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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라이프 오브 파이 (2)

이름이란 그 사람의 존재와 불가분의 관계를 이룬다. 이름이 남아있는 한 사후(死後)에도 그 사람은 존재한다. 당연히 이름이 없어지면 그 사람도 없어지는 것이다. 옥스퍼드 언어학파는 “이름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그런 면에서 이름은 생명이며 존재 자체다.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는 우리가 대개는 아무 생각 없이 부르고, 또는 불리는 ‘이름’을 생각하게 한다. 인도 타밀족인 주인공 소년 파이(Pi)의 정식 이름은 ‘피신 몰리토어 파텔(Piscine Molitor Patel)’이다. ‘몰리토어(Molitor)’라는 인도에서 다소 생소한 이름이 들어간 이유는 그의 삼촌이 프랑스 파리 여행 중 묵었던 호텔의 수영장 물의 깨끗함에 감동해서 갓 태어난 조카의 이름에 생뚱맞게도 파리 호텔 이름을 넣은 것이다. 그 물처럼 맑고 깨끗하게 살라는 삼촌의 축복이었는지 모르겠다. 파리 수영장의 물이 얼마나 깨끗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갠지스강의 ‘똥물’ 수영에 익숙한 인도인이라면 웬만한 수영장은 모두 에비앙 생수처럼 감동할 만큼 깨끗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정작 소년 피신 몰리토어 파텔이 이름 때문에 놀림감이 됐던 것은 몰리토어라는 이질적인 불어 때문이 아니라 영어의 ‘pissing(오줌)’과 발음이 비슷한 ‘피신(Piscine)’이라는 이름 탓이다. 중학교에 입학하자 교장 선생님이 ‘오줌’이라고 불러주는 ‘모범’을 친히 보이시고, 전교생이 그를 오줌이라고 부르게 된다. 이름이란 참으로 묘하다. 소년이 오줌을 지리고 다닌 것도 아니고 오줌 냄새 풍기는 것도 아니건만 아이들은 그 이름만으로 소년을 오줌 대하듯 한다. 모두에게 오줌이라 불리면 오줌처럼 돼가는 것이다.

 

소년은 필사적인 노력으로 자신의 이름을 Piscine의 첫 두 글자만 따서 ‘파이(Pi)’라고 소개한다. 스스로 영원성과 무한대를 상징하는 파이라는 위대한 이름으로 개명한다. 파이라는 이름을 사람들에게 각인시키기 위해 책 한권 분량으로도 끝나지 않는 원주율의 숫자를 모두 외우는 수고마저 마다하지 않는다. 이름이란 그만큼 소중한 것이다.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 벵골 호랑이의 이름도 사연이 깊다. 망망대해에서 파이와 작은 구명보트에 동승한 호랑이는 리차드 파커(Richard Parker)라는 당당한 이름을 지녔다. 리차드 파커는 사실 호랑이 사냥꾼의 이름이다. 이 사냥꾼이 벵골 숲속에서 어미 호랑이와 새끼 호랑이 한마리를 포획한다. 새끼 호랑이가 도망치다 목이 말라 강가에서 허겁지겁 물을 마시다 잡히자 사냥꾼은 이 새끼 호랑이에게 ‘갈증(Thirsty)’라는 이름을 붙여 파이의 동물원에 팔아넘긴다.

 

이때 서류 작성에서 실수로 새끼 호랑이 이름란에 자기 이름 리차드 파커를 써넣고 자기 이름 칸에는 새끼 호랑이 이름인 ‘Thirsty’를 기입한 것이다. 파이의 아버지인 동물원 주인은 재미있는 실수라며 이후로 새끼 호랑이를 리차드 파커로 부르며 사육한다. 졸지에 호랑이는 파커 가문의 리차드가 되고, 사냥꾼은 호랑이 새끼가 된다.

 

이것을 철학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소위 ‘성명철학’을 생각한다면 Piscine이라는 멀쩡한 남의 이름을 Pissing(오줌)으로 바꿔 부른다든지, 사냥꾼과 호랑이 이름을 재미 삼아 바꿔 부르지는 못할 일이다. 이름이란 그 사람의 존재와 불가분의 관계를 이루기 때문에, 이름이 남아있는 한 사후(死後)에도 그 사람은 존재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한 모양이다.

 

 

“이름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옥스퍼드 언어학파의 규정을 보면 이름은 생명이며 존재 자체다. 또한 이름은 단순히 한 사람을 다른 사람과 구분 짓는 것을 넘어 그의 존재와 본질의 일부를 이루며, 그로부터 다른 결과가 파생된다고 믿는다. Piscine을 Pissing(오줌)이라 부르면 멀쩡했던 Piscine이 정말 오줌처럼 되고 오줌 같은 인생을 살지도 모를 일이다.

 

내 이름은 내가 나를 부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남들에게 불리기 위한 것이다. 독일의 신학자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은 데카르트의 유명한 선언 ‘cogito ergo sum(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을 ‘cogitur ergo sum(나는 생각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으로 바꾼다. 다른 사람들이 나와 나의 이름을 존중해 줄 때 비로소 자신도 자신의 이름에 책임을 질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들에게 마음 상한 자세한 사연을 알 수는 없지만, 많은 누리꾼이 국회의원은 국해(害)의원, 검찰을 떡찰, 경찰을 견(犬)찰이라 부른다. ‘박근혜’를 ‘박그네’ 혹은 ‘바꾼애’라 부르고 ‘문재인’을 ‘문죄인’ 혹은 ‘문재앙’이라 부르며 모욕하고 조롱한다. 모두 자신의 일과 자신의 이름이 귀하게 불리기를 원한다면 남의 이름부터 귀하게 여기고 존중해줘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모두 자신의 이름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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