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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드제주]고향 우도로 돌아온 이들 ... 마을신문으로 세상살이 희망
"마을신문 통해 자아발견 ... 글이 우도와 세상 변화시킬 것"

 

그런 시절이 있었다. 너희 집 아이, 우리 집 아이 할 것 없이 마을 사람들이 함께 아이들을 키우고, 마을 어르신을 함께 모시던 시절이 있었다.

 

마을 누구네 집에 생긴 대소사는 곧 마을의 일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그 집에 모여 함께 웃고 울며 힘을 모았다. 마을이 하나의 공동체였고 하나의 커다란 가족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 안에 돈이 파고들기 시작했다. 돈은 조금씩, 그렇지만 확실하게 공동체를 해체하기 시작했고 모든 것은 수치화되기 시작했다.

 

“올해 우리 면의 목표는 관광객 50만명 유치입니다. 그러다 또 70만명, 80만명, 100만명. 이런 식으로 목표가 불어납니다.”

 

많은 것이 수치화되는 과정 속에서 어느 순간 ‘우리’는 사라졌다. 함께 웃고 울며 ‘우리’를 이루던 이웃은 어느 덧 경쟁자가 되고 말았다.

 

그 속에서 환경도 파괴되기 시작했다. 자연은 더 이상 지켜야할 대상이 아니라 이용해야할 대상이었다. 더 높은 수치를 위해 경관이 좋은 곳에는 관광시설과 카페, 펜션을 만들어야 했다. 그렇게 ‘사람’과 ‘자연’, ‘공동체’는 잊혀지고 자본과 숫자, 개발이 당연하게 됐다.

 

이런 상황은 제주 동쪽 섬 속의 섬, 우도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작은 섬이기 때문에 더욱 극명하게 나타났다.

 

 

우도에서 태어나고 자라 세상밖으로 나갔지만, 고향의 품이 그리워 다시 돌아온 이들에게 우도는 병들고 아픈 땅이었다. 세상 밖에서 얻은 아픔과 상처들을 치유하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여기서도 아픔과 상처는 계속될 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누군가는 주저 앉을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런 상황을 바꿔야 하고 더 좋은 쪽으로 바꾸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

 

그것을 ‘글’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이루려는 사람들, 우도 마을신문 ‘달그리안’의 사람들이다.

 

17일 오후 8시, 하루 일과를 마치고 가족들과 담소를 나누며 쉴 법도 한 시간, 우도면 연평리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초가로 몇몇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마을 신문 ‘달그리안’의 편집회의를 위해서였다.

 

'달그리안'은 우도팔경 중 제1경인 주간명월(晝間明月・낮에 뜨는 환한 보름달)의 다른 이름이다. 주간명월은 우도봉 절벽 아래 해식 동굴 천장에 바닷물에 반사된 해가 비춰 달처럼 보이는 것을 말한다.

 

그 ‘달그리안’이 등장하게 된 배경은 남달랐다. 단순히 신문을 만드는 과정이 아닌, 상처받고 아픈 자신들의 고향을 치유해 나가는 일이었다. 상처받은 스스로를 치유해 나가는 길이었다.

 

시작은 한 일간지에 실렸던 ‘마을 미디어 교육 공고’였다.

 

공고를 처음 보고 주변인들에게 “함께 교육을 받아보자”며 설득에 들어간 이는 현재 보험일을 하면서 동시에 '달그리안’의 마을기자로 활동하고 있는 강윤희(48)씨.

 

윤희씨는 먼저 밖에서 삶을 일구다 우도로 돌아온 후 농삿일을 하고 있는 남동생 강계헌(47)씨에게 이 공고 소식을 알렸다.

 

“남동생은 (개발과 자본보다는) 우도의 옛 공동체 문화를 우도에 다시 끌어오고 싶어 했다. 하지만 우도에서는 이미 ‘돈’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 속에 공동체 문화를 가져오려는 시도를 하자 남동생은 동네북 마냥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기도 했다.”

 

윤희씨는 “동생은 우도를 변화시키고자 많은 것을 했는데 상황은 자본을 따라가는 것 같고, 결국에는 혼자하다가 버거워 내려놓는 상황에 처하게 됐다”며 “그게 안타까웠다. 그러던 중 신문에 마을 미디어 모집 공고가 떴다”고 말했다.

 

윤희씨는 이를 동생에게 알렸고, 동생에게 “함께 교육을 받을 사람들을 모아봐라”라는 숙제를 안겨줬다. 하지만 동생 계헌씨가 모아온 이들은 모두 동생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외지인들이었다. ‘돈’과 ‘개발’ 우선주의로 흐르고 있던 우도에서 ‘회복’을 외치기 위해서는 ‘현지인’이 필요했다. 그때 강씨의 머리에 떠오른 이는 어린 시절부터 마을의 ‘브레인’으로 유명했던 동네 오빠 김영진(50)씨였다.

 

 

영진씨는 우도에서 나고 자라 진학문제로 고교 시절 본섬 제주시로 나갔다. 제주시에서 결혼도 하고 자녀도 가지면서 자리도 잡았다. 이름 있는 연극 극단의 대표로 활동을 하면서 자신의 길을 만들어갔다. 그외 다양한 예술활동도 펼쳤다.

