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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삶이 피폐해 바다로 내몰린 선인들 ... 현실은 꿈 찾아 바다를 건너는 아이들

 

제주섬에는 지금 개벽 이래 가장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삶의 터전을 제주로 옮긴 이들이 많듯 객지나 타국으로 떠난 제주사람들도 많다.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제주를 탈출하듯 바다로 떠난 제주선인들의 슬픈 역사를 만나기도 한다.

 

여러 역사서에 근거해 추정한 인구기록에 의하면, 탐라국 8천 명, 고려 중기 1만 명, 고려 말 5만 명, 조선건국 이후인 1443년엔 6만 4천 명이었다. 1703년(숙종 29년)에는 4만 3천여 명으로 이전보다 줄었다고 이형상 목사의 ‘남환박물’은 전한다.

 

송상과 왜인이 수시로 왕래하던 탐라는 조선의 왕권이 강화되면서 동아시아의 해상교역에서 서서히 자취를 감춘다. 조선술과 항해술은 출륙금지령(1629~1823)으로 쇠퇴해 제주해안에는 쪽배인 테우만이 떠다녔다.

 

방성(房星)이 비춘다는 제주는 오래전부터 말 키우기에 좋은 자연환경인 반면, 토질은 화산회토로 농사짓기엔 척박한 편이다. 자연히 제주선인들은 농사보다 말 교역에 관심을 더 가졌다.

 

기록에 의하면 말 교역에 매달린 제주선인들은 밤에 출발해 아침이면 육지에 가서 말을 팔고 저녁에 돌아올 정도의 항해술을 지녔었다. ‘제주 말은 값이 본디 비싼데다가 한 마리 가격이 노비 3구에 해당하니, 나주에 오면 이미 한 곱이 되고 다른 도에 가면 또 한 곱을 더하므로 사람들이 사기 어렵다.’라고 문종실록은 전한다.

 

10소장 조성 등 말 사육에 대한 전권을 행사하기 시작한 조선조정은, 사람의 호적처럼 사마(私馬) 마저도 신고하게 하는 장적(帳籍)을 만들어 말을 관리하도록 법령화했다.

 

말 사교역마저 막힌 제주선인들은 우마피 교역, 즉 밀도살과 밀교역으로 활로를 찾으려 했다. 그러자 조정은 말 도살범들을 평안도 등지로 강제 이주시키고 밀도살과 밀교역 관련자들을 참형으로 다스리니, 삶이 더욱 피폐해진 제주선인들은 급기야 집단으로 출륙유랑의 길로 나섰던 것이다.

 

제주유민들은 바다 건너 어디로 갔을까? 남해안을 비롯한 국내는 물론 중국 요동반도의 해랑도까지 분포됐다는 기록이 왕조실록에 수십 회나 등장한다. 역사서에서는 남해안 등지에서 어로로 생계를 이어가는 제주유민을 두무악, 두모야지, 포작인 등으로 부른다.

 

1477년 성종실록에는 ’사천·고성·진주 지방에 제주의 두독야지(豆禿也只)라고 칭하는 사람들이 처음 2, 3척의 배가 32척으로 불더니, 강기슭에 집을 지었는데 의복은 왜인과 같으나 언어는 왜말도 한어(漢語)도 아니며, 선체는 왜인의 배보다 더욱 견실하고 빠르며, 항상 고기를 낚고 미역을 따는 것으로 업을 삼습니다.’라고 임금에게 아뢰고 있다.

 

1591년 2월 충무공 난중일기의 한 대목이다. ‘탐라사람이 여섯 식구를 거느리고 도망쳐 나와 금오도(전남 여천)에 머물다가 방답(防踏)을 지키는 순환선에 잡혔다고 알려 왔기에 문초 후에 승평(전남 순천)으로 압송하라고 일렀다.’

 

난중일기에는 제주의 고어(古語)로 어부의 뜻인 보재기란 글자가 여러 번 등장한다. 물길정보와 배 다루는 솜씨가 뛰어난 제주의 어부인 보재기들을, 수군이 그냥 둘리 없었던 시대의 상황이었을 것이다. 임진왜란 동안 여러 전투의 사망자와 부상자 현황에서 제주유민이 차지하는 비율이 10%를 넘는다고 역사서는 전한다.

 

사람들이 대거 출륙해버린 제주도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중종실록에는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 주민들이 날로 유망(流亡)해 고을이 거의 비어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출륙금지령 이후 제주인구는 1836년 7만5천 명, 1884년 9만 명 등으로 점차 증가하나, 일제 강점기와 4·3을 거치면서 큰 변동을 겪는다.

 

바다로 내몰린 제주선인들의 과거사에서 우리아이들도 교훈을 얻을 수 있으면 좋겠다. 과거와는 사뭇 다른 현실에서 자신의 꿈을 찾아 바다를 건너는 제주아이들의 미래를 그려본다. 우리 아이들이 제주를 알고, 사랑하고, 세계를 누비며 자아실현 하는 인재로 커 가길 두 손 모은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문영택은?
= 4.3 유족인 부모 슬하에 부산 영도에서 태어났다. 구좌중앙초·제주제일중·제주제일고·공주사범대·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프랑스어교육 전공)을 졸업했다. 고산상고(현 한국뷰티고), 제주일고, 제주중앙여고, 서귀포여고, 서귀포고, 애월고 등 교사를 역임했다. 제주도교육청, 탐라교육원, 제주시교육청 파견교사, 교육연구사, 장학사, 교육연구관, 장학관, 중문고 교감, 한림공고 교장, 우도초·중 교장, 제주도교육청 교육국장 등을 지냈다. '한수풀역사순례길' 개장을 선도 했고, 순례길 안내서를 발간·보급했다. 1997년 자유문학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 수필집 《무화과 모정》, 《탐라로 떠나는 역사문화기행》을 펴냈다. 2016년 '제주 정체성 교육에 앞장 서는 섬마을 교장선생님' 공적으로 스승의 날 홍조근정훈장을 받았다. 2018년 2월 40여년 몸담았던 교직생활을 떠나 향토해설사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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