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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9년 출륙금지령 ... 직접 교류 불가, 조선.항해술 단절, 해녀의 탄생

 

2010년 기점으로 가파르게 상승곡선을 그리며 제주로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다.

 

그러나 제주섬은 처절하고 처참한 시절을 마딱뜨려야 했던 곳이다. 제주선인들은 탐관오리들의 횡포로 목숨 걸고 제주를 탈출하려 했고, 해방 후에도 돌아온 고향을 다시 떠나야 했던 슬픔과 비애가 가득했던 곳이다.

 

도민 수가 급격히 줄자 1629년(인조 7년)에 제주에는 끔찍한 포고령이 내려진다. 제주선인들의 육지 출입을 금하는 출륙금지령이 그것이다. 탐라순력도를 남긴 이형상 목사는 제주의 상황을 기록한 남환박물(1703)에서 세 고을(제주·정의·대정)의 호구는 9552호, 인구는 남녀 4만3515명이라고 했다. 이 수는 200년 전보다도 줄어든 수이다.

 

제주선인들은 조세뿐만 아니라 진상품, 군역, 탐관오리들의 수탈, 지방 세력가들의 압력, 왜구의 침입, 식량난까지 겹치면서 하나 둘 고향을 탈출하기 시작했다. 남자가 줄어들어 여다(女多)의 섬으로 오랫동안 지내야만 했다. 다도해 등 육지로 탈출한 제주사람들은 전국 각지로 흩어졌다.

 

제주인구가 감소함에 따라 조정으로 보내는 특산물의 양이 줄어 들고 제주도를 방어할 군인이 부족하게 되었다. 급기야 1629년 제주사람들이 육지로 나가는 것을 금하는 출륙금지령이 내려졌다.

 

이 후 2백 년간 행해진 금지령으로 제주사람들은 육지와의 직접 교류가 불가능하게 되었고, 육지에서 온 상인들을 통해서만 교역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해상무역을 통해 발달되었던 조선술과 항해술은 단절되고 제주해안가에는 테우만이 떠다녔다.

 

고려사에는 ‘제주는 해외의 큰 진(鎭)이며, 송상과 왜인이 수시로 왕래하는 곳’으로, 1268년(원종 9년) 탐라에 명하여 배 100 척을 만들게 하였다. 1290년(충렬왕 6년) 배 3000 척을 짓는 데 탐라에 조칙을 내려 재목을 징발하며 탐라에서 건조한 배로 홍다구가 일본 정벌에 나섰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뛰어난 조선술과 항해술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인조실록에는 ‘제주백성이 유리하여 육지 고을로 옮겨가 사는 관계로 고을의 군액이 감소되자, 도민 출입을 엄금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라고도 기록하고 있다. 섬 전체가 거대한 감옥으로 변하였다.

 

이원조 목사의 탐라지초본에 의하면, 배에 절대 싣지 못하는 금지 품목에는 제주백성이 포함될 정도였다. 다수의 남자가 탈출하자, 여성들은 ‘바다에 뜬 감옥’에 볼모로 잡힌 가련한 신세가 되어버린 셈이다.

 

출륙금지령은 오히려 더 많은 제주사람들을 육지로 내몰았다. 감옥에서 해방되는 유일한 방도는 무단 탈출이었다. 15세기 중엽부터 18세기 초엽에 이르기까지 무단 탈출한 제주사람들은 주로 남해안에 정착하였다. ‘근년에 제주 세 고을의 인민들이 처자들을 거느리고 배를 타고 경상도, 전라도 바닷가 연변에 옮겨 정박하는 자가 수 천여 명이다.’라는 기록이 이를 말해준다.

 

제주도 포구에는 배라고 해봐야 테우만이 해변을 맴돌 뿐이고, 육지를 왕래할 수 있는 배라곤 한 달에 한 번씩 진상품을 실어 나르는 배가 전부였다. 경래관의 토색질은 조선팔도 어느 곳보다 극심 했다. 수령의 작폐를 직접 조정에 고변하려 해도 출륙을 금하니 어찌 해볼 도리가 없었다. 제주민에게 200년 세월은 단절과 억압의 슬픈 역사였다.

 

수탈을 피해 육지로 간 제주 포작(鮑作)인은 1만여 명에 이른다고 ‘제주기행’의 저자 주강현 교수는 말한다. 여기에 해난사고로 죽은 남자들이 연간 수백 명을 웃돈 까닭에 늘 여자가 많고 남자가 적었다. 제주여성은 포작인의 공백을 몸으로 때워야 했다. 그리하여 해녀라는 직업군이 제주도에 탄생한다. 자랑스럽게 내세우곤 하는 제주해녀의 탄생배경에 깔린 슬픈 역사이다.

 

포작(鮑作)인이란 제주를 탈출하여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를 비롯하여 황해도 등지로 숨어들어가 고기잡이와 해산물 채취를 주업으로 삼고 연안을 돌아다니며 살아가는 제주출신 남자어부들이다. 그들은 깊은 바다에서 전복을 잡아 진상하는 역할을 맡기도, 임진왜란에서는 물길 정보를 보고하는 적극적인 역할 등도 맡았었다.

 

200년 동안 지속된 출륙금지령이 해제된(1823년) 이후 1884년 제주인구는 8만9844명이란 기록으로 보아, 19세기말까지 제주인구는 10만 명을 넘지 못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1925년 의료기술 보급과 출생률 등 자연증가의 영향으로 20만5194명으로 급증, 1938년 20만3651명, 1944년 21만9548명으로 증가한다. 1945년에는 27만6148명 특히 해방 후 4·3 직전에는 30만 명으로 늘어난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문영택은?
= 4.3 유족인 부모 슬하에 부산 영도에서 태어났다. 구좌중앙초·제주제일중·제주제일고·공주사범대·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프랑스어교육 전공)을 졸업했다. 고산상고(현 한국뷰티고), 제주일고, 제주중앙여고, 서귀포여고, 서귀포고, 애월고 등 교사를 역임했다. 제주도교육청, 탐라교육원, 제주시교육청 파견교사, 교육연구사, 장학사, 교육연구관, 장학관, 중문고 교감, 한림공고 교장, 우도초·중 교장, 제주도교육청 교육국장 등을 지냈다. '한수풀역사순례길' 개장을 선도 했고, 순례길 안내서를 발간·보급했다. 1997년 자유문학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 수필집 《무화과 모정》, 《탐라로 떠나는 역사문화기행》을 펴냈다. 2016년 '제주 정체성 교육에 앞장 서는 섬마을 교장선생님' 공적으로 스승의 날 홍조근정훈장을 받았다. 2018년 2월 40여년 몸담았던 교직생활을 떠나 향토해설사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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