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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233)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한비(韓非, BC 약280~233), ‘한비자(韓非子)’라 칭하기도 한다. 기원전에 출생한 한국(韓國) 화하족(華夏族) 중의 귀족으로 전국시대 말기 걸출한 사상가요 철학자이며 산문가이다.

 

이러한 역사적 인물이 어떻게 역사적 현안이 됐을까? 도대체 한비자는 어떻게 죽었을까?

 

한비, “형명(刑名) 법술(法術)학을 좋아하였다.” 나중에 한비자라 칭한다. 이사(李斯)와 동문으로 순자(荀子)의 제자다. 당시 한국은 국력이 약하여 이웃나라가 업신여겼다. 한비는 여러 차례 한왕(韓王)에게 부강의 계책을 진언했으나 받아들이지 못했다. 『고분(孤憤)』, 『오두(五蠹)』 등 체계적인 문장을 썼는데 나중에 『한비자(韓非子)』에 수록하였다. 진왕(秦王) 영정(嬴政)이 한비의 문장을 읽고 높이 평가해 주위 사람들에게 “과인이 이 사람을 만나 같이 노닌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고 하였다. 만남이 너무 늦었음을 한탄하는 말이리라. 그러나 한비가 진나라로 간 후 진왕이 말한 대로 되지 않았다. 오히려 옥에 갇히고 얼마 없어 죽임을 당한다. 그가 어떤 이유로 죽임을 당하였는지 서한 이후 각기 다른 관점이 존재한다. 물론 지금까지도 정론이 없고.

 

일반적으로 한비의 죽음은 이사의 질투 때문에 죽었다고 알려져 있다. 『사기·노자한비열전(老子韓非列傳)』 기록을 보자. 한비는 한(韓)의 귀족세가 출신이다. 나중에 진나라에서 일세를 풍미했던 이사와는 동문으로 순황(荀況)의 제자다. 말솜씨는 없었지만 문장을 잘 써서 이사조차도 자신보다 뛰어나다고 평가하였다. 한비는 한왕(韓王)에게 변법을 실행할 것을 상서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의 건의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물러나 저서를 편찬하며 학설을 세우고 자신의 사상을 찬술하였다. 한비의 저작은 진나라에까지 알려졌다. 그의 저서를 읽어본 진왕은 탄복해 한나라 공격을 명령하자 급해진 한왕은 한비를 진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진왕은 한비가 온다는 말을 듣고 무척 기뻤다. 이것이 이사를 질투 속으로 몰아넣었다. 한비 때문에 자신의 지위가 흔들릴까 염려되었다. 그래서 뜻을 같이 하던 대신 요가(姚賈)와 짜고 진왕 면전에서 한비를 헐뜯는 말을 하며 사지로 몰아넣을 기회를 엿봤다. 계략으로 한비는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된 후 오래지 않아 옥중에서 독을 마시고 죽었다.

 

『사기·노장신한열전(老莊申韓列傳)』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이사, 요가가 해를 끼치기 위하여 그를 비방하며 말했다. ‘한비는 한국의 귀족자제입니다. 지금 왕께서 제후들을 병탄하려 하시는데 한비는 끝내 한나라를 위하지 진나라를 위하지 않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지금 왕께서 중용하지 않고 오래 머물게 한 후 돌려보내면 그때부터 우환으로 남게 되니 법을 어긴 죄로 주살하는 것보다 못합니다.’ 진왕은 옳다 생각하고 관리에게 한비를 치죄하라 명했다. 이사는 사람을 시켜 한비에게 약을 건네 자살하도록 하였다. 한비는 자신이 직접 진술하려고 했으나 (진왕을) 만나지 못했다. 진왕이 후회해 사람을 보내 사면하려 했으나 한비는 이미 죽은 뒤였다.” 이외에 『사기·진시황본기』에 “한비가 진나라에 사신으로 갔는데 진은 이사의 음모로 한비를 머물게 하였다. 한비는 운양(雲陽)에서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마천의 기술에 따르면 “한비는 이사의 질투로 음해 받고 죽었다”가 된다.

