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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235)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손자병법(孫子兵法)』에 천 년 동안 논쟁을 벌이고 있는 문제 두 가지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아시는가? 문물 발굴에 따라 계속해서 의문을 던지면서 역사의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첫째, 『손자병법』은 82편인가 아니면 13편인가? 둘째, 『손자병법』은 손무(孫武)의 작품인가 아닌가?

 

손자(孫子)의 이름은 무(武)다. 손무자(孫武子)라고 불리기도 한다. 중국 고대 군사전문가요 병가(兵家)의 창시자다. 제(齊)나라 낙안(樂安, 현 산동 박흥〔朴興〕 북쪽, 일설에는 혜민〔惠民〕이라고도 한다) 사람이다. 생졸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대략 기원전 6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활동했다고 전한다. 손무는 원래 제나라 전(田) 씨의 후예다. 전란을 피해 떠돌아다니다가 오(吳)나라에 이르러 오왕에게 중용된다. 오나라를 개혁해 강국으로 만들었다. 오나라는 손무의 도움으로 서쪽으로 강국 초(楚)나라를 치고 남쪽으로 월(越)을 정복했으며 북으로는 제(齊)와 진(晉)을 위협할 정도로 강한 제후국이 되었다. 그때가 오나라의 전성기였다.

 

손자 일생에 있어 후세에 남긴 최대의 공헌은 그의 군사관련 저작 『손자병법』이다. 중국에 현존하는 최초, 최고의 병법 걸작이다. 여태껏 ‘병경(兵經)’이라 추앙받았다. 이 책은 춘추말기 및 그 이전의 전쟁경험을 총결하고 비교적 계통적으로 전쟁의 전면적인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 지금까지도 과학적 가치가 있다고 인정받는 작전 원칙을 총결하고 있어 불후의 군사학 명저라 높이고 있다. 후대에 광범위하면서도 깊은 영향을 줘 중국 한 세대 또 한 세대의 군사전문가들을 훈육하였다.

 

“치세의 재간 있는 신하요 난세의 간웅”인 조조(曹操)도 이와 관련한 전문적인 저작을 남겼는데 그의 『손자주(孫子注)』는 후인들의 칭송을 받고 있다. 일찍이 당 태종, 송 인종, 명대 대유 왕양명(王陽明), 승상 장거정(張居正), 청대 주용(珠墉) 등이 『손자병법』을 열심히 공부하였다. 모택동(毛澤東)은 1937년에 유명한 『논지구전(論持久戰)』에서 『손자병법』을 높이 평가하고 그중의 이론 “지피지기(知彼知己), 백전불태(百戰不殆)”의 과학적 진리를 칭찬하였다. 현재 『손자병법』은 여러 문자로 번역돼 세계에 각국에서 읽히고 있다. 군사 영역 이외에도 외교활동, 기업관리, 시장 경쟁, 스포츠 경기 등 여러 방면에 운용되면서 세계인들이 가장 즐겨 읽는 책이 되었다.

 

 

그런데 이 오랜 세월에 걸쳐 유일무이한 기서는 광범위하게 유통되는 것과 동시에 그 책 본래 가지고 있는 의문점들이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있다.

 

먼저, 『손자병법』의 작자는 누구인가? 사학가들이 쉬이 풀지 못하는 문제다. 『사기(史記)·손자오기열전(孫子吳起列傳)』의 기록에 따르면 춘추전국 시기에 두 명의 ‘손자’가 있다. 하나는 춘추 후기 오나라의 장군 손무이고 또 다른 한 명은 전국 중기 제(齊)나라 군사 손빈(孫臏)이다. 그들은 각각 병법을 저술해 세상에 남겼다. 『한서(漢書)·예문지(藝文志)』 ‘병권모가(兵權謨家)’에는 『오손자병법(吳孫子兵法)』과 『제손자(齊孫子)』 두 종류가 있다고 기록돼있다. 당대 훈고학자 안사고(顏師古)는 주를 달면서 전자의 작가는 ‘손무’이고 후자의 작자는 ‘손빈’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후세에 볼 수 있는 것은 『손자병법』 하나뿐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손빈의 병법서는 동한 말기 이후에 실전됐다고 한다.

 

그래서 송대 이후 많은 사람들이 『손자병법』의 작가를 의심하고 제 나름대로 추측하기도 하였다. 『손자병법』에 서술된 내용이 대부분 전국시대의 상황이기 때문에 손무에서 나와 손빈이 완성했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책 중에 전국시기 관련 내용이 대량으로 기술되어있는데 춘추시기의 손무는 자신의 사후의 일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예 손무는 역사상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손자병법』은 손빈의 작품이라 보기도 한다.

