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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강제징용 피해자 강공남(90)씨 ... "1943년 아버지 대신 강제노역 동원"

 

“비행기 폭격을 받으면서까지 노동을 했다. 처음에는 또 삐라를 뿌리나 했는데 땅에 떨어지니 터지더라”

 

제주도 강제징용 생존 피해자 강공남(90)씨는 7일 제주미래컨벤션센터 3층에서 열린 (사)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자연합회와 (사)일제강제노역피해자정의구현전국연합회의 ‘제주도 일제강제징용 피해자 집단소송 설명회’ 자리에서 자신이 경험했던 일제 강제노역에 대해 증언했다. 

 

강씨는 이날 설명회에서 “1928년생이다. 당시에 태어난 사람들은 모두 고생했다”며 “당시 모슬포비행장과 제주시 정뜨르비행장(현 제주공항)에서 일을 했다. 한 부락에서 몇 십명씩 조를 짜서 연중 계속 일을 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강씨는 “당시에는 농번기에도 동원이 되고 농한기에도 불려갔다”며 “1943년으로 기억한다. 아버지가 모슬포에 가서 일을 하게 됐는데 농번기가 겹쳐 대신 가게 됐다. 어머니가 미숫가루를 타주셨다”고 말했다. 당시 강씨의 나이는 15세였다. 

 

강씨는 “모슬포에 가서 보니 먹는 밥이 콩밥이었다”며 “그 마저도 부족해서 집에서 가지고 온 미숫가루를 타 먹으면서 일을 했다. 비행기 집 만드는 일을 했는데 순 인력으로 만들었다”고 회상했다. 

 

이어 “다음에는 제주시 정뜨르 비행장에 아버지 대신 나가 일했다”며 “비행장을 넓히는 공사였다. 사람의 힘으로 밀고 흙을 날라서 비행장을 확장하는 매립공사를 했다. 먹을 것이 부족한 것은 마찬가지였다”고 말했다. 

 

강씨는 “다음에는 제가 18세가 되자 내 이름으로 징용 통지서가 왔다”며 “모슬포에 가서 콩밥을 먹으면서 일을 했다. 일제 말기가 되니 비행기 폭격을 받으면서 일을 했다”고 당시 상황을 증언했다. 

 

강씨는 “처음에는 삐라를 뿌리는 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땅에 떨어지니 그게 터졌다. 그런 상황에서 일을 했다”고 말햇다. 

 

그러면서 “뒤늦게나마 이렇게 증언을 할 수 있어서 기쁘고 감사하는 마음이다”라고 덧붙였다

 

이날 설명회를 주최한 (사)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자연합회 장덕환 공동대표 겸 사무총장은 “지금까지 우리는 권리를 찾지 못하고 역사 속에 묻은 상태로 여기까지 왔다”며 “이제라도 와서 대법원 승소판결이 나면서 고무적인 일이 생겼다. 이 돈은 반드시 받을 돈이고 받았어야 하는 돈이었다”고 강조했다. 

 

이번 설명회의 주최측은 제주를 시작으로 전국에서 집단소송 참여자를 모집할 계획이다. 현재까지 제주에서 소송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인 이는 111명으로 알려졌다. 이 중 피해생존자는 7명이다. 

 

대법원은 지난달 30일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4명이 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  재상고심에서 “피해자들에게 각각 1억원을 배상하라”는 원심 판결을 확정한 바 있다. [제이누리=고원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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