적으로 새로운 문화에 접할 수 있는 중요한 시기 이지만, 제주선인들은 섬에 갇혀 왜구방어와 우마방목, 특산물 진상 등 과중한 부역을 강요받고 외부사회로부터 격리된 채 삶을 이어가야 했던 슬픈 200년이었다.

 

뛰어난 항해술과 조선술은 점차 사라지고 멀리 갈 수 없는 떼배인 테우에 의한 근해어업만 허락되었다. 교육진출의 길도 봉쇄된 상황에서 그나마 일부 목민관과 유배인에 의해 교육이 직·간접적으로 전개되던 시기였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문영택은?
= 4.3 유족인 부모 슬하에 부산 영도에서 태어났다. 구좌중앙초·제주제일중·제주제일고·공주사범대·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프랑스어교육 전공)을 졸업했다. 고산상고(현 한국뷰티고), 제주일고, 제주중앙여고, 서귀포여고, 서귀포고, 애월고 등 교사를 역임했다. 제주도교육청, 탐라교육원, 제주시교육청 파견교사, 교육연구사, 장학사, 교육연구관, 장학관, 중문고 교감, 한림공고 교장, 우도초·중 교장, 제주도교육청 교육국장 등을 지냈다. '한수풀역사순례길' 개장을 선도 했고, 순례길 안내서를 발간·보급했다. 1997년 자유문학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 수필집 《무화과 모정》, 《탐라로 떠나는 역사문화기행》을 펴냈다. 2016년 '제주 정체성 교육에 앞장 서는 섬마을 교장선생님' 공적으로 스승의 날 홍조근정훈장을 받았다. 2018년 2월 40여년 몸담았던 교직생활을 떠나 향토해설사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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