 

하지만 연극활동도, 그외 다양한 예술활동도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의 뜻과 엇나가는 것이 보였다. 도시 생활에 대한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공연을 하면서 마을공동체라는 주제를 가지고 제주 여기저기를 누비고 다녔다. 하지만 내가 일했던 공간에서 꿈이 펼쳐지지 않는 것을 느꼈다. 각박한 도시에서 부대끼면서 살아야 하는 것에도 피로감이 쌓이기 시작했다. 짐을 싸서 우도로 들어가자는 생각을 하게됐다.”

 

영진씨는 2009년 우도로 돌아왔다. 농삿일과 함께 펜션 운영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돌아온 고향 우도는 예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영진씨는 “그때까지만 해도 옛 정감이 남아 있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면사무소는 관광객 숫자에만 집착을 하고, 돈에 날개를 달더니 우도의 모습이 바뀌어갔다”고 말했다.

 

영진씨와 부인 송희정(48)씨는 “남편은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알콩달콩한 세상을 만들고 싶은 꿈이 있었다. 그래서 우도에 들어와서도 여러 활동을 하는데 바라던 모습대로 흘러가지 않고 그 과정에서 상처도 받았다. 그래서 나중에는 모두 그만두게 됐다”고 말했다.

 

모든 것을 그만 두고 싶었던 김씨다. 때문에 미디어 교육을 함께 받아보자던 강씨 남매의 권유에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거듭된 권유를 매번 거절했다. 하지만 거절에도 이어지는 권유에 김씨는 강씨 남매의 열정을 읽었다.

 

영진씨는 “강씨 남매의 거듭된 권유가 20살 때 무엇이라도 열심히 해보려던 열정을 되살렸다”고 말했다. 여기에 미디어 교육을 이끌어준 강사의 열정도 더해졌다.

 

 

그렇게 해서 시작하게 된 마을 신문은 어느 새 영진씨에게 뗄 수 없는 존재가 됐다. 2017년 겨울 창간호를 시작으로 2018년 겨울 두 번째 신문을 발행했고, 이후 계절마다 신문을 내고 있다. 어느 덧 4호까지 세상에 나왔다.

 

매호 2000부씩 발행해 제주시 디자인 업체에서 우도로 가지고 들어온다. 이후 이 신문들은 섬 마을 곳곳 가가호호 직접 방문하며 주민들에게 나눠준다. 그외 제주시 쪽에서 신문을 보고 싶다고 연락해오는 이들에게는 우편으로 신문을 보내주고 있다.

 

신문발행비용은 서로 푼푼이 돈을 보태고 후원 등으로 해결한다. 물론 섬 사정에 밝은 업체나 섬 안 곳곳에서 광고도 받아 비용을 충당한다.

 

영진씨는 “신문을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감을 얻어갔던 것 같다. 또 신문을 하면서 나의 존재가치가 여기에 있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된다”고 말했다.

 

그렇게 시작하게 된 마을 신문에서 영진씨는 발행인 역할을 맡으며 ‘달그리안’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우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 이야기를 풀어내고 우도의 각종 현안을 들여다본다.

 

여기에 김씨의 부인 송씨와  우도의 바람에서 치유를 느껴 울산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김애경(46)씨가 합류했다.  김씨 만이 아니라 이들에게도, 신문은 뗄 수 없는 존재가 됐다. 우도를 치유하기 위해 시작한 신문이지만 오히려 자신들이 치유를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애경씨는 “글이 주는 위로가 엄청나다는 것을 알았다. 이 위로를 다른 이들에게도 전해주고 싶다. 어려운 단어가 아닌 아이가 읽어도 이해할 수 있는 그런 글을 신문에 담고, 그를 통해 사람들에게 내가 느낀 것을 전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영진씨는 여기에 더해 “우도의 평화로움을 지키고 싶다”고 말했다. “우도에 서려 있는 평화로움을 지켜내면서 그것이 자본의 힘에 눌리지 않도록 하고 싶다. 그를 위해 힘을 더 키우고 싶다”고 말했다.

 

계헌씨는 이 신문을 ‘희망’이라고 말했다. “한 번쯤 더 고민할 수 있다면 그게 모여 변화를 만들 것이라는 희망”이라고 표현했다.

 

윤희씨에게 '달그리안'은 ‘양심을 지키기 위한 시도’다. “우도의 변화에 안타까움을 느끼는 사람들은 많지만 정작 말만 할 뿐,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행동을 하려고 하면 ‘돈도 안되는 것을 왜 하느냐’고 핀잔을 주는 사람들도 있다”고 토로했다.

 

이어 “그렇지만 누군가는 해야 한다. 이 각박한 세상을 다르게 만들어야 하는데 누군가는 해야 했다. 우리 모두 먹고 사는게 힘들기는 하지만, 그래도 우리들의 작은 힘이 모이면 좋은 쪽으로 바뀔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여기서 손을 모으고 있다”고 말했다.

 

치유・평화・희망・양심, 이 힘들이 모여 지금도 우도의 공동체 회복을 위한 변화를 일구고 있다. [제이누리=고원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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