 

상술한 기록이 성립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사기』의 기록은 역사의 본래 진상을 왜곡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사 등에게 해명할 수 없거나 씻기 힘든 억울한 누명을 씌웠다고 본다. 이 주장의 근거는 진왕이 한비의 문장을 읽은 후 “과인이 이 사람을 만나 같이 노닌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고 하였을 때 진왕에게 한비를 추천한 사람이 바로 동문인 이사였다는 사실이다. 만약 이사가 현사와 재사를 질투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어찌 그때 한비를 추천할 수 있었겠는가하는 문제가 남는다.

 

그리고 한비가 옥에 갇혀 피살된 것은 진왕이 그를 중용한 때가 아니고 아직 신용하지 못한 상황에서 발생하였다. 당시 상황에 근거하면 한비는 결코 이사에게 어떤 위협도 될 수 없었다. 근본적으로 무슨 시기나 질투를 받을 상황이 아니었다. 곧 질투란 어림없다는 말이다. 이사는 진이세(秦二世) 계위 이후, 옥에 갇힌 후에도 여러 차례 “한비자의 말”을 인용하며 진이세에게 한비의 법술을 실행하도록 권했다. 이것은 이사가 한비를 존중했다는 말이 된다. 따라서 암암리에 모해했다는 설은 말이 안 된다고 본다.

 

다른 관점도 있다. 한비의 죽음은 이사, 요가와 관련은 있으되 관건은 진왕의 의심증에 있었다고 본다. 진왕은 사람됨이 “생각을 적게 하고 호랑지심(虎狼之心, 범과 이리 같은 마음이라는 뜻으로 성질이 거칠고 사나워서 인자하지 못한 마음)”을 갖고 있어 한비의 학설에 경도되기는 했지만 한비에 대한 불신의 정도를 넘어설 수 없었다. 한비가 진나라에 사신으로 간 것은 한나라가 진나라보다 약했기 때문에 침략을 무마하려는 계책에 따른 것으로 한나라를 보존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당연히 한나라를 위하여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려 했었다. 진왕은 한비가 진나라에 온 목적을 우려하다가 독수를 펼쳤다고 본다. 만약 진왕이 한비를 죽일 마음이 없었다면 이사는 감히 경거망동 못했을 것이라는 얘기다.

 

이유는 : 첫째, 한왕(韓王)은 한비를 불러 과거 진나라에 대응하고 약화시킬 계책을 상세하게 상의하였다. 진나라가 한나라를 공격하려 할 때에서야 한왕은 한비를 진나라에 파견하였다. 그렇다면 진왕의 의심을 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둘째, 『사기』는 한비 사후 진왕이 후회했다고 기록하고는 있지만 진왕은 한비의 누명을 벗겨주지 않았다. 더욱이 이사와 요가 두 사람의 무고죄에 대하여 아무런 질책도 하지 않았다. 이 사실로 본다면 당초 한비를 주살한 것은 진왕의 본뜻에 의한 것임을 증명하고 있다고 여긴다.

 

이에 동의하지 않는 관점을 가지고 있는 학자도 있다. 왜 그런가? 진왕이 한비의 저작을 읽고 줄곧 높이 평가하였다. 한비를 얻으려고 온갖 지혜를 다 짜냈다. 결국 천군만마를 동원해 전쟁을 불사하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전쟁을 벌이는 목적이 한비를 억지로 불러들이기 위한 계책이었다. 진왕은 자신이 원하는 인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얻으려 하였다. 진왕이 “섭공호룡(葉公好龍)”(섭공〔葉公〕이 용을 아주 좋아하자 천룡〔天龍〕이 그의 성의를 가상히 여겨 그의 거처로 강림했는데 섭공이 놀라서 도망쳤다는 고사에서 유래함)의 심리까지는 아니더라도 한비가 진짜 진나라로 와 자신과 면대하게 되자 갑자기 시기심이 생겨 그를 중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지에 몰아넣게 됐다고 주장한다.