 

1200년, 남송의 군사 연구가 섭적(葉適)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리고 있다 : 손무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 사적과 그 책은 모두 종횡가의 위작이다.” 그는 이렇게 질의한다 : 만약 손무가 세인들이 전하는 그런 “남쪽으로 월(越)인을 정복하고 서쪽으로 강국 초를 멸하였으며 북쪽으론 제와 진을 위협하였다”고 한다면, 어찌하여 경대부(卿大夫)에 봉해지지 않았는가? 세상이 공인하는 역사 권위서 『좌전(左傳)』에 어째서 손무와 관련한 글자가 한 자도 보이지 않는가? 이런 섭적의 관점은 당시에 파란을 일으켰다. 그 영향이 거대해 근대까지도 논쟁을 일으켰다.

 

이외에 손무와 다른 사람을 ‘합일’해 보는 관점도 있다. 하나는, ‘무오일인(武伍一人)’ 설로, 청 왕조 중기의 산동 문인 모정(牟庭)은 『손자병법』은 오자서(伍子胥)의 작품으로 봤다. ‘무(武)’는 손무의 이름이 아니고 『손자병법』 원래의 서명으로 보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무빈합일(武臏合一)’ 설이다. 이 관점은 손무와 손빈을 동일인으로 본다. 손자의 이름은 무(武)이고, 빈(臏)은 별명이라는 것이다. 손자가 오나라와 제나라 양국 모두에 머물렀었기 때문에 사마천이 분별하지 못하고 두 명으로 착각해 『사기』에 기록했다고 본다.

 

분분하면서도 예사롭지 않은 논쟁은 신중국이 건립된 후까지 계속되었다. 그런데 1972년 산동 임기(臨沂) 은작산(銀雀山)에서 서한(西漢) 고분이 발굴됐는데 대량의 죽간이 나왔다, 『손자병법』과 『손빈병법』을 포함한! 이 발굴은 1700년 동안 실전된 손빈의 저작이 세상에 다시 나타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기·손자전』과 『한서·예문지』에 두 명의 손자가 있었고 두 병법서가 있었다는 기록이 정확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1972년 4월, 은작산 서한 1호 고분에서 『손자병법』 13편 죽간, 『손빈병법』 16편과 산실된 5편의 죽간이 출토되었다. 은작산 한묘(漢墓)에서 출토된 죽간은 중국 군사학, 문자학, 고음훈, 고 간책 제도 및 고대 역법 연구에 있어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그렇다 하더라도 학자들의 연구열은 쉴 줄 몰랐다. 『손빈병법』 발견이 『손자병법』이 춘추 말기의 손무가 편찬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다음 몇 가지 의문점 때문이다. 첫째, 『손자병법』에 사용된 많은 용어는 전국시대에는 유행했지만 춘추시기에는 볼 수 없는 것들이다. 예를 들어 ‘형명(形名)’, ‘패왕(霸王)’이 그것이다. 둘째, 『손자병법』의 기록에는 동원된 병력 수가 걸핏하면 10만이 넘는다. 그러나 춘추시기에는 큰 나라라 하더라도 병력 동원이 2,3만 명에 불과하였다. 전국 중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군인 수가 10만에서 수십만이라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셋째, 『손자병법』에서 얘기하는 전술은 대부분 기동전이다. 적의 후방에 깊숙이 들어간다거나 장거리 이동 등을 주장한다. 이런 것들은 모두 전국시기의 전투 방법이다. 넷째, 『손자병법』에서 군대를 말할 때 ‘장(將)’이 독자적으로 어느 한 부분을 담당한다. 이런 군사 격식은 전국시대의 묘사다. 춘추시기의 전쟁은 일반적으로 국군(國君)이 군대를 통솔해 출정하였다. 다섯째, 『손자병법』에 소진(蘇秦)과 관련된 “연(燕)이 흥하니 소진이 제(齊)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는데 소진이 활동한 시대는 전국시대 중후기로, 그때는 손무가 죽은 지 200년이나 흐른 시기다. 이런 의혹에 대하여 정확한 대답을 내놓지 못하는 한 『손자병법』이 손무의 작품이라고 단언하는 데는 편파적일 수밖에 없다.

 

 

또 다른 문제는 편수와 관련돼 있다. 『손자병법』은 82편인가, 아니면 13편인가? 이 또한 사학가와 군사전문가들이 고민하며 탐색하는 문제다.