 

세 번째 관점도 있다. 한비의 사인이 당시 진나라와 한나라 양국의 정치 투쟁과 관련이 있을 뿐, 결코 이사의 질투 때문은 아니라 보기도 한다. 한비의 자업자득이라고 보는 관점이다. 한비는 진나라의 통일 대업을 저지하는데 진력을 다했다. 그 구체적이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첫째, 진왕에게 조(趙)나라를 공격하도록 유세하였다. 전국 후기, 진나라는 세력이 강대하였다. 맹렬하게 세력을 확장하였다. 한나라가 첫 번째 희생양이 될 판이었다. 이에 “한나라의 왕은 그것을 염려해 한비와 진나라를 약화시키려 도모하였다.” 한나라의 “진나라 약화” 계획은 먼저 정(鄭)나라에 수리 공사를 진행하도록 진나라에 유세하였다. 진왕이 공을 세우는 것을 좋아하는 심리를 이용해 수리사업을 대대적으로 일으키게 하고 진나라의 국력을 소모시키려 하였다. 그 계략은 오래지 않아 발각되었다. 더 나아가 의도와는 반대로 ‘정국거(鄭國渠)’ 수리 사업은 진나라를 약화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부강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이르자 한비는 친히 진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다. 진나라에 도착하자마자 진왕에게 올리는 서신을 없애고 이사의 계획을 무너뜨려 진나라 군대를 조나라를 향하도록 계책을 꾸몄다. 그렇게 “한나라를 존속시킬” 목적을 달성하려 하였다.

 

둘째, 진나라의 군신 관계를 무너뜨리려고 하였다. 이 점은 서한(西漢) 유향(劉向)의 『전국책(戰國策)·진책(秦策)』에 언급돼있다 : 초(楚), 연(燕), 조(趙) 등이 연합해 진에 대응하려 하였다. 진왕이 대신들을 불러 상의하였다. 요가(姚賈)는 네 나라에 사신으로 가겠다고 자원하였다. 요가의 출사는 네 나라의 연합을 깨뜨렸고 진나라로 돌아간 후 후한 상을 받았다. 그러나 한비는 그것에 불만을 품게 되었고 진왕의 면전에서 요가를 비방하였다. 처음 요가를 공격할 때 진나라 재보를 가지고 다른 나라 군왕에게 뇌물을 줬다고 하면서 “왕의 권력과 나라의 일로 밖에서 자신이 제후에게 나눠 줬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어서 요가에게 인신공격하였다. 그가 “양(梁)의 대도요, 조(趙)의 쫓겨난 신하”라고 하였다. 그런 사람에게 후한 상을 내리는 것은 “여러 대신들에게 악영향을 준다”고 하였다. 진왕은 요가를 불러 사실 여부를 물었다. 요가의 답은 청산유수였다. 재보를 가지고 네 나라 군왕에게 준 것은 진나라 이익을 고려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만약 자신의 사사로운 이익에 있었다면 왜 진나라로 돌아왔겠냐고도 하였다. 자신의 출신도 꺼리어 숨기고 감추지 않았다. 강태공(姜太公), 관중(管仲), 백리해(百里奚) 등을 열거하면서 어떤 출신의 비천함도 ‘뛰어난 군주’에게 충성을 다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진왕에게 이간질시키는 말을 듣지 말라고 권했다. 마침내 진왕은 요가의 말을 신임하고 한비를 주살했다고 본다. 이렇게 본다면 한비는 자업자득으로 다른 사람을 비방하다가 끝내 자신을 해치게 된 인물이 된다.

 

 

그러나 이런 관점에 반대하는 학자들은 몇 가지 오류가 있다고 지적한다. 첫째, 『전국책』은 상당히 방대하고 복잡하다. 비록 유향이 교정하였지만 오류는 여전히 많고도 많다. 사마천은 사료를 신중하고 성실하게 감별하기로 유명하다. 그는 『사기』를 쓰면서 역사 기록 중 『전국책』 자료를 십 여 곳 채용하기는 했지만 유일하게 『진책』의 “네 나라가 연합하여”라는 내용은 활용하지 않았다. 이것으로 볼 때 『전국책』의 진실성에 회의를 품었을 가능성이 많다. 둘째, 한비는 “말을 더듬어 잘 표현하지 못했다”고 하였다. 한나라에 있을 때도 “여러 번 글을 올려 한왕에게 간언하였다”고 했다지 않던가. 그런데 진나라에 간 후 평소 태도와 판이하게 진왕의 면전에서 열변을 토한다? 이런 까닭에 한비가 자업자득으로 죽음에 이르렀다는 관점은 믿을 수가 없다고 본다.

 

이외에도 신선한 관점이 몇몇 있기는 하다. 그러나 개인적인 의견에 속할 뿐 역사학적 근거를 제시 못한다. 한비의 죽음이 이사와 권력투쟁을 벌이다 패배한 결과물이라고 보는 관점도 있다. 결국 한비를 애국자로 보고 “한나라를 보전”하려고 죽음에 이르렀다는 시각이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다. 한비와 이사는 모두 전국시대의 종횡가요 유세가였다. 달리 말하면 정객이었다. 한비가 진나라로 가 이사와 권력 투쟁을 벌였다면, 그래서 질투심이 생겼다면, 둘 다 그러하였을 것이다. 두 사람이 아귀다툼을 벌인 결과 이사는 승리하고 한비는 패해 죽음에 이르렀을 것이고. 그럴까?

 

또 다른 관점도 있다. 한비의 죽음은 문인의 성격에 의한 것이라 보기도 한다. 중국 지식인의 심리를 가지고 설명한다. 중국의 지식인에게는 나쁜 버릇이 있는데 바로 정치를 잊지 못한다는 점이다. 글을 쓰면서 매 구, 심지어 매 글자마다 정치적 미언대의(微言大意)를 심으려 한다. 정치를 하는 것과 문장을 쓰는 것을 동일시한다. 경전에 근거해 장편 논설문을 만든다거나 혹은 엄청난 분량의 글을 작성하면서도 현실 중의 인성, 이해관계, 권력 구조에 대해서는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한비도 자신의 문장 속에 어떤 표준, 혹은 어떤 법령을 근거로 어떤 사람을 주살하고 어떤 부류를 유배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학자의 의지와 기개에 의한 것일 뿐 구체적이지 못하다고 본다. 하지만 말하는 사람은 무심코 하지만 듣는 사람은 마음에 둔다고 하지 않던가? 한비의 그런 행위는 다른 사람이 문장을 읽고 개인의 이해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행동으로 옮기게 만들었을 수도 있다.

 

진왕은 정치가였다. 그는 한비의 학설에 경도되었다. 그러나 한비에 대한 불신을 해소하지 못했다. 진왕은 통치 야심을 채워줄 도구가 필요하였을 뿐이다. 자신이 바라는 도구에 합당하지 못하면 아무리 훌륭한 학문이나 학설도 가치가 없었다. 그렇게 한비의 죽음은 중국 봉건사회에서 문인이 정치하면서 자초한 불행이었다고 본다.

 

또 다른 관점도 있다. 한비의 죽음은 세객(說客)의 도의를 준수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본다. 양자(楊子)는 『법언(法言)』에서 한비의 죽음은 ‘세불유도(說不由道)’(유세함에 도를 따르지 않다)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도(道)’는 천도, 예의, 인덕 등의 뜻을 포함한다. 한비가 진왕에게 유세할 때 그의 사상은 ‘도’와 위배되었다. 세객인 한비는 타인을 설복시켜 자신의 뜻을 따르게 만드는 것이 무척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시키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진나라를 위하여 계책을 마련하면서 배신을 마다하지 않았고 자신의 조국까지도 멸망시켰다. 결국 한비는 세객의 준칙을 위배하면서 자신의 비극을 자초했다고 본다. 그런 점을 역사가들은 멸시하였고.

 

사마광은 한비의 죽음을 논하면서 말했다 : “나는 군자라 함은 자기의 친인을 가까이하듯 다른 사람의 친인을 가까이하고 자신의 국가를 사랑하듯 다른 국가를 사랑한다고 들었다. 그렇게 해야만 공훈이 탁월하고 명성이 아름다워 백 가지 복을 누릴 수 있었다 ; 지금 한비는 진나라를 위하여 방책을 바치면서 먼저 그의 조국을 멸망시킴으로써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였다. 그런 류의 죄를 범하였으니 본래 죽어도 죄가 남는데 어찌 불쌍히 여길 가치가 있겠는가!”

 

 

결국, 한비의 죽음에 대해서 여태껏 쟁론이 끊이질 않는다. 어쩌면 역사 진실은 각양각색의 문자 속에 숨어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영원히 진상을 알 수 없을 지도 모르고. 한비의 죽음은 천고의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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