 

『사기·손자오기열전』에는 병법이 13편이라고 두 차례나 기록돼있다. 하나는 오왕 합려(闔閭)가 “손자의 13편을 나는 모두 봤노라”이고, 또 하나는 “세속에서 말하는 군대는 모두 손자 13편을 말한다”이다. 『여씨춘추(呂氏春秋)·상덕편(上德篇)』에는 “손무, 오왕 합려의 장수다. 병법 5천 어가 있다.” 이 ‘5천 어’ 또한 13편을 말한다. 조조 『손자약해서(孫子略解序)』에는 “손자는 제나라 사람이다. 이름은 무(武)이다. 오왕 합려를 위하여 병법 13편을 지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기록은 모두 『손자병법』이 13편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82편이라는 설은 최초로 『한서·예문지』에 기록돼있다. 작자인 반고(班固)는 『오손자병법』이 82편이고 도화(圖畫) 9권이 있다고 하였다. 한나라 성제(成帝) 때 임굉(任宏)이 병서의 차례를 논하고 『오손자병법82편』을 편찬하였다. 『오손자병법』은 동한 말년까지 전해졌고 조조가 세상 사람들이 『손자병법』에 대하여 “그 요의를 잃을까” 염려해 그중 69편을 없애고 ‘13편’만 주를 달았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이것이 현재 ‘13편’의 유래라는 것이다. 그러나 『오손자병법82편』의 진위에 대해 사람들은 의문을 품는다. “82편 삭감설”도 그리 설득력이 없다.

 

1996년 9월, 한 신문매체가 서안에서 『손자병법』 82편의 사본이 발견됐다고 보도하면서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사본을 보유하고 있던 장경헌(張敬軒)은 청(淸) 광서(光緖) 때 진사요 진섬(晉陝)의 명인 장서기(張瑞璣)의 손자다. 광서 32년(1906), 장서기는 섬서 한성(韓城) 지현(知縣)으로 발령받아 부임하는 도중 보물을 보는 혜안이 있어 큰돈을 주고 『손무병법』 82편 도화 9권의 한간(漢簡, 한나라 서간〔書簡〕)을 구입하였다. 1923년, 장서기가 사직하고 귀향한 후 전문적으로 그 한간을 연구하고 정리하였다. 장서기가 세상을 뜬 후 그 아들 장련갑(張聯甲)이 부친의 유훈을 쫓아 그 죽간을 정리해 책으로 편찬하였다.

 

문화대혁명 시기, 장련갑은 한간 병서 때문에 “화를 당할까” 두려워 “서간을 없애 병법을 보호한다”는 책략으로 주동적으로 죽간을 불태웠다. 홍위병들이 감독이 소홀한 틈을 타 불에 타고 있던 죽간 한 묶음을 불더미에서 꺼냈다.(‘82편’ 중 32편) 그렇게 다행히도 한나라 죽간 진품과 장서기 부자의 사본인 묵적(墨跡) 친필 원고가 보존되게 되었다. 지금 그 진귀한 물건은 장가의 제3대 장경헌의 손에 보존되고 있다. 이른바 “중화민족 찬란한 고문화 보고 중 참신한 아름다운 시문”이라 칭하고 있다.

 

만약 그 문물이 실물이라고 증명된다면 『손자병법』은 82편이 되어야 하고 13편은 옳지 않게 된다. 그러나 전국을 뒤흔들었던 소식은 얼마 되지 않아 많은 사람의 의혹의 중심에 섰다. 많은 역사가와 군사전문가들이 과학적인 시각으로 고증을 거친 결과, 빈틈이 너무나 많았다.

 

첫째, 장서기 후예의 신분은 실증할 수 있을까? 고증을 거친 결과, 장련갑과 장서기는 근본적으로 혈연관계가 아니었다. 장련갑이 장서기의 아들이라는 설은 완전 날조였다. 그렇다면 “장 씨 3대가 국보를 보호하였다”는 이야기는 스스로 설 자리를 잃는 것으로 한(漢) 서간이 ‘장 씨 가전’이라는 설도 모두 터무니없는 말이 된다. 둘째, 과학적 각도에서 분석하면, 죽간은 과학적인 저장 조건을 만들지 않으면 지상에 그대로 놔두고 2천년 동안 썩지 않고 보존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물며 온갖 뒤스럭거림을 당했을 터인데 완벽하게 보존됐다고?

 

셋째, 장경헌이 내놓은 이른바 그 부친이 ‘민국 12년’에 초록한 원본은 전문가들이 고증한 결과 실제는 20세기 70년대 이후에 초록한 것으로 사본도 진품이 아니었다. 넷째, 선진 저작은 일반적으로 한 사람의 손에 의해 저술된 것은 드물다. 대부분 여러 사람이 여러 대에 걸쳐 완성하였다. 『손자병법』 ‘13편’도 후대 사람들이 증보한 부분이 있는데 하물며 편폭이 더 많은 ‘82편’은 어떨까? 그리고 장경헌의 소개에 따르면 손무가 독자적으로 82편의 거작을 완성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이름을 사용해 『손무병법』이라 했다니, 그리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결국 새로 발견된 『손무병법82편』은 발견 과정이나 내용 구조 상 많은 의문점을 가지고 있다. 믿을 만한 것이 있다손 전문가들은 유보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따라서 『손자병법』이 82편이냐 13편이냐 하는 논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아니 영원히 계속될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장경헌이 수장하고 있다는 82편의 초록 사본 전문을 볼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다. 그래야 역사 속 수수께끼를 말끔하게 풀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논쟁, 언제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까